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제(전한)/생애 (문단 편집) == 패현의 백수건달 == 고제 유방의 출신지는 [[페이현(장쑤성)|패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방은 자신이 태어난 곳은 [[위(전국시대)|위나라]]이고, 나중에 패현으로 이주한 것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도 위나라의 [[신릉군]]을 매우 흠모했다고 한다.] 패현 일대는 수시로 소속된 국가가 변하던 지역이었고 오랜 기간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의 영토였다가 유방이 활동할 시기는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 영토였다. 위나라나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의 영토였던 적도 있었다. 그의 집안은 전국시대 말기 위나라의 대부(大夫)인 [[유청(전국시대)|유청]](劉淸)의 아들 [[유인(전국시대)|유인]]의 후손들로 유인은 유방의 아버지 유태공의 아버지이다. 또 형제들 가운데 유학을 공부한 정통 유학자도 있었고 본인도 가벼운 시험이긴 하지만 엄연히 시험을 쳐서 하급 공무원인 정장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아주 가난한 집은 아니고 원래는 대부 집안이였다가 가세가 몰락해 평민이 되어 패현으로 이주한 집안 출신이라고 할 순 있겠다. 실제로 유방은 글도 쓸 줄 알고, 말년에는 황제가 되어서 학문을 익히며 독서도 즐겼다. 즉 그 시절에는 '지역 유지 출신+ 글 읽을줄 앎' 이것만 해도 평민들 가운데선 꽤 드문 상위 계층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젊은 시절의 유방은 변변찮은 일도 하지 않는 [[시정잡배]]였다. 그냥 [[백수]]도 아니고 굉장한 하류인생이었다. 집안 막내 아들이 제대로 공부도 안하고 툭하면 패싸움하고 술집 들락거리고 쥐뿔도 없는데 옆구리에 여자 끼고 히히덕대던 날건달 날백수였으니 부모님 대성통곡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사기》 <고조 본기>에는 대놓고 유방이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돈도 못 벌면서 틈만 나면 술판을 벌이고 여자를 끼려는 사람이었단 말이다. 게다가 연구자 중에는 유방과 [[번쾌]] 등 패현 출신 동향 그룹들을 일컬어 '의협 세계에 살았다'라고도 서술하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 좋아 의협이지 동네 '''건달''' 무리였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후한 말과 마찬가지로, 난세에 양아치라는 건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긴 하다. 법과 질서가 무너진 상태라서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하고, 필요하면 패거리를 꾸려 자경단 노릇을 해야할 일도 많은 시기다. [[유비|먼 훗날의 후손]]도 나라가 어지러워 고향을 지킬 공권력이 제대로 발동하지 않자 자경단을 꾸려 스스로 치안을 유지했다.] [[소하]](패현 주리연, 군청 서기관)[* 다만 소하는 워낙 법률에 밝아 상급 관청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던 인물이다. 나름 이때부터도 명재상의 싹이 보였던 셈.]와 [[조참]](패현 옥연, 형사/교정직) 정도가 학문이나 지위가 좀 있는 편이었던걸 뺀 나머지는 개백정([[번쾌]]), 상갓집 소리꾼([[주발]]), 현청 마굿간지기([[하후영]]) 등 나머지는 한미한 출신이고 [[노관]]은 아예 무직 백수로 기록돼 있으니, 다들 패싸움이라면 한가닥 했으나 행정적 실무 능력이라고는 눈씻고 찾을 수 없었다고 하겠다. 유방은 또 베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했다고 하는데, 본인이 가진 건 없더라도 한 턱 낼 때는 화끈하게 내는 남자들의 행동과 비슷한 듯. 유방이 황제가 되고 나서 아버지 태공의 장수를 비는 잔치에서 "저보고는 생업도 못 꾸리고 작은 형처럼 노력도 안 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보면 어떻습니까?"하고 농담하니 태공을 비롯해서 좌우 사람이 모두 웃었다. 이를 보면 당시 유방이 집에서 천덕꾸러기 같은 처지였음을 알 수 있다. 어른이 되어서 놀고먹는 것만 해도 부끄러운 짓인데, 얼마 안 되는 집안 가산까지 탕진해가며 동네 친구들을 모아 건달 놀이나 하고, 툭하면 싸움박질에, 칼 갖고 똥폼 잡다가 실수로 사고를 쳐 관아에 잡혀가는 등[* 당시 친했던 [[하후영]]과 칼싸움 놀이를 하던 중 실수로 하후영에게 상처를 내고 말았는데, 하후영은 쿨하게 넘겼지만 유방을 싫어하던 어떤 사람이 관에 유방을 상해죄로 고발했다. 하후영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증언해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나중에 위증을 했다는 게 밝혀져 두 사람 다 옥살이를 했다.] 사고만 치고 다녔다. 이런 한량 시절 때문에 체면 구기던 일이 하나 있었는데 젊을 적 유방이 동네 한량들하고 밥먹겠다고 집에 오면 큰형수가 국솥을 박박 긁어 손님들을 무안하게 하여 내쫒기 일쑤였다. 유방은 이걸 기억해뒀다가 천자가 되어 일족을 각지의 왕후로 봉하는 와중에도 큰형수네 일가는 아무 작위도 주지 않았다. 그러다 부친(태상황) 유태공이 하도 부탁을 하니 마지못해서 큰형수의 아들 유신(劉信)을 제후에 봉하긴 했는데, 작위 명이 갱갈후(羹頡侯), 즉 '국 갱'자에 '마찰하는 소리 갈' 자로 '''국물 긁는 제후'''였다. 안그래도 의리를 중시하고 베풀기 좋아하는 유방같은 성격인 입장에선 옛 시절 큰형수의 행동에 어지간히 심사가 뒤틀렸던 듯. 아무리 [[장량(전한)|장량]]의 조언대로 한거라지만 [[옹치]]조차 용서한 그 유방이 이정도로 뒤끝을 보여준 거면 어지간히 원한이 있었던듯 하다. 물론 당시 형수 입장에서 보면 시동생이 장래에 한 나라의 창업군주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백수 주제에 나가서 뭔가 일이라도 해서 집안 생계에 도움을 주긴 커녕 사고만 치고 다니고(수습은 거의 대부분 집안 사람들 몫이었을 거다), 그러면서 허구한 날 집에다 친구 불러다 술이나 퍼먹고 놀면서 그 친구들 술상 차리고 밥상 차리는 것까지 형수가 맡아서 하게 된 판에 집안의 맏며느리로 집안 생계를 책임지던 형수로서는 그런 시동생이 결코 곱게 보일 수가 없다. 다만 갱갈후가 형수에 대한 뒤끝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기의 기록에 대해, 조선 초기의 유학자 성현(1439~1504)이나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임성주(1711~1788)는 각자 '봉갱갈후변'과 '갱갈후론'이라는 글을 써서 옹치나 계포처럼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람도 기꺼이 용서하고 항우나 전횡처럼 자신의 최대 적수였던 사람에 대해서도 마지막에는 예의를 갖춰 장례했던 유방이 형수가 자기를 섭섭하게 대했다는 이유로 대놓고 그것도 죄 없는 아들한테까지 그런 치졸한 방식으로 복수하는 식으로 후세에까지 비웃음을 살 얄팍한 짓을 대놓고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고, 형수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엄연히 유방 자신에게는 친조카이고 또 아버지가 나서서 "쟤 자리 하나만 해 줘라. 그래도 네 조카잖니?"라고 달래는데 형수에 대한 앙심만 내세워 굳이 '갱갈후'라는 모욕적인 이름이 들어간 봉호를 딱히 죄가 없는 조카에게 붙여 준다는 것도 유방을 두고 "도량이 넓다"고 평한 사서의 기록이나 유방이 옹치나 계포 또는 항우나 전횡에게 했던 다른 행적과는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임성주는 유방이 유신을 '갱갈후'에 봉한 것은 형수에 대한 뒤끝이 아니라 '''마침 유신이 봉해진 지역의 지명이 갱갈이었기 때문에 갱갈후가 되었을 뿐'''이며, 유방이 형수에게 뒤끝이 있었다고 해도 평소 유방 성격상 아버지 태공에게 했던 것처럼 본인이 즉위하자마자 형수의 아들부터 가장 먼저 불러다 벼슬을 주면서 형수에게 "'''전에 형수님 나 집에 사람 데려온다고 국도 안 주고 싫어하셨죠? 지금도 싫으세요?'''"라고 과시하는 식으로 형수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썼을 것이고 저런 식으로 아무 죄없는 조카한테 형수의 죄를 묻는 식으로 굳이 후세에 비웃음을 살 얄팍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갱갈후라는 지명에 쓰인 글자를 가지고 후세 사람들이 짜맞춰 지어낸 썰을 사마천이 사실인 것처럼 주워서 기록했을 뿐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갱갈후의 경우 《사기》의 주석서인 색은(索隱)과 정의(正義)에서 '갱갈'이 지명이 아닌 작호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에 제후의 봉호(封號)는 일반적으로 봉토의 이름에서 따오고, 유신의 봉토는 구강군 서현(舒縣) 일대였으므로, 유신은 마땅히 '서후(舒侯)'로 불러야 했다. 유방은 유신을 책봉하면서 '''고의적으로''' '갱갈(羹頡)'이라 명명하여 유신에게 망신을 준 것이다. 후일 삼국시대에 서현이 위나라와 오나라의 국경지대가 되면서 폐지되었다가 서진 때 복구되었는데, 이때 그 치소를 옛 갱갈후의 탕목읍이었던 '갱갈후읍(羹頡侯邑)'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즉, 앞서 살펴본 유학자들의 견해와는 별개로 '갱갈후' 자체는 악의로 명명한 작위가 맞다. 아무튼 그 당시 유방은 가진 건 쥐뿔도 없었지만 [[패기]]는 실로 남달라서, 왕온(王媼)과 무부(武負)라는 사람들의 술집에서 매일매일 외상술을 얻어마시고 졸리면 아무데서나 널부러져 잠을 잤다. 유방이 술 퍼마시고 잠을 자면 그 몸 위에 용의 기운이 서리고 술집에서 매상이 몇 배가 더 나가서 술집에서는 외상 장부를 찢어 외상값을 없애버렸다고 하는데, 용의 기운이 서렸다는 기록은 유방이 술집에 가면 분위기를 주도하여 매상이 더 올랐다는 식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술집 주인 입장에선 아무리 외상이나 퍼먹고 툭하면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자는 인간이라 해도 그 인간 덕분에 평소보다 매출이 눈에 띄게 올랐다면 미워하진 않았다. 비록 생계를 스스로 해결하진 못했지만, 사실은 그저 놀고 먹기밖에 모르는 등골 브레이커는 아니고, 당시엔 거의 귀족들의 소양이었던 검술과 학문에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던 것을 보면 ''''싸나이 장부로 태어났으면 사대부들처럼 폼나게 책도 좀 읽고, 칼도 휘두르고, 벼슬 한자리 꿰차고, 부하들 거느리고 전쟁도 해보고, 미녀들 끼고 화끈하게 즐기며 살아야지, 시골구석에 틀어박혀 밭 갈고 나무 패는 게 웬말이냐!''''라는 마인드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당대의 유명한 호걸들과 교류하기도 했는데 개중에는 이미 거물급이었던 [[장이]]도 있었고 유방은 장이가 잠적하기 전에 그 밑에서 문객생활도 했다. 사실 [[신릉군]]의 문객이었던 장이가 동네 날건달 출신인 유방을 초빙하려고 패현까지는 갔을리는 없으니 유방이 호걸들과 교류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면서 떠돌아다닌 적도 있었다고 봐야 하는데 이 부분은 사서에도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유방이 어디까지 천하를 주유하고 다녔는지 알 순 없다. 그러다 어느 날은 진나라의 수도인 [[셴양시|함양(咸陽)]]에서 요역을 하고 있었는데, [[시황제]](秦始皇)의 위풍당당한 행차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 >'''"오호라! 대장부라면 실로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 [* [[항우]]는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해야지!" 라고 말했다.] 당시 유방이 사수의 [[정장(동음이의어) #s-4|정장]]이 되어 무리들을 여산으로 압송하게 되었는데 유방은 도중에 자신과 면식이 있었던 일부 무리들을 풀어주었다. 이에 무리들은 감사 표시로 술 두 병, 사슴 뱃살, 소 간 각 하나씩을 고조에게 선물하였다고 한다. 유방은 그래도 떠나지 않고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들을 함께 (앞서 받은) 술과 음식을 먹은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훗날 유방은 황제로 즉위하고 나서도 수라상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언제나 이 두 가지 구운 고기와 술 두 병씩을 함께 마련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서경잡기》에 나오는 내용.] 황제가 되어 온갖 산해진미를 접해도 추억의 그 맛만은 잊을 수 없었던 듯 하다. 이렇듯 하는 일도 없는 백수였던 유방은 사수정(泗水亭)의 장(長)[* 진나라 때 가장 작은 지방 행정 단위로 매 10리마다 정(亭)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 관리를 정장이라고 했다. 매 10정(亭)을 1향(鄕)이라고 하고 그 위에 현(縣), 그리고 군(郡)이 있었다.]이라는 벼슬자리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이 [[소하]](蕭何)가 자리를 추천하여 만들어주었다는 것인데, 유방이 소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시험을 쳐서 획득한 자리다.[* <고조 본기>에서의 원문은 試為吏,為泗水亭長. [[과거]](科擧) 제도가 없던 시대이니 시험이라고 해도 간략한 통과 의례 등이나 혹은 돈을 내서 자리를 얻는 일을 말할 수는 있지만, 여하간 유방 본인이 글과 검을 익혀 얻은 자리다. 소하는 자리를 얻게 도와준 것이 아니라, 유방이 백수였던 시절부터 몇가지 일을 도와주다가 유방이 말단의 자리를 얻자 업무를 도와준 정도다.] 정장이라는 이름의 벼슬을 얻었다고 해도 현대 한국과 비교해 말하면 동대장이나 파출소장 정도이지만, 유방의 패기가 워낙 대단해서 현청(군청) 관아의 모든 관리들을 아랫사람처럼 같잖게 여겼다고 한다. 이때 유방은 조(曹)씨라는 여자의 '''기둥서방'''을 하고 있었다. 조씨는 이 관계에서 훗날 제도혜왕(齊悼惠王)이 되는 [[유비(전한)|유비(劉肥)]]를 낳았다. 조씨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거의 없어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마 나중에 소개할 유방의 정처 여치보다 먼저 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싶다. 유비의 생년은 정확한 기록이 없는데 그의 아들 성양경왕 유장이 기원전 200년생이고 여치의 장남 혜제 유영은 기원전 210년생으로 단순히 유비가 혜제의 형일 뿐만 아니라 나이차이도 상당히 났을 것이며, 따라서 여치와 결혼하기도 전에 유비를 낳았으리라고 추론해도 많이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끝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어느 날 선보(單父)[* 지금의 산동성 선현(單縣)] 출신인 여공(呂公)이라는 인물이 패현으로 이주하는 일이 생겼다. 본래 거주하던 곳에서 원수를 피해 도망쳐 온 것인데, 이 사람이 패현의 현령과 안면이 있어 손님으로 지내다가 아예 모든 가족을 이끌고 이주하여 집들이를 하던 참에, 현령이 돌봐주는 거물이니 패현의 여러 [[호걸]]들이나 관리들도 이 여공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잔치에 와서 하례금(축의금)을 바쳤는데, 이 사람들의 숫자가 꽤 되어 현에서 서기로 일하던 [[소하]]가 나서 하례금을 걷는 일을 맡게 되었다. 소하는 사례금의 액수가 1,000전(錢) 미만인 사람들은 대청 아랫 자리에 앉게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재산이라곤 땡전 한 푼 없던 유방이 나타났다. 유방은 돈도 없었지만 당당하게 '''[[허세|하례금 일만 전]]'''[* 《[[문정후 초한지]]》에서는 유방이 축의금 일만 전을 어음(...)으로 지불한다고 말을 한 후 들어가려는데 이를 보고 어이가 없어진 소하가 크게 화를 내며 유방의 멱살을 잡고 여기가 무슨 동네 술집인 줄 아느냐고 일갈한다.]이라 쓰고 들어왔다. 이것을 본 여공이 깜짝 놀라 직접 나와서 유방을 맞이했는데, 본래 [[관상]]을 즐겨 보던 여공이 한번 유방을 보고서는 그에게서 꽤 그럴 듯한 면모를 감지했는지, 유방을 극진히 대접하며 귀빈석에 앉게 했다. 소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이렇게 빈정거렸다. > 유계라는 작자는 본래 큰소리만 잘 치지 일을 이루는 건 드뭅니다. 과거가 알려져서 개망신당하기 전에 적당히 눈치보다 조용히 꺼지라는 암시였지만, 유방은 '''그런 말은 다 무시해버리고 계속 귀빈석에 앉았다.''' 앉아있는 것도 일인데, 태도가 너무 당당하고 접대를 사양하는 기색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자리가 끝날 무렵이 되자, 여공은 슬쩍 유방을 자리에 남겨놓더니 자신의 딸인 훗날의 [[여후]](呂后)를 "데려가서 청소나 하는 첩으로 삼으라."면서 주었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혼인을 청할 때 여자의 집에서 남자의 집에 겸사로 하는 말이다.] 이에 여공의 부인이 "아니, 현령이 혼맥을 맺자 할 때도 내키지 않았거늘 저런 놈팽이에게 딸을 주다니요?" 하고 노발대발했지만, 여공은 "아녀자가 무슨 일을 알아!" 하면서 무시하고 기어코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고 말았다. 둘째 딸인 여수까지 유방 패밀리의 행동대장이자 동네 개백정인 번쾌에게 시집보낸 것으로 보아 여공 자신도 그러한 협객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이미 사내가 제 한 몸 지킬 줄 아느냐가 가장 중요해지는 난세가 다가오고있었던 만큼 여공의 통찰력은 실로 대단했다고 볼 수있다. 그렇게 여후와 결혼한 유방은 훗날의 [[혜제]](惠帝) 유영(劉盈)과 노원공주(魯元公主) 등의 자식을 얻었다. 유방과 조씨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당초에 둘이 제대로 살림을 차리고 산것도 아니라서 그리 문제는 없었거나 혹은 유방이 유력자인 여공과 관계를 맺기 위해 조씨와의 인연을 정리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는 후자의 경우로 나온다. 이렇게 서자가 된 유비는 훗날 제나라 왕으로 봉해졌다. 배다른 동생인 혜제 유영은 유비를 깍듯하게 대접했지만, 여후는 그 모습을 보고 열불이 나 유비를 독주로 암살하려고 했는데 혜제가 다짜고짜 그걸 대신 마시려고 한 덕에 여후가 술잔을 엎어서 구사일생했고, 유비는 제나라의 성양군(城陽郡)을 여후의 딸인 노원 공주의 [[탕목읍]](湯沐邑)으로 바쳐 여후의 심기를 풀어주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유비의 자식들에 의해 여씨가 몰살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여후가 아이들을 데리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중 어떤 노인이 물을 좀 달라고 부탁했고 여후가 물을 주자 노인은 여후의 관상을 보더니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 되실 겁니다." 고 대답했다. 여후가 두 아이의 관상도 봐달라고 부탁을 하자, 노인은 혜제를 보고는 "부인이 귀하게 되는 것은 이 사내아이 때문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노원공주의 관상도 칭찬을 한 노인이 자리를 떠나자, 마침 사랑채에서 나온 유방에게 여후가 이 말을 전하자 유방은 노인을 찾아가 자신의 관상도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이런 대답을 했다. >"조금 전의 부인과 아이들이 모두 당신의 상을 닮았습니다. 당신의 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귀합니다." 이에 유방은 감사하면서 "혹시 그 말대로 된다면, 은덕을 잊지 않겠다." 고 대답했다. 하지만 유방이 어느 정도 세력자가 되고 난 후에는 노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뒤에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사마천이 이 이야기의 허구성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여후가 내 남편은 일찍부터 될 사람이었다! 하고 소문내려고 퍼포먼스를 했다는 식의 의견도 있다. 실제 연대를 계산하자면 여후가 혜제를 낳은 시기가 기원전 210년경이다. 유방이 망탕산에 숨어 있다 거병한 시기가 209년이니 정말 관상을 보았다면 한 살도 안 된 갓난아이의 관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자신의 소설에서 그냥 길 가던 노인이 여씨의 친절에 감사하고 그녀와 아이들의 관상을 칭찬했을 개연성은 높다고 했는데, 사실 붙임성 좋은 행인이 시골 아줌마한테 물 한 잔 얻어 마시고 "복 받으실겁니다"라고 칭찬하고, "어이구, 아기도 잘 생겼네요. 부모님이 되려 아기 덕을 보겠는걸"이라고 요란을 떨고, 그런 아첨에 기분이 좋아진 시골 아줌마가 남편을 부르자 "나리가 제일 훤칠하고 좋은 관상이십니다."하고 너스레를 떠는 이야기의 흐름은 사실 잘 따져보면 '''현대의 농촌에서도''' 그렇게 어색하지만은 않다. 시바 료타로는 이 설화를 유방 편이 각색해 퍼뜨린 프로파간다의 일종으로 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