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영소 (문단 편집) === 시카고의 사업가 === 총회장에서 물러난 뒤 국민회를 떠난 강영소는 1921년 6월 사업을 목적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는 정원명(鄭元明)과 함께 8월 1일에 회사를 창립했다. 그가 다룬 업종은 기구 상점과 식물상점, 그리고 목수 공장의 세 종류였다. 이후 그는 사업을 순조롭게 이끌어갔고 1922년 9월에 지식과 수양을 목표로 하는 '금요강의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의 하와이 호놀룰루 지국을 운영했다. 1922년 12월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강혜순과 결혼하고[* 첫번째 부인은 조선으로 귀국하던 중 선상에서 사망했다.] 시카고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시카고에서 사업에 몰두하는 한편, 1924년 시카고 지방회의 3.1절 기념식에서 '나의 고국'이라는 연설을 한 뒤 '열 가지 답답한 사건'이라는 기록을 낭독해 현실에 대한 그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외국인에게 외교를 너무 할 줄 모르는 이의 일도 답답하거니와 동포에게 외교를 힘쓰는 이의 일이 더 답답하다. (중략) 외국 사업에 너무 냉담한 것도 답답하거니와 자신의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서 독립이 언제 되나 물어보는 이의 일이 더 답답하다. 강영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양식당을 운영하던 동생 강영상의 도움을 받으며 시카고에서 로렌스 카페테리아(Lawrence Cafeteria)라는 이름의 식당을 열었고 1925년엔 천세헌(千世憲)과 동업으로 새 식당 디버시 카페테리아(Diversey Cafeteria)를 개업했다. 강영소는 시카고에서 식당업으로 크게 성공했고, 1930년 말 형제들과 함께 '강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KANG BROTHERS CAFETERIA CO.)'를 창립했다. 로렌스 카페테리아는 1만 6천 달러의 자본금으로 이뤄진 합자회사로 총수입이 5만 달러에 이르렀고, 고용인은 14명이었으며, 강영소의 형 강영대가 지배인을 맡았다. 또한 디버시 카페테리아는 자본금이 2만 달러, 총수입은 6만 달러였고, 고용인은 16인, 지배인은 강영소 본인이었다. 이보다 큰 규모의 한인 식당으로는 [[김경(독립운동가)|김경]]의 워싱턴 카페테리아 뿐이었다.[* 워싱턴 카페테리아는 1930년에만 13만 달러에 달하는 수입을 벌었고 고용인은 40명이었다.] 강씨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는 1931년 중반 윌슨 가에 윌슨 카페테리아(Wilson Cafeteria)를 새로 개업했다. 이로서 강영소 집안은 총 3개의 식당을 경영했다. 한편 강영소는 국민회 시카고 지방회와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 지원 활동을 벌였다. 그는 1924년 이후 국민회 시카고 지방회의 법무, 서기, 총무, 대의원을 역임했고 1925년 4월 안창호가 미국을 순방할 때 시카고에서 환영회를 열어줬다. 또한 국민회에 자금을 지원해주면서 1930년 2월 1일 국민회 창립 기념일에 '우리 국민회'라는 연설을 발표해 국민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또한 1928년 재민동포문제 대책강구회 위원, 국내 한인수재구제회 서기, 1929년 임시정부 임시재정후원회 위원, 1930년 국내 학생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시카고 공동회 발기인 겸 재무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1928년 3.1절에는 '3월 1일'이라는 기사를 지어 신한민보에 발표해 3.1운동의 투쟁 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강영소는 한인교회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1924년 7월 김창준을 목회자로 한 시카고 한인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그는 이사부원으로 참여했고 부인 강혜순은 주일학교를 담당했다. 이후 그는 매년 이사부원으로 선출되어 교회에 관여했고 1931년에는 이사부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건물을 매입해 시카고 한인교회에 증여하기도 했다. 또한 신한민보사 시카고 지국 설치에 가담하고 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31년 1월 11일, 강영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제22회 국민회 대의원회에서 시카고 지방회 대의원 천세헌의 대리로 이 대의원회에 참석했다. 이후 1월 18일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후 환영회에 참석해 '성공을 위해 준비하자'는 연설을 발표했으며, 2월 1일 시카고에서 열린 국민회 창립기념일 행사에서도 유사한 연설을 했다. 그해 4월에는 국민회 회원들에게 의견을 묻는 '재미한인통일ㅈ촉진의견서' 작성에 가담했으며, 5월 28일자 신한민보에 '재미 한인 통일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미 한인 단체들의 통합은 이뤄지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