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곤양대전 (문단 편집) == 신나라군의 곤양 파견 == 기원후 23년 경시제 [[유현]]을 중심으로, 유인, 훗날의 [[광무제]] 유수는 한나라의 재건을 선포했다.[* 이때의 왕조는 훗날 광무제의 [[후한]]과 구분짓기 위해 현한이라고 표기했다. 하지만 경시제란 칭호는 실제 정사로는 남지 않은 칭호이고, 유현은 훗날 황제가 된 광무제에게 무순 회양왕이라는 후한의 칭호로 남았다...] [[왕망]]은 3월에 태상편장군 유수, 성국상공 왕봉 등이 곤양, 정릉, 언릉 등을 함락하자 한나라 재건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사공 왕읍, 사도 왕심 등을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으로 삼아 토벌군을 보낸다. 이때 신나라의 군대는 기록에 따라 분분한데 42만이라는 설[* 후한서 광무제기에 따르면 100만 군사와 함께 갑사 42만 명을 파견했다고 나온다.], 100만이란 설, 60만이란 설이 있다. 100만 대군설은 전투병만 42만 명이고, 나머지는 보급군과 참모 63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종합군이라는 것이고, 60만설에서는 순수 전투병 40여만 명에 서역의 맹수 군단을 앞세우고 초장부터 기선 제압을 위한 휘황찬란한 종합 병력이었다고 한다. 왕망이 천하에 영을 내려 병법 63가에 밝은 사람을 찾아 수백 명을 불러들여 군대의 관리로 임명하면서 무위를 뽑아 훈련시켰다. 용맹한 군사를 모집해 정기, 치중이 천 리를 끊이지 않았으며, 키가 아주 컸던 거무패[* 봉래(蓬萊) 동남쪽 오성(五城) 서북쪽 바닷가에 살던 사람으로 한박의 추천으로 등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거무패는 "수레에 올라탈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말 세 마리가 끌어도 이기지 못하며, 누울 때는 북을 베개로 쓰고 쇠 젓가락을 먹는다"고 전해진다.]라는 장사가 호랑이, 표범, 물소, 코끼리 등 여러 맹수들을 몰았다. 5월에 왕읍, 왕심 등은 영천에서 납언장군 엄우(嚴尤), 질종장군 진무(陳茂) 등이 이끄는 군대와 합쳤고[* 이들은 육양현(淯陽縣) 소장안취(小長安聚)에서 유연에게 한 차례 격파당한 패잔병들이었다.] 현한에서 곤양성을 지키는 병력은 8, 9천 명 정도인데, 그 중 태반은 창칼이라곤 잡아본 적 없는 농민군이었다. 즉 공성군이 수비 병력의 최소 40배 이상인데 수비측의 병력의 질이 좋은 것도 아닌 상황이었던 것이다. 중앙의 주력군, 최소 43만을 상대로 농성 8, 9천은 승부가 안 되는 싸움인지라 모두가 겁에 질려있었으며, 모두가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고 신나라의 군사들은 곤양성 북쪽에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