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영소 (문단 편집) == 가족 관계 == [[파일:강명화가족_new.png]] 1920년대 후반 시카고에서 식당을 경영하던 시기에 촬영된 사진. 오른쪽부터 강영대, 강영소, 강영문, 강영상. 우축 하단은 강영각. * [[강명화]](姜明化, 1868~1933): 강영소의 부친. 1900년 1월부터 1902년 8월까지 증산군 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재임했고, 1905년 가족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주한 후 공립협회에 가임하여 활동하는 동시에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12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1917년부터 사업차 칠레, 멕시코, 샌프란시스코, 한국 등을 오갔다. 1933년 2월 3일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한 달만에 고향에서 사망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대]](姜永大, 1885~1948): 강명화의 첫째 아들.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에 가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강영소와 함께 대한인 국민회 및 신한민보에서 활동했고 191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표원을 맡았다. 이후 1929년 11월 시카고에서 동생들과 함께 카페테리아 사업에 동참하여 1930년 말 강씨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의 지배인으로 일했다. 그러나 강영소가 사망한 뒤 사입이 부진하자 결국 다른 사업가들에게 넘겨주고 1933년 12월 대한인 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흥사단 사업에 적극 참여해 독립금, 국방 공채 구입 등 독립운동 자금을 꾸준히 지원했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문]](姜英文, 1888~1965): 강명화의 셋째 아들. 아버지와 형제들이 하와이로 이주했을 때, 고향에서 어머니 송씨와 여동생 봉강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1914년 3월 샌프란시스코로 유학하여 9년만에 가족들과 재회했다. 이후 시카고에 자리를 잡아 하워드 식당을 경영했고 형과 함께 시카고 한인 교회를 이끌었다. 1938년 단우번호 299번으로서 흥사단에 입단했고, 1946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흥사단 미주위원부 서무원으로서 활동했다. 1947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을 맡았고, 1961년과 1962년에 이사부장을 맡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1889)|박희도]]의 여동생 박영복과 결혼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상]](姜永商, 1892~?): 강명화의 넷째 아들.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고, 1919년 대한인 국민회 오하이오 주 지방회 발기회원으로 참여했다. 형 강영소와 함께 국민회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지원했고, 재미한인사회에서 임시정부 재원의 대부분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형제들과 함께 시카고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그러다가 1944년 이후로 소식이 끊겼고 그가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았다. 201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 강영렬(姜泳烈, ? ~ 1922): 신한민보 1922년 2월 9일자 <강영문 씨의 참보> 기사에 따르면, 강영렬은 강명화의 여섯 형제 중 다섯 째이며 만주에서 독립군에 가담해 항일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2년 경에 독립군끼리 이념 문제로 대립하며 서로를 죽이는 것에 절망해 "나는 차마 붉은 군인이나 내 동족을 죽일 수도 없으며 그들에게 죽기로 애원하니 자살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고 한다. * [[강영각]](姜泳珏, 1897~1946): 강명화의 여섯번째 아들. 8살 때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했다가 12살 때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업랜드 소학교와 클레아몬트중학교를 재학했고 포모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20년에 하와이로 돌아가 와히아와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1925년에 영문격월간 '한인소년'을 창간했다. 이후 포모나 대학을 졸업한 뒤 형 강영소 등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국민회에 가담해 여러 잡무를 맡았고, 1931년 흥사단에 입단해 단우 번호 261번을 획득했고 1944년에 제12반 하와이 반장이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에 쓰일 자금을 지원하다가 1946년 2월 4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그의 유족이 현재까지 살아있으며, 그 중 딸 수산 강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가문이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사실을 통보받았다.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강봉강(姜鳳姜, ?~?): 강명화의 막내 딸. 독립운동가 [[양우조]]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강서군 출신 인물]][[분류:1886년 출생]][[분류:193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