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타 (문단 편집) === 암살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veran_dynasty_-_tondo.png|width=400]] 카라칼라는 동생을 죽인 뒤, 왼쪽 하단에 그려진 동생의 얼굴을 지우게 했다. || 브리타니아에서 세베루스 황제가 사망하자 23세의 카라칼라와 22세의 게타는 공동황제가 되었다. 이 때 이들은 브리타니아의 칼레도니아인들과 강화조약을 맺고는 아버지의 유해를 수도에 매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로마 귀환을 서둘렀다. 이윽고 황제 일행은 로마에 도착했다. 그러나 형제 간의 공존은 힘들었고, 그 공존 역시 세베루스 부부의 헛된 꿈에 불과할 정도로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극도로 사이가 나빴는데, 브리타니아 원정을 치루면서 이 관계는 더 악화됐다. 카라칼라와 게타는 영국에 있는 동안 한 막사 안에서 단 한 번도 함께 있지 않았고, 식사 역시 따로 먹었으며, 병사들이 보는 상황에도 늘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를 증오했다. 그러다보니 상황이 언제든지 파국으로 갈 수 있기에 어머니 [[율리아 돔나]]는 두 아들의 공동 통치를 유지케하고 형제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총동원해 이 관계가 파국으로 끝나지 않게 노력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로마 귀환 이후, 공동황제가 된 카라칼라와 게타는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둘은 각기 군대를 갈라 나눴고, 내란의 기미가 곳곳에서 감지될 정도로 극도의 불안 상태가 유지되었다. 팔라티누스 황궁은 두 형제의 명에 따라 두 부분으로 분할됐고, 형제를 따르는 시종, 호위병들에게 둘은 상대방의 공간 자체를 가지 못하게 했다. 이는 원로원과 법정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카라칼라는 자신의 법정에서, 게타는 자신의 법정에서 각각 다른 의견의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당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는 급기야 카라칼라와 게타가 제국을 둘로 나누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간곡한 만류와 협박으로 실패했고 이는 [[골육상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무례하긴 했지만 폭력적인 사람이 아닌 게타와 달리, 카라칼라는 장인, 장모, 아내, 처남, 그리고 아이에 불과한 처조카까지 살해할 정도로 그 잔인함과 냉혹함이 아버지 세베루스 이상이었다. 카라칼라는 211년 동생과 제국을 분할하기로 했던 협약이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동생이 위험하다고 생각되자, 게타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12월 17일 열린 [[사투르날리아(로마)|사투르날리아]] 축제에서 카라칼라는 게타 암살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과거 플라우티아누스 일가가 도륙된 과정을 알고 있던 게타의 친구와 지지자들은 게타를 보호했고 이 암살시도는 무산됐다. 이런 가운데 211년 12월 로마의 황궁 안에서는 대형 참사가 벌어지게 된다.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어머니인 [[율리아 돔나]]가 머물던 곳으로 유인하였고 근위병들과 함께 경호원들과 황궁으로 들어오던 게타를 공격하면서 게타가 어머니에게 도망갈 때 어머니 앞에서 동생을 직접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22세의 게타는 어머니를 껴안으며 죽었는데, 카라칼라는 비무장 상태의 동생을 백부장에서 빼앗은 칼로(또는 숨겨둔 단검으로) 동생을 죽였다. 이때 게타는 형의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죽으면서 "어머니, 형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 절 살려주세요."라고 말했다. 게타를 경호하던 지지자들도 모두 근위병들에게 살해된다. 동생을 살해한 카라칼라는 마침내 유일무이한 황제가 됐지만, 당대의 디오, 헤로디아누스 등에 따르면 이후 그는 [[발기부전]]이라는 고통과 [[불면증]], [[환각]]과 [[환청]]이라는 저주로 죽을 때까지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후, 카라칼라는 동생의 초상화를 제거하도록 지시하고, 게타의 지지자들과 친구들, 그리고 저명한 법률가이자 친위대장인 파피니아누스를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자신을 변호해 달라는 카라칼라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게타 암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카라칼라의 행동을 비난하는 군인들[* 디오에 따르면 군인들은 세베루스 황제와 닮은 게타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세베루스 황제가 창설한 제2 파르티카 군단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로 인상시켜 주었고 이에 그들은 돈을 받고 카라칼라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재정상태를 감안하면 무리한 인상이었다. 그 결과, 국고는 고갈되었고, 이는 결국 카라칼라가 화폐 개혁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안토니니아누스'라는 화폐가 등장했다.] 이렇게 [[카라칼라]]에 의해서 살해됨으로 인해 [[게타]]의 이미지는 순교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