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영소 (문단 편집) === 다시 총회장에 선출되다 === 그 후 강영소는 업랜드로 내려갔다가 1918년 3월 9일 홍사단 단우 문영운과 함께 리버사이드 재류동포들을 만나고자 차를 타고 가다가 온타리오 근처에서 기차와 충돌하고 말았다. 이때 문영운은 사망했지만, 강영소는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 않고 병원에서 사흘 만에 퇴원했다. 이후 강영소는 부인과 아들을 귀국시킨 뒤 미국 동부에서 활동을 준비하다가 1919년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마침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미국에도 전해져 독립 운동의 움직임이 고조되자, 대한인 국민회 중앙초오히에서는 국제 관련 외교를 전담하면서 독립 운동의 지원과 평화회의의 교섭을 위한 모금 등을 전개했다. 그해 3월 24일에 개최된 중앙총회의 임시위원회에서는 강영소를 사무원으로 선정했다. 강영소는 독립의연금 모집과 인구 등록 등의 일반 행정사무를 주도했고 재무 일도 겸임하다가 4월 29일 중앙총회의 하와이 특파위원으로 선임되어 하와이로 파견되었다. 중앙총회에서 하와이에 특파위원을 파견한 것은 [[이승만]] 계열이 장악한 하와이지방총회와 [[박용만(1881)|박용만]] 계열이 장악한 대조선독립단의 통합을 주선하기 위해서였다. 이 두 세력은 1910년대 중반부터 대립하고 있었는데, 중앙총회는 독립운동의 연라고가 일치된 행동방침을 마련하려면 두 단체가 화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강영소는 6월 4일 하와이에 도착해 두 세력의 합동을 주선했고 7월 18일 합동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이 합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9월에 이르러 결렬되고 말았다. 결국 강영소는 이승만에게 자제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낸 뒤 9월 289일 호놀룰루를 떠나 10월 5일 시애틀에 도착한 후 10월 9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또다시 북미지방총회의 총회장 후보로 선출되었고 11월 20일의 선거에서 1920년도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암담했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으로 고조되었던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 운동에 대한 열기는 1920년에 이르러 악화되었고, 독립운동 자금과 관련된 문제 등으로 이승만과 대한인 국민회의 갈등이 갈수록 심각해졌으며, 구미위원부 내부의 갈등도 고조되고 있었따. 게다가 경비 마련이 어려워져 총회 활동 자체가 축소되었고, 신한민보도 발행 회수를 줄여야 했다. 급기야 강영소는 월급의 절반만 받으며 공무를 봐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썼고 사망한 동포에 대한 구제와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에 대한 의연금 1,000원 지원, 새로운 지방회의 설치 등을 추진했으며, 초등교과서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강영소는 1920년 10월에 가장 많은 대의원의 지지를 받으며 1921년도 총회장 후보에 추천되었지만 이를 거부했다. 이후 1920년 12월 15일 북미지방총회 대의회에서는 처분안 제2안으로 전임 총회장 강영소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 기념장을 수여햐고 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단, 그 상금 금액은 200원으로 한정되었다. 또한 1921년 2월 1일 국민회 창립 12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국민회 훈장을 받았고 국민회의 단합과 조화를 강조하는 '국민회의 오늘'이라는 강연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