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제(전한) (문단 편집) == 기타 == * [[파일:kgvFShn.jpg|width=500]] [[중국]] [[한중]] 석문잔도풍경구(石門棧道風景區)에 있는 유방의 석상이다. 왼쪽은 [[소하]], 오른쪽은 [[한신]]. * 자기 자신을 [[3인칭화|3인칭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乃公居馬上而得之,安事《詩》、《書》!"''' >---- >《[[사기(역사책)|사기]]》<역생 육가 열전> >'''"豎儒,幾敗而公事!"''' >---- >《[[사기(역사책)|사기]]》<유후세가> 여기서 보이는 내공(乃公)과 이공(而公)은 비슷한 표현인데, 이는 본래 '자신' 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乃나 而는 "너" 아니면 "자네" 정도의 의미가 되는데, 뒤에 公이 붙이니 그렇다면 "자네 아버지" "네 어르신" 정도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유방은 여기서 이 표현을 자신에게 사용했다. 이건 자기를 일컫어 '''"네 아버지" "(너희 아버지에 해당하는) 이 어르신"''' 같은 묘한 어감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대 역시 '''"아들" "조무래기"''' 같은 상황이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고 어감을 살려 문장을 번역하면 이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어르신께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셨다. 그런데 시, 서 따위가 대관절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이 발언에서 유래하여, 유방을 마상옹(馬上翁)혹은 마상지내옹(馬上之乃翁)이라고도 한다. 말 위의 어르신, 의역하자면 말 좀 타본 형님 정도?[[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4046&sType=_detail&q=&secType=uf&&fq=cateType2_fct%3A%EC%9D%B8%EB%AA%85%2F%EC%99%95%EC%8B%A4%2F%EA%B5%AD%EC%99%95&fq=catePeriod1_fct%3A%EC%A4%91%EA%B5%AD&fq=catePeriod2_fct%3A%EC%A4%91%EA%B5%AD%2F%EC%A0%84%ED%95%9C|#]]] >'''"하찮은 유생 놈 때문에 이 어르신이 대사를 그르칠 뻔 했구나!"''' 물론 황제 등은 3인칭으로 자신을 호칭하기도 했지만, 이건 황제의 어투라기보다는 '''건달 세계에서 보스가 쫄따구에게 하는 느낌에 더 가깝다.''' 그런 '쫄따구 풋내기' 등을 일컫는 수자(豎子)[* 더벅머리 놈 정도로 번역되기도 한다.]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와 대조해서 보면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다. >'''"吾惟豎子固不足遣,而公自行耳。"''' >---- >《[[사기(역사책)|사기]]》<유후세가> 이 부분은 영포의 반란때 여후의 아들인 혜제가 나설 지경이 되자, 여후가 울면서 만류하여 유방이 대답하는 부분이다. 기서 유방은 자기 아들을 수자(豎子)로 표현하고, 자신을 이공(而公)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대략 이런 늬앙스가 될 수 있다. >'''"나도 그런 조무래기가 나서기에 적절치 않다는건 알고 있었다. 이 어르신께서 직접 가시겠다."''' 혹은, >'''"그 조무래기가 시원치 않으니, 당신 남편이 나서야겠구만."''' 이런 느낌으로, 여하간 평민 출신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어법이라고 해야 할 듯 싶다. 사실 멀리 갈 것 없이 유방의 이런 3인칭 화법은 오늘날로 치면 남자가 좀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척 할 때 쓰는 "이 형이 말이야.", "오빠가 한 턱 쏜다" 이런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좀 더 건달(?)스럽게 바꿔보면 "이 엉아가 말야~" 정도로 볼 수 있다. * 자신을 따맀던 정강이라는 신하를 고발한 사람의 코를 베어버리는 형벌을 내렸다. 정황을 살펴보면, 정강이 유방과 함께 고생을 할 때는 전쟁 중에 요행히 죽기를 바라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가 이제야 그를 고발한 것을 괘씸히 여긴 듯하다. >正疆首茉事而當,上使參乘,解玉劍以之。天下定,出以爲守。有告之者,上曰:「天下方急,汝何在?」曰:「亡。」上曰:「正疆沐浴霜露,與我從軍而汝亡,告之何也?下廷尉劓。 > > 정강(正疆)이 수차례 사건에 대해 하는 말이 타당하자, 주상(유방)은 수레에 참승하도록 하고 옥검을 풀어 그에게 채워주었다. 천하가 안정되자 (정강을) 내보내 군수로 삼았는데 그를 고발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주상이 물었다. > > "천하가 위급해졌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 > "도망쳤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주상이 말하였다. > > "정강은 서리와 이슬로 목욕을 하며 나와 더불어 종군하였는데, 너는 도망을 하고서 이제 고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 > 그리고 정위에게 하명하여, 코를 베어버리는 의형에 처하였다. > >---- >'''《태평어람》(太平御覽) 648, 《초한춘추》(楚漢春秋)''' * [[한국의 성씨]] [[유(성씨)|유(劉)씨]]의 먼 조상이기도 하다. [[유(성씨)]] 문서 참고. * 생년에 관하여 논란이 있는데, 만약 기원전 256년으로 칠 경우[* 여담으로 주나라의 마지막 왕인 [[난왕]]이 같은 해에 사망했다.],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게 기원전 221년이었으니 인생의 반 이상을 전국시대에서 보냈다는 얘기가 된다. 기원전 247년으로 칠 경우, 인생(52년)에서 반에 가까운(26년)을 전국시대에서 보낸 셈이 된다. * 아버지인 [[유태공]]보다 불과 2년 늦게 죽었다. 경포 반란 진입에서 입은 부상으로 꽤 이른 나이에 죽은거 같지만 대략 5~60대에 사망했다. 당대 기준으로는 사실상 천수를 누리다 죽은셈. 의학과 영양학이 발달한 현대의 평균 수명이 80세 정도인걸 감안하면 오히려 유태공이 어마어마하게 장수한편이다. * [[마오쩌둥]]은 유방에 대해 "봉건 황제 중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 말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 "그는 천하에 하나를 얻으면 정책을 결정해야 옳고, 둘째는 사람을 쓰는 것이 적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마오는 항우를 비정치가로 여겼고, 유방은 고명한 [[정치가]]로 여겼다고 한다.[[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82%A6|#]] * [[한국 한자음]] 한정으로 [[유방(신체)|이름이 여자 가슴이랑 동음이의어]]다 보니까 종종 이름으로 섹드립을 치기도 한다. * 자신의 [[아내]]들 가운데 [[척부인]]을 제일 아끼고 사랑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척부인이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최후를 맞게 한 원인제공자라고 볼 수 있다. 척부인의 소생 [[유여의]]가 정통성이 떨어지는 일개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개인적인 사심과 여후 견제로 추측되는 이유로 멀쩡히 살아있는 [[적장자]] 유영을 폐제하고 유여의를 태자로 삼으려고 해 군주로서도 계승법을 필두로 국가의 율법을 훼손했고, 가정에서도 정실과 첩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려 정실의 체면을 훼손하는 문제 행위를 해 척부인 모자는 여후의 원한을 사고 신하들도 반감을 가지면서 본인 사후 여후의 손에 도륙을 당할 때 황제로 즉위한 유영을 제외하면 아무도 두 모자를 구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척부인도 억울한 피해자는 아니다.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유방에게 유여의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밤새도록 울며 애걸복걸을 하는 등 그녀도 율법 및 사회적으로 질타받을 문제 행위를 당당히 했기 때문. 여후가 도넘은 잔인한 보복을 가했고 후일에도 제 평가를 깎아먹는 악행들을 저질러서 그렇지, 척부인은 1차적인 원인은 유방이 제공했고 본인도 악의없는 무지함이 커 잘못에 비해 지나친 처형을 당한 것은 동정받을 부분이 맞지만, 국정을 농간한 요부 및 상전인 황후의 권리를 침해한 방자한 첩으로 비판받을 사항이였다.] 만일 율법과 당대 사회의 상식을 지키면서 여후를 견제한다면 여씨 일족을 대거 숙청하거나 여후의 최측근들을 없애 여후를 정치에서 배제하거나 권력 기반을 없애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타당성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척부인 모자가 죽게 된 배경은 여후의 지나친 잔혹함도 문제였으나 유방의 그릇된 결정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한고제는 중국의 황제 가운데 후손 농사도 잘 된 황제다. 당장 아들인 한문제와 손자 한경제는 중국사에서 유명한 명군들인데다, 이들의 후손들 중 한무제 유철은 당태종 [[이세민]]과 더불어 중원제일의 정복군주였고, 광무제 유수와 소열제 유비는 나라가 망하자 다시 나라를 일으켜세워 사직을 이어나간 영웅들이었다. 한무제 유철은 자신의 선조를 일패도지시킨 흉노를 상대로 [[위청]]과 [[곽거병]]이라는 명장을 보내 대대적으로 토벌해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본격적인 서역진출의 문을 열었고, 광무제 유수는 전한이 멸망하자 왕망이 세운 신나라와 각종 군벌들을 격파하고 후한을 건국해 망한 한황실을 부흥시켰고, 소열제 유비는 후한이 조비에게 멸망당하자 익주 지방에 후한의 유민들을 모아 촉한을 건국해 사직을 다시 지켜냈으며, 그 덕분에 한황실은 전한이 망한 뒤에도 후한과 촉한이 연이어 건국된 덕분에 27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국 대륙에서 사직을 보전하였고, 전한-후한-촉한을 합치면 한황실은 중국 대륙에서 470년이나 사직을 이어나갔는데, 그 뒤에도 방계 후손인 송무제 유유가 동진을 멸하고 유송을 건국하였기에 유씨 황실이 중국 대륙을 통치한 기간을 보자면 무려 500년 이상이 된다. * 워낙 파격적인 행적이 많았고 질기게 살아남아 버틴 인물이라 호불호가 꽤 극단적으로 갈리는 탓에 이를 배경으로 하는 《[[초한지|소설 초한지]]》 등에서는 [[라이벌]]인 [[항우]]나 부하인 [[한신]] 등에 비해 인기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지만, [[최후의 승자]]로서 가지는 역사적 입지와 비중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인기일 뿐, 당대의 인기는 유방이 가장 좋았다. 한신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군 지휘에서는 탁월했지만 인간관계에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고, 항우는 무분별하게 학살을 자행한 인간백정에 성격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그에 비해 유방은 비교적 부하들도 잘 챙겨준 편이었고, 병사들로부터도 신망이 두터웠으며[* 싸우다 죽은 병사들을 하나하나 시체를 찾아서 고향에 보내주었을 정도니 따를 수밖에.] 무엇보다 사람을 모으고 분위기를 휘어잡는 재능이 있어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골고루 인망이 높았고 심지어 의제나 그 신하들도 유방을 항우의 대항마로 내세울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국시대 말기 ~ 진나라 시기의 대혼란을 잠재우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으며 현재 중국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이건 소설 《초한지》 등의 영향으로 고제가 마치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것처럼 나온 탓이 크다. 또, 마치 한신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질투심으로 한신을 핍박한 듯이 묘사하는 경우도 많은데 애시당초 한신이 세운 공은 전부 다 고제가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고 또, 대부분 고제의 다른 신하들과 연계해서 생긴 것이다. 예를 들어 조나라를 공격할 때는 조참, 관영 등이 함께 따라갔고 고제도 장이 등을 보내서 지원해줬고 항우의 본대가 조나라로 향하지 못하게 [[망치와 모루 전술|자신이 그 공격을 직접 몸으로 받아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한신은 공을 세울수록 자신의 미천한 시절을 잊어버리고 거만해졌고 또한 역이기나 종리말 등의 고사를 봐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배려를 전혀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한참 역이기가 제나라를 설득해서 성공하고 있던 도중에 처들어가서 역이기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고 결국 역이기는 끓는 기름솥에 제발로 걸어들어가야 했으며 자기가 종리말을 숨겨놓고 상황이 불리해지니 그 종리말의 목을 들고 갈 생각을 해서 결국 종리말 스스로가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거기다 고제가 한참 항우를 상대하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위의 제나라 건으로 자신을 제왕으로 삼아달라고 청했다. 거기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고제는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근자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권신이라서 지까짓게 감히 날 어쩌겠어? 라는 식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고 설마 고제가 날 해치기야 하겠어? 라는 쪽에 가깝다.] * 유방은 외모에 대해서도 융준용안(隆準龍眼)[* 여기서 유래하여 유방을 패상융준(沛上隆準) 또는 한준(漢準)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참고로 이 융준용안이라는 말은 훗날 [[조선]]의 건국자 [[태조(조선)|이성계]]와 [[태종(조선)|이방원]]을 묘사할 때에도 등장한다.], 용안미수염(容顔美鬚髥)과 같은 식으로 용과 연결이 자주되는 편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수염이 아주 그럴 듯해서 멋있었다고 한다. 또한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반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반점의 숫자야 비범한 인물에 대한 묘사에서 자주 나오는 특징 중에 하나고, 용의 얼굴을 닮았다지만 사람 얼굴을 보고 연상시키는 동물이야 모두 다른 법. 동네 깡패치고는 풍채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년에 동네 술집 에이스였기도 하거니와 장가가고도 여자들 상대로 썸을 잘 탔던 걸로 봐서는 실제로도 잘 생기고 언변도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 유방은 정장(亭長)의 벼슬을 하고 나서부터는 자기 밑의 부하를 설(薛, 산동선 등현)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 대나무 껍질로 만든 관)을 만들어 오게 하여 외출할 때는 무조건 이를 쓰고 다녔는데, 허세를 위한 용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훗날 [[황제]]가 되고 나서도 이 죽피관은 계속 착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체로 유방의 초상화에서는 넒은 이마, 콧날, 죽피관이 강조되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