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연수 (문단 편집) === 단군교와 전병훈의 기록 === 단군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연수는 [[묘향산]]에서 도를 닦던 도인인데, [[1916년]]에 [[약초]]를 캐다가 한 석벽에서 천신 [[환인]]이 [[환웅]]을 통해 태백산 신시에 도읍할 때에 전하였던 고대의 경전이라 알려진 [[천부경]][* [[신라]] 시대 문인 [[최치원]]이 새긴 것이라고 한다.]을 발견하였다. 그가 직접 해석을 해 보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탁본을 뜬 후 단군을 신봉한다는 단군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이듬해 탁본을 보내어 해석을 문의하였다고 한다. > 저는 평소 스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동방을 여신 [[단군]]은 신인이다. 천부인 3개를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덕화를 펴신 지가 4천 년이 넘었는데, 천부인이란 어떤 물건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중략) >그리하여 제가 마음속에 새기고 구하기를 바랬으나 얻지 못하고, 정성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약초 캐는 걸 업으로 삼아 명산유람한 지 10여 년이 흐른 작년 가을 태백산(묘향산)에 들어갔다가 길도 없고 인적도 끊긴 어느 너부적한 석벽에 옛날에 조각한 글씨 같은 게 새겨져 있는지라 손으로 더듬어 이끼를 벗기고 보니 글자가 분명한데 이것이 과연 신령스런 천부경인지라 두 눈이 홀연히 밝아져 엎드려 절하고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고 읽어보니 한편은 단군천제의 보물경전이라 기쁘기 그지없고 한편은 고운([[최치원]]) 선생의 발자취인지라 기쁘기 그지 없었습니다. (중략) >겨우 한 본을 탁본했는데 점과 획이 모호하여 다시 탁본하려 하니 구름과 안개가 홀연히 일어나는지라 결국 근처 산사로 돌아와서 밤새도록 해석을 해보려 했으나 뜻을 알 수가 없으니 스스로 돌아보건데 배움이 짧고 늙어서 총기가 흐려진 탓인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단군]]을 받들어 모시는 교당이 있다는걸 알게 되어 올라가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다음 해 봄에 서울로 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이 탁본을 헌상하오니, 이 경전을 해석하여 가르친다면 중생이 반드시 복록을 받으실 것이고 교단이 크게 번창할 것이오니... >---- >계연수가 단군교에 보냈다는 서신 中 최초로 천부경이 실린 책은 전병훈이 쓴 정신철학통편(1920)인데 전병훈은 계연수와 천부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방의 현인 선진(仙眞) [[최치원]]이 말하길 [[단군]]의 천부경 81자는 신지(神志)[* 환웅,단군 시대의 사관(史官). 고대 문자를 주관한 것으로 추정됨.]혁덕(赫德)[* 태백일사와 규원사화에 따르면 신지는 환웅 시대 사람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사슴의 발자국을 바탕으로 녹도문(鹿圖文)을 만들었으며 구전으로 전해지던 천부경을 이것으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등의 문헌에도 신지가 단군 시대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 전문(篆文)[* 한자의 서체(書體)중 하나. 여기서는 녹도문을 말하는 듯하다.]인데 옛 비석에서 발견되었다. 그 글자를 해독해보고 지금의 묘향산으로 추정되는 백산(白山)에 기록해두었다.(여기까지 최치원이 말함) 내가 살펴보니 [[최치원]]이 당에 가 진사(進士)가 되었다가 우리나라로 와서 신선이 되고 난 후, 이 경문(經文)이 작년 정사년(丁巳年:1917년)에 처음으로 평북 영변(寧邊)에서 출현하였다. 약초를 캐는 도인 계연수라는 분이 백산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가 석벽에서 글자를 발견하고 조사했다고 한다. 나는 장차 <정신철학>을 편성하고 곧 인쇄를 하려던 시점에 유학자 윤효정으로부터 [[천부경]]을 얻게 되었는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 >전병훈, 《정신철학통편》(1920년) 천부경은 본래 단군시대부터 있던 경전인데 최치원이 발견, 한자로 해석하였고 그후 계연수라는 정체불명의 도인이 약초를 캐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는 내용이다. 한편 당시 북경에 살던 전병훈에게 천부경을 전한 인물은 윤효정이라고 하는데 단군교에서 대선사를 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한다. 전병훈은 조선인이었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상당히 명망을 얻고 있었고 단군교에서는 이 점을 이용하려고 윤효정을 북경까지 파견해 천부경을 퍼뜨린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서우 전병훈은 정신철학통변을 짓고 동양철학과 내단법으로 명성은 얻은 바, 단군교에서 그 당시 이 계통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인인 전병훈을 찾아 문의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예를 들어 새로운 연구나 발견에 전문가를 찾아 문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를 마치 천부경을 퍼트리려는 목적으로 이용했다라고 서술하는 것은 천부경이 뭔가 퍼트려서는 안되는 부정적인 것이거나 단군교가 오늘날 개신교처럼 교단의 확장을 위해 포교를 한 것처럼 서술하여 매우 편협한 견해를 드러낸 문장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단군교는 이듬해(1921년) 기관지인 단탁에 다시 천부경을 실어서 세간에 천부경을 널리 홍보하기 시작했다. [[파일:천부경.jpg]] 천부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