각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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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신무왕(神武王)

몽사(蒙舍)

각라봉(閣羅鳳)
생몰년도
712년 ~ 779년
재위기간
748년 ~ 779년

1. 개요
2. 생애
3. 비석



1. 개요[편집]


남조의 제6대 군주. 시호는 신무왕(神武王). 피라각의 아들.


2. 생애[편집]


748년, 아버지 피라각(皮羅閣)이 죽자 뒤를 이어서 아들 각라봉이 즉위했다. 각라봉의 아들 봉가이(鳳伽異)는 양과주자사(陽瓜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당과 남조는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는데, 바로 당 제국이 안녕성(安寧城)을 설치해 남조를 통치하고자 하는 뜻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미 각라봉은 즉위할 때부터 당의 반간계때문에 일어난 내란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게다가 운남태수 장건타(張虔陀)가 각라봉에게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의 물품을 요구했고, 각라봉이 무시하자 장건타는 각라봉을 욕하고 질타했다. 이에 각라봉은 사죄했지만, 멘탈이 나갈때로 나갔다. 결국, 이해에 군사를 일으켜 요주(姚州)를 공격해 장건타를 죽였다. 당 조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751년,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 선우중통(鮮于仲通)이 즉각 군사를 이끌고 남조를 공격하였다. 드디어 당-남조 전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당군은 융주(戎州)와 수주(雟州)로 들어가 군사를 두개의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각라봉은 일단 당에게 사죄를 해야만 했다. 자칫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 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라봉은 선우중통에게 사자를 파견해 반성할 기회를 요구했고, 요주에 성을 쌓겠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만약 거절하고 계속 진격한다면 토번에 신속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선우중통은 크게 노하며 사자를 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선우중통은 백애성(白厓城)에서 크게 패배했다. 무려 6만의 병력을 잃고 목숨을 겨우 부지한 채 당에 돌아온 선우중통은 패전의 책임을 숨기고 경조윤으로 승진했다[1] 한편, 각라봉의 경고대로 남조는 이후부터 토번에 신속하였고, 당과의 교통을 단절했다. 토번은 당시 고선지의 서역원정으로 패권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남조의 신속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토번은 남조와 형제관계를 맺는 외교노선을 취했다. 그리고 남조는 이때부터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토번의 아우라는 뜻에서 찬보종(贊普鍾)으로 제정했다.


3. 비석[편집]


파일:external/cfs7.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ENPTlVAZnM3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YvNjM1LmpwZy50aHVtYg==&filename=635.jpg
남조덕화비 판본
파일:external/www.nlc.gov.cn/W020110629680467781591.jpg
남조덕화비 비각
그러나, 남조는 태화성에 남조덕화비(南诏德化碑)[2]를 세워 본의아니게 당과 절교하게 되었음을 밝혔다.[3] 그 일부가 신당서에서 나온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대대로 중국을 받들어, 누대로 책봉과 은상을 받았다. 후대에 다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한다. 만약 당에서 사자가 오면 이 비(碑)를 가리키면서 내 죄를 씻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신당서』 「남만전」 상

사료에 근거하여 아마도 각라봉은 장건타를 우발적으로 죽인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장건타가 평소 그에게 꾸지람을 많이해서 서로간의 화가 생겨 일어난 것이지 이것이 당에 대한 배반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가령 선우중통이 남조의 반추를 알아주었다면 남조와 당의 관계는 완만히 해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우중통이 이를 알아주지 않았으니 어쩔수 없이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어쨌든, 선우중통은 패전의 치욕을 갚기위해 당시 당의 실권자 양국충(楊國忠)을 불러들였다. 754년, 양국충은 스스로 검남절도사를 겸하였고, 시어사 이복(李宓)으로 하여금 편성된 10만의 대군으로 남조를 정벌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태화성 공격 초기부터 역병으로 전세는 불리해졌고, 전쟁 수행 도중 이복이 남조군에게 붙잡혀 전사함으로써 사실상 패배했다. 또한, 전투 중 약 7만여명의 당군이 얼하이 호에 수장되었고, 남조인은 비록 적국의 사람이지만 딱하다고 여겨 이들 시체를 옮겨 장사를 지냈는데 그것이 바로 만인총(萬人塚)이었다. 이후에도 당은 남조를 공격했지만 그때마다 패배하였고, 천보전쟁에서 죽은 자만 약 20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755년, 양귀비의 양자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다. 각라봉은 당의 혼란을 틈타 수주(嶲州)와 회동군(會同軍)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서쪽으로 또 심전만(尋傳蠻)[4]을 항복시켰다. 광덕(廣德) 초에 봉가이(鳳伽異)가 심전만이 거주하는 곳에 자동성(柘東城)을 축조했다. 일찍이 봉가이가 죽고, 779년, 각라봉이 붕어하자 그의 손자 이모심(異牟尋)이 왕위를 이어갔다.

[1] 이후 선우중통은 허위보고한 것이 드러나 실각한다.[2] 태화성유지에 존재하는 남조 문화재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国家重点文物保护单位)로 지정한 바 있다. 자세한 정보는 # [3] 비석이 세워진 시기는 766년으로 비정한다.[4] 심전만은 만족에서 가장 낙후된 민족으로 풍속이 없다. 가시밭을 지나가도 아파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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