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제(전한)/생애 (문단 편집) === 3진 평정과 [[팽성대전]] === 마침내 기원전 206년 8월 파·촉에 들어간 지 겨우 4개월 만에 한왕 유방과 한나라 군대가 관중의 3진 가운데 장한의 옹나라를 공격했다.[* 3진이란, 옛 진나라 본토인 관중 지역을 장한, 사마흔, 동예에게 셋으로 나누어 분봉한 것을 말한다.] 당시 한군은 파·촉에 들어오면서,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버린 상황이었고, 때문에 항우와 3진의 왕들은 유방이 다시 공격할 때까지 적어도 몇년의 시간은 벌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방의 군대는 수창정후 [[조연(전한)|조연]]이 제보한 우회로를 통해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공격했다(이때의 우회 기동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암도진창]] 항목 참조). 이때 《초한지》의 표현이나 파·촉이라는 위치 때문에 마치 유방이 삼국시대의 [[유비]]처럼 파·촉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해서 최소 1년 이상 물자와 병력을 모으며 장기적으로 [[초한전쟁]]을 준비했다고 여길 수 있는데, 실제로는 아니다. --1년도 안 돼서 뛰쳐나올 거면서 소하를 죽이니 마니 하면서 쌩난리를 피운 거야?-- 물론 이후 초한전쟁 때 파·촉 지역이 구 진나라 본토인 관중 지역과 함께 유방의 기반이 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3진 평정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유방은 유비처럼 파·촉 중심지까지 들어가지도 않았고, 한중의 남정에만 머물렀다. 나라 이름도 한(漢)이고, 수도도 한중군 남정현인 등 어디까지나 중심 거점은 한중이었지 파·촉이 아니었다. 머물렀던 기간도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 항우가 유방을 비롯해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제후들을 분봉]]해서 유방이 파·촉으로 떠난 게 기원전 206년 2월 무렵이고, 이후 유방이 장한을 비롯한 3진을 공격한 것이 같은 해 8월이었다. 유방이 관중에서 남정까지 이동한 시간 등을 제외하면 유방이 전쟁을 준비한 시간은 길어야 4~5개월 남짓이었고, 여기에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이 유방이 남정에 도착한 뒤 시간이 지나서라는 걸 감안하면 그 기간은 더욱 짧아진다. 한신은 유방 세력에 들어온 지 한 달 남짓 만에 대장군에 임명된 것으로 한신이 얼마나 파격적인 인사였는지 알 수 있다. 즉 유방은 남정에 도착하자마자 깃발만 꽂고, 한신이 대장군이 되자마자 몇 달 준비하고 바로 3진을 공격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짧은 준비 기간은 사실 3진왕 쪽에 더 악조건이었다. 그나마 30,000명이나마 받고 가는 유방과는 달리, 3진은 항우의 [[신안대학살]]로 인해 휘하 병력 '''0명'''에서부터 새로 시작한 처지였다. 항우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옛 진의 관중 수비군을 넘겨받았겠지만 3진왕의 지휘를 받아본 적도 없고 실전경험도 없으니 그들에게는 사실상 새로 뽑은 군대나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이미 관중 평정 당시 항우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행적으로 인해 관중과 파·촉의 민심을 확보한 유방과는 달리 이들은 관중의 민심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항우에 의해 초토화된 관중에서 당장 어떤 생산력을 기대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 기원전 206년 그해의 관중에는 대기근이 돌아서 오히려 파·촉 땅이 관중을 먹여살릴 지경이었고, 징병할 장정도 모자라서 청소년과 노인들까지 병사로 만들어야 했다. 관중이 생산력을 회복해서 유방에게 제 기능을 해준 것은 유방이 3진을 점령해서 파·촉과 연계를 이룬 뒤의 일이었다[* 전한의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한, 옹, 새, 적 네 나라의 인구를 대략 추정하면 한은 약 200만(전한의 파군+촉군+한중군+광한군), 옹은 170만(전한의 우부풍+농서+천수+무도+안정+북지), 새는 160만(전한의 경조윤+좌빙익), 적은 30만(상) 정도였다. 전한 대에는 관중이 많이 안정화되고, 정부에서 부흥책도 많이 썼으니 진·한 교체기에 비해 관중이 더 많이 부유해졌겠지만, 의외로 이 인구수만 보면 왜 항우가 3진을 저렇게 쪼개놨는지도 좀 이해가 되고, 3진 중 적나라는 좀 많이 약하지만 옹나라와 새나라는 해볼 만한데? 싶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옹나라와 새나라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 인구를 국력으로 환산할 수 있을 만한 처지가 못 된다는 게 문제였다.]. 장한은 여러 차례 한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겨우 4개월 만에 군대를 복구할 수는 없었다. 유방의 한군은 장한을 연달아 격파했고, 장한은 폐구(廢丘)에서 포위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형국이 되었으며, 이후 한군은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에게 항복을 받아내, 곧 관중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제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장량은 '유방은 관중 땅만 가지고 싶을 뿐'이라는 거짓말로 항우를 속였고, 이에 속은 항우는 제나라를 먼저 처리하고자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에 관중 주변의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한왕(韓王) 정창(鄭昌) 등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이 간단하게 제압한 후 봄이 되자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진군한 유방은 가로막는 항타와 [[용저]] 등을 간단하게 물리치고 위왕(魏王) [[위표]], 은왕(殷王) 사마앙도 항복시키게 된다. 진여의 기습으로 떠도는 신세가 된 조왕 [[장이]]가 유방의 세를 보고 몸을 의탁했고, 또한 사마앙이 유방에게 항복한 일로 인해 도망쳐온 [[진평]](陳平)을 위무지의 천거로 수하로 삼았다. 주발과 관영 등은 들리는 풍문이 좋지 않은 데다 항우를 섬기다가 온 인물이 총애를 받고 자신을 감독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나, 유방은 오히려 진평을 더욱 아꼈다. 당시 항우는 제나라에서 [[전영]](田榮)과 교전을 치른 후 완전히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던 판이라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마음껏 세력을 키우고 제후들을 끌어들인 유방은 죽은 [[의제]](義帝)를 위해 3일장을 치른 후, 제후군을 집결시켜 '''56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모아 초나라의 본거지인 팽성으로 진격했다. 항우가 없는 팽성은 당연히 이런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유방은 손쉽게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나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항우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성양의 공격을 맡긴 채, 단 '''30,000명'''을 인솔하여 엄청난 속도로 남하,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고 그때부터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처럼 밟아 죽였다.''' 이때 양군의 전력차는 무려 '''19배 정도.''' 심지어 과장을 고려해 한군의 전력을 10분의 1로 줄여도 초나라군의 숫자 열세는 변함이 없다. 제후 연합군은 숫적으로 압도했지만 여러 제후들의 군대가 모여 통일된 체계가 아니었고, 그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 [[모랄빵]]을 먹자 제대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다. 결국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여 명의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수수(睢水)에서 무참하게 살육당하여 10만여 명이 물귀신이 되었다.[* [[패닉]] 상태에 빠진 병사들이 아예 수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해서 피해가 더욱 컸다. 수수는 한군의 시체 때문에 물이 흐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워낙 엄청난 패배라 유방 본인도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겪었지만, 한 번은 모래 폭풍 때문에 목숨을 구했고, 다른 한 번은 [[정공]](丁公)을 설득해서 죽음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유방은 도망치는 와중에 패현(沛縣)에서 가족들을 챙기려고 했는데, 항우도 유방의 가족을 잡기 위해 패현에 사람을 보냈고 가족들도 난리를 피해 도망친 와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달아나는데, 도중에 유방의 아들인 유영과 장녀인 노원공주가 길거리에 버려져있는 것을 보고 이들을 자기가 타고 있는 수레에 태웠다. 그런데 저 멀리서 초군의 추격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당황하고 지친 유방은 '''[[막장 부모|수레의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자기 아이들을 수레 밖으로 던져 버렸다.]]'''[* <하후영 열전>에선 내리라고 발로 차며 짜증을 부렸다고 하는데, 이 역시 막장이긴 오십보백보.] 그러자 수레를 몰고 있던 [[하후영]](夏侯嬰)은 수레를 멈추고 아이들을 다시 태운 뒤에야 수레를 몰았는데, 그것도 [[자장가|처음에는 아이들을 목에 매달고 일부러 천천히 달리다가, 아이들이 진정하고 난 후에야]] 다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헌데 이러고도 유방은 이 짓거리를 세 차례나 했고, 그럴 때마다 하후영 역시 아이들을 계속 수습하길 반복했다. 그러자 머리 끝까지 열이 뻗친 유방은 '''열 번이나 하후영을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재밌게도, 이 때 진짜로 하후영을 찌르려고 했던 유방은 결국 한 번도 찌르지 못했는데, 건달로 지낼 시절 하후영과 장난치다가 실수로 찔러버린 적은 있었다. 하후영은 원래 유방 휘하 패현의 건달 출신들 중 가장 마차를 모는데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만약 하후영을 죽였다가는 마차 속도가 늦어져서 항우군에게 잡힐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며 이렇게 되면 아이들을 버린 이유도 없게 된다.] 하후영도 기어이 화가 치밀었는지, 참다 못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 하찮은 짐승도 제 새끼 귀한 줄은 아는 법인데, 폐하께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아버지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아니면 하후영에게 겁을 먹은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유방은 아이들을 던지려 드는 것을 그만두었고, 이런 온갖 우여곡절 끝에 유방과 두 아이들은 간신히 초군의 추격을 피하여 무사히 풍읍(豊邑)으로 올 수 있었다. --즉 수레를 세 번이나 멈춘 것으로 모자라 주군이라는 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찌르려 하는데도 하후영은 끝내 잡히지 않고 탈출했다는 것이다. 베스트 드라이버-- 그 후 유방은 고마워서인지 미안해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하후영에게 기양(祁陽) 땅을 식읍으로 준다.[* 참고로 이때 구해진 유영과 어머니 여후는 이 일을 매우 고마워하여, 유방이 죽은 후 유영이 혜제로 집권했을 때에도 하후영을 9경중의 하나인 태복으로 삼았으며, 하후영에게 궁궐 북쪽에 제일 훌륭한 저택을 지어주는 특혜를 주면서 하후영에게 가깝게 지냅시다.라고 말하고, 그를 각별히 존중하여 여후가 죽을 때까지도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여후가 죽은 이후에는 [[주발]], [[진평]] 등과 함께 여씨 일당을 제거하는 데 일조하고, [[문제(전한)|태종 효문황제]]까지 섬겼으니 이 일은 하후영 자신에게 있어선 신의 한수였던 셈이다.] 그러나 유방과 두 자식과는 달리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과 아내 [[여치]]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심이기]](審食其)가 이들을 호위하면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초군을 먼저 만나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말았고 초군은 태공과 여후를 항우에게 바쳤다. 항우는 이들을 군중에 두며 데리고 다녔다. 이렇게 [[팽성 전투]]에서 엄청난 패배를 겪었지만, 유방은 소하의 보급 등을 바탕으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초군을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격파한([[경색 전투]]) 유방은 형양(滎陽)을 중심으로 항우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