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영소 (문단 편집) === 사망 === 1931년 8월 5일 오후 1시, 강영소는 고혈압으로 뇌혈관이 터지는 바람에 실신했다. 그는 오른쪽 반신불수가 되어 병원에서 진찰받았고, 6개월 후에 어느정도 병세가 회복되자 퇴원했다. 이후 그는 사회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 와중에 형 강영대가 경영해 오던 로렌스 카페테리아가 파산 위기를 맞다가 김경에게 인수되었다. 그리고 디비시 카페테리아 역시 강영소 사후 법정관리로 넘어갔다가 1936년 1월에 다른 사업가에게 넘어갔다. 1934년 8월 24일, 강영소는 병이 재발되어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8월 26일 오후 9시 45분, 그는 끝내 눈을 감았다. 이때 그의 나이 만 48세. 시카고 한인사회는 [[한장호]], [[강영승]], [[김경(독립운동가)|김경]], [[나재원]], [[최능익]]을 장례위원으로 삼았고, 영결식은 8월 28일 오후 3시 링컨 가에 있는 장례식장에서 [[한승곤]] 목사의 주례하에 거행되었다. 태극기로 덮은 그의 관은 임초, 김경, 정태은, 나재원, 한장호, 강영승이 운구했고, 10여 대의 자동차로 묘지로 이동해 어빙 파크(Irving Park)에 안장되었다. 국민회는 강영소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총회장 빅일규의 명의로 8월 27일자로 부고를 냈고, 신한민보는 8월 30일자 기사에 그의 사망 사실을 1면 상단에 보도했다. 이어 9월 6일 자에 장례 소식과 함께 [[홍언]]의 추도사를 실었으며, 9월 13일자에는 홍사단의 추도사 및 [[백일규]]의 추도사를 게재했다. 이 추도사들은 모두 강영소가 국민회와 미주 한인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지인들이 세운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다. >YOUNG SO KANG >1886~1934 >IN MEMORY OF HIS UNTIRING SERVICE K. N. A. 2011년, 대한민국 정부는 강영소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