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진석 (문단 편집) == 생애 == [[1890년]] [[12월 29일]]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용산방 하리(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일동 하리마을)에서 아버지 강돈욱(康敦煜)과 어머니 위돈신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영 교수의 <김일성 열전>에 따르면,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에게는 아들로 '강진석' '강용석', '강창석'이 있었고 막내 딸로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 있었다. 이 중 장남인 강진석은 즉 '''김일성의 큰외삼촌'''이다. 일본 내 지한파 연구자인 와다 하루끼의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도 강진석은 김일성의 외삼촌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아버지 강돈욱은 1929년 4월 30일 [[조선총독부]] 평안남도지사 [[소노다]] 히로시(園田寬)로부터 [[비료]]매매업 면허(매매 제403호)를 [[http://db.history.go.kr/id/gb_1929_06_06_a07270_00070|취득해]]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대타령리(現 평양시 [[보통강구역]] 유경1동) 742번지에서 비료매매업을 경영했고, 평양부 교외에 기백창덕학교(紀白彰德學校)를 설립해 1937년 8월 14일 이사에 [[http://db.history.go.kr/id/gb_1937_10_11_a32220_00380|취임해]] 활동하던 인물이다. [[1919년]] 음력 11월 중순 평양부 신양리(現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에서 김용배(金用培)가 독립운동 후원을 목적으로 청년회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해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 음력 7월에는 고향인 대동군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927|이춘성]](李春成)과 만나 그와 함께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에서 박봉욱(朴奉煜)과 홍치룡(洪致龍)으로부터 각각 군자금 150원과 50원을 모집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7일]]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임강현(臨江縣) 모아산(帽兒山)[*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 린장시(臨江市) [[https://baike.baidu.com/item/%E7%8C%AB%E8%80%B3%E5%B1%B1/15871639|마모얼산]](猫耳山).]에 가서 그곳에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2149|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백산무사단은 '백두산의 무사들'을 뜻하는 말로서 본부 아래 제1, 2, 3, 4, 5부를 두고 재무, 경호, 통신, 외무 등의 업무를 관장했다.] 제2부 서기로 활동하고 있던 김준삼(金俊三)[* 이준삼(李俊三)이라고도 한다. 평안남도 [[은산군]] 제남면 추평리(現 은산군 남옥리) [[http://db.history.go.kr/id/haf_118_0640|출신으로]], 1921년 당시 25세였다.]을 만나 백산무사단에 입단했다. 그렇게 [[1920년]] [[12월 20일]] 백산무사단 제2부 외무원에 임명되었고, [[1921년]] [[2월 27일]] 상부로부터 김준삼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임무를 맡아 [[3월 22일]] 군자금 모집원 사령서와 자동[[권총]] 1정, 실탄 25발, 경고문 50매, 군자금 영수증 용지 100매, 여비 30원을 지참하고 조선에 잠입했다. 그는 이튿날 [[평안북도]] [[자성군]] 장토면 호하동(現 [[자강도]] [[중강군]] 호하노동자구)에 있던 독립단 군자금 모집원 [[신훤(독립운동가)|신훤]](申楦)[* 이분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1684|해방 이후까지 살아남아]] 1962년 10월 31일 별세했고,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을 찾아가서 백산무사단에서 군자금을 모집한다는 취지를 설명했고, 신훤에게서 승낙을 받아냈다. [[4월 2일]], 강진석은 신훤과 함께 평안북도 자성군 여연면 건하동(現 자강도 중강군 건하리)에 있던 양기조(梁基祚)의 집을 습격해 군자금 100원을 지급받고, 다시 평양부로 이동했다. [[4월 14일]] 평양부에 도착한 신훤·[[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3470|이경임]](李敬妊)·신근(申槿)·유사로(兪似老)·이정선(李丁善)·황용호(黃龍浩) 등 일행 6명과 함께 평양부 염점리 84번지(現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김준모(金俊謨)의 [[여인숙]]에 투숙했다. 그러나 그해 4월 24일 이들의 정보를 입수한 평안남도경찰부와 평양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출동했고, 격투 끝에 전격 [[http://db.history.go.kr/id/hdsr_013_0590|체포되었다]]. 그후 [[1921년]] [[8월 9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죄|강도]], [[공갈죄|공갈]], [[주거침입죄|가택침입]],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 등이 적용되어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았고, 평양형무소와 경성형무소에서 7년 11개월 17일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 뒤 [[1928년]] [[3월 28일]]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가출옥]]한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강진석이 [[1942년]] 사망했다고 기술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