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국보 (문단 편집) == 생애 == 강국보는 1872년 3월 12일 황해북도 수안군 대천면 남정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곡산의 천도교인 이경섭(李景燮)을 통해 서울의 만세 소식이 수안군에 전해지자, 수안군 천도교 교구장 [[안봉하]]는 3월 1일과 2일 2차례에 걸쳐 천도교 관계자들과 논의한 끝애 군내 각면의 천도교인들을 동원하여 독립선언서 배포와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이때 천도교 전도사였던 강국보는 각처 동지들에게 거사계획을 알려줬고, 대천(大千), 오동(梧桐), 연암(延岩), 공포(公浦) 등 각 면의 천도교인과 애국동지들에게 거사 계획을 전달하고 군중을 동원했다. 3월 3일 오전 6시경 [[최양봉]], [[차제남]], 김응하, [[한진석]], [[유광선]], 김태혁, [[박이봉]], [[최석구(1864)|최석구]], 김응도, 박태수 외 약 130~140여 명과 함께 교구실에 모여 헌병분견소를 향해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강국보는 이영철, [[홍석정]] 등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고 "우리는 이미 조선독립선언을 했으니 속히 이 분대를 우리들에게 넘겨야 한다. 만약 수긍하지 않으면 잇달아 지방으로부터 습래하는 천도교도들이 늘어나 끝까지 이것을 요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동 분대장 등이 해산할 것을 설유하자 일단 대표자 2명을 남기고 물러났다가, 오전 11시경에 다시 몰려들어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동욱이 선두에 서서 동 분대원에게 동 분대의 퇴거를 요구하자, 동 분대원들이 발포를 가해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이후 체포된 강국보는 1920년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죄 혐의로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강국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강점기의 천도교 신자]][[분류:수안군 출신 인물]][[분류:1872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족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