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제(전한)/생애 (문단 편집) === 진나라 정복의 주인공 === ||[[파일:7PGh5Qv.jpg]]|| || '''유방과 항우의 진격로''' || 장한은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부장 [[왕리]](王離)[* 진의 명장 [[왕전]]의 손자이자, [[왕분]]의 아들이다.]를 파견해 [[장이]](張耳), [[진여]](陳餘) 등이 몸을 피한 거록(巨鹿)을 공격 중이었다. 조나라마저 무너지면 진나라의 세력이 다시 천하를 뒤덮을 것이 자명했기에, 이를 구원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초 회왕은 >'''관중에 먼저 입성하는 자가 그 지역의 왕이 되리라''' 라는 선언을 한 상태였다.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켜야만 항량의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유방과 함께 서쪽으로 가길 원했지만, 회왕의 주변에 있는 노장들이 잔혹한 항우를 서쪽으로 보내는 일을 꺼려 이 일은 관대한 유방이 맡게 되었고, 항우는 송의(宋義)와 함께 북쪽으로 진군해 거록의 진군을 격파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유방은 독자적으로 군단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유방은 강리(杠里)[* 지금의 [[산둥성]] [[허쩌시]] 동북에 있던 성양(城陽)의 서쪽.]의 진군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나아가다, 창읍(昌邑)[* 지금의 산동성 금향현(金鄕縣) 서북]에 이르렀다. 바로 이때 [[팽월]](彭越)을 만나 양 군대는 힘을 합쳐 창읍을 공략했으나, 창읍의 수비가 완강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잠시 율현(栗縣)으로 후퇴하였다가 강무후(剛武侯)[* 초 회왕의 부하 장수 혹은 위왕 위구(魏咎)의 장령(將領)이라는 설 및 한고조의 공신 강후(剛侯) 진무(陳武)라는 설도 있다.]의 군사 4,000여 명을 빼앗아 위나라 장군 황흔(皇欣), 신도(申徒), 무포(武蒲) 등과 함께 창읍을 재차 공격했지만 여전히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 무렵 항우가 [[거록대전]]에서 놀랄 만한 대승리를 거둔 참이라, 유방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창읍을 내버려 두고 서쪽으로 진군하며 고양(高陽)을 지나갔다. 바로 이때 [[역이기]](酈食其)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유방은 양다리를 떡 벌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무례한 행위였는데, 그 모습을 본 역이기는 절을 하지 않고 길게 읍만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족하께서는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역이기에게 욕을 퍼부었다.[* 욕을 하는 부분은 <고조 본기>에는 없고, <역생 육가 열전>에서 언급된다.] >"이 비루한 유자 놈아! 지금 천하가 진나라의 폭정으로 고통을 받은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한다고 하느냐?" 그러나 역이기는 기가 꺾이지 않고 말하길, >'''"무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무도한 진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장자(長子)를 거만한 태도로 맞이하심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따지자[* 즉 "천하통일을 꿈꾸는 사람이 그 따위 막돼먹은 태도로 사람을 대할거면 때려쳐라"를 굉장히 완곡하게, 그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수준으로 일갈한 것이다.] 유방은 그 즉시 발씻기를 멈추고 벌떡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역이기를 윗자리에 모셔 조언을 구했다.[* 후일 [[영포]]가 귀순해 왔을 때도 시녀들에게 발을 씻기며 맞이해서, 영포가 자살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 유방은 역이기의 조언에 따라 진류(陳留)를 습격해 진나라가 비축한 양식을 얻어 군량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그 후 [[역상]](酈商)[* 역이기의 동생이다.]을 장수로 삼고 개봉(開封)을 쳤지만 여기도 쉽게 함락이 되지 않자 그대로 서쪽으로 나아가 백마진(白馬津)[*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동쪽]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을 쳐부수고 이를 추격하여 곡우(曲遇)에서 대파했다. 이후 유방은 남쪽으로 나아가 영양(穎陽)을 함락시켰고, [[장량(전한)|장량]]과 다시 재회하여 그 도움을 바탕으로 환원(轘轅)[* 지금의 하남성 언사현(偃師縣) 동남쪽]을 점령했다. 그런데 조나라의 별장 [[사마앙]](司馬卬)이 관중으로 진입해 왕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하수를 남하하여 [[함곡관]](函谷關)으로 진입하려고 하자, 유방은 평음(平陰)[*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孟津縣) 동북으로 중국 고대 때 황하를 건너는 중요한 나루터가 있었다.]을 공략하여 나룻터를 끊어버렸다.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낙양 동쪽에서 전투를 치루었으나 유리하지 못해 양성(陽城)으로 후퇴하여 병력을 추스린 후, 남양현(南陽縣) 동쪽에서 남양 태수 여의(呂齮)를 무찔러 남양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여의는 완성(宛城)으로 도망쳤고, 유방은 여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서쪽으로 진군할 요량이었지만 장량이 "후방에 적을 남기는건 좋지 않다." 고 충고하여 한밤을 틈타 이동하여 완성을 세 방향에서 포위했다. [[항우|항복해봤자 학살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절망한 여의는 자살하고자 했으나 [[진회]](陳恢)가 우선 여의를 말린 뒤 성 밖으로 나와 유방에게 >"완현의 성은 수십 개가 넘는데 그곳의 관리와 백성들은 항복해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내버려 둔다면 우환이 될 것이며, 싸워서 이기려면 피해가 크고 시간을 낭비하다가 공께서도 관중왕의 약속을 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항복을 받아준다면 다른 성들 또한 앞다투어 당신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고, 유방이 이에 응하며 서쪽으로 향하니 과연 성주들이 앞다투어 항복했다. 개중에는 [[왕릉(전한)|왕릉]](王陵)도 있었다.[* 이때 왕릉의 일화가 하나 있는데 [[장창(전한)|장창]](張蒼)이라는 사람이 어쩌다가 처형당하게 생긴 걸 지나가다가 보더니 장창의 너무나도 뽀얗고 예쁜 피부에 감탄해서 유방에게 저 사람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청탁했다고 한다. 그렇게 목숨을 건진 장창은 여후 때쯤에는 좌천당한 왕릉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만 왕릉을 아버지처럼 대했다고 한다.] 유방의 세력은 이 무렵에는 무시못할 정도로 강력해져서 그는 파양호 근처에서 할거하는 파군(番君) [[오예]](吳芮)의 별장 매현(梅鋗)과 함께 석현(析縣)과 역현(酈縣)을 함락시켰다. 이때는 장한이 은허에서 항우에게 항복을 했고, 유방은 더욱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이때 유방은 뜻밖의 인물과 접선을 취한다. 바로 그 악명이 자자한 간신 조고가 유방과 접촉한 것이다.[* 유방이 관중으로 밀고 들어오는 가운데 반진제후들을 막을만 한 유일한 인물인 장한은 조고가 안일하게 견제했다가 20만 군대와 함께 항우한테 항복했으며 조고가 눈과 귀를 가려온 호해 역시 현재 진나라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자신을 추궁해오자 이판사판으로 호해를 죽인 후 유방에게 진나라를 내어주고 조고 자신은 출신지인 조나라 왕이 되려는 계획이었다.] <진시황 본기>에서는 유방이 조고에게 사사로이 항복을 권유했는데, 이게 호해에게 적발되어 겁을 집어먹은 조고가 호해를 망이궁에서 포위해 시해했지만 유방이 시치미를 떼면서 조고와의 관계를 끊었고, <고조 본기>에선 조고가 이미 호해를 죽이고 유방에게 항복을 청했는데 유방이 이것을 속임수라고 여기고 그대로 진군했다고 한다. 아마도 조합해보면 유방, 혹은 장량이 그간 생긴 항복에 관대한 이미지를 이용해 조고를 꼬드겼고, 이에 낚인 조고가 호해를 죽여서 스스로 뒷배를 없애자 악명만 가져올 조고와의 관계를 끊으며 모르쇠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조고를 무시하고 진군한 유방은 무관(武關)을 돌파한 후 남전(藍田)에서 진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이어서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207년 10월. 마침내 유방의 병사들은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천하의 그 어떤 제후들보다 가장 먼저 함양 근방에 도달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