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국주의 (문단 편집) === [[독일]] ===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49287823466954bce939edad15793c3.jpg]] || [[파일:external/operationwardiary.files.wordpress.com/large1.jpg|width=400]] || || 상징적인 '''[[거위걸음]]''' || 아동 시절부터 시작하는 군대교육 || > '''"다른 나라들이 군대를 가진 국가라면, [[프로이센]]은 [[러시아식 유머|국가를 가진 군대다]]."''' > - [[볼테르]] > '''"[[프로이센]]은 대포알에서 태어난 국가다."''' >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사내는 전투를 위해, 또 여인은 전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양육되어야 한다. 그밖의 모든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 - [[프리드리히 니체]] [[독일]]은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구 [[튜튼기사단]]이 독일 군국주의의 원류라 보는 시각도 있다. 히틀러 이전부터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가장 낭만적으로 미화했던 시대 중의 하나가 바로 [[독일 기사단국]] 시대이다.] [[나치 독일]] 시절까지 죽 군국주의를 고수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뒤에야 겨우 군국주의에서 벗어났다. 군국주의하면 생각나는 '''[[거위걸음]]'''과 분열 행진 등의 시초가 바로 이 독일이며, 독일은 [[군인]],[[경찰]], [[소방관]], 하급 [[공무원]]까지도 [[군복]]을 입었었다. 그리고 바짝 [[군기]]가 든 모습을 강조하여 [[서양]] 국가들 중에서 특이하게도 [[동양]] 국가들 처럼 명령에 복종하고,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종속적인 국민성이 나올 정도였다.[* 2차대전 이후로도 "독일인들은 완고하고 원리원칙에 충실하다"는 편견이 한동안 이어졌다. [[먼나라 이웃나라]]상의 묘사도 마찬가지.] [[독일 제국]]과 나치 독일의 남녀 아이들은 군사적 훈련 및 [[교련]]을 익혔으며, 전쟁의 정당성도 배웠다. 그리고 독일의 아이들은 매일 전쟁 놀이를 하였으며 이렇게 철저히 미래의 병사이자 전쟁터로 갈 운명에 휘몰렸다. 더군다나 [[독일]]은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정치]]와 [[군대]]의 분리 및 상호 불가침(요약하자면 군대는 정치에 대해 개입하지 않고 정치 역시 군대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명목 아래에서 '정치에 귀속되지 않는 군대'를 만들고자 했었는데, 이러한 독일의 국가적 전통 역시 결과적으로는 독일의 군국주의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군대를 신성화하여 군대가 [[사회]] 전반을 이끌게 되는 [[일본]]식 [[군부]] 통치와는 다른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상기한 일본식 군부 통치와 마찬가지로 군대에 대한 [[문민통제]]가 작동할 수 없고 군부의 [[폭주]]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의 문제는 나치독일에서 [[문민통제]]는 철저히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는 모든 작전에 개입했다. 그 유명한 히틀러 짤방은 독일군 장성들이 히틀러에게 작전을 보고하고 이를 승인받기 위한 것이다. 즉 독일 국방군을 철저하게 통제한 것이 히틀러이고, 이러한 히틀러는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이다. 히틀러는 군지휘관의 자리에 오른 적도 없었다. 독일 국방군은 인종학살이라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오히려 나치독일에서는 철저한 문민통제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랬기에 [[독일국방군]] 무오론이 나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악명높았던 친위대는 '''나치당 무력집단'''이다.--독일판 붉은 군대--[* 붉은군대도 공산당의 무력집단이다.] [[독일]]의 군국주의는 [[20세기]] 초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편 [[독일 제국]]의 [[세계 정책]] 탓에 더욱 심했다.많은 [[식민지]]와 [[땅]]을 갖고 싶었던 [[빌헬름 2세]]는 2차례에 걸쳐 '''[[모로코 사건]]'''을 일으키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땀 흘려 만든 [[외교]]정책을 모조리 박살내 [[영국]]과 [[러시아 제국]]을 적으로 돌려 그전까지는 서로 주적으로 생각하던 두 나라가 위협을 느끼고 [[영러협상]]으로 [[그레이트 게임]]을 종결시키게 만들었다. 특히 영국과 [[건함 경쟁]]을 해서 아예 대놓고 영국의 [[로열 네이비]]를 꺾는다며 [[독일 제국 해군|해군]]은 [[대양함대|무진장 많이 늘렸다]]. 그러면서 [[군대]]도 더욱 많이 키우고, 2번의 [[발칸 전쟁]]에도 개입해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을 들어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미 곧 [[유럽]]에 큰 [[전쟁]]이 터질 것이라 예측한 [[독일]]의 전쟁 준비는 철저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무기도 모두 최신식이었으며, 병사들 하나하나가 그 어떤 나라의 병사들보다 정예군이었다. 군국주의 정책으로 독일 남성들은 이미 전쟁 기계로 변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게 생각대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독일 제국은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 제국군]]을 밀어내며 전진했지만 [[서부전선]]에서는 하루에 수만 명이 죽어나가는데도 [[프랑스]]를 정복하지 못했다. 결국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독일 제국의 전쟁 역량은 바닥이 나버린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색이 짙을 무렵에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후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다.]와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빌헬름 2세]]를 2선으로 밀어내고 자신들이 '''군사 정권'''을 수립하여 독재하면서 더욱 심각한 군국주의에 빠진다.[*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사임한 후 수립된 3기 총참모부(Generalstab)는 루덴도르프를 사실상의 수장으로 하여 카이저까지 꼭두각시로 두는 독재 정치를 했다. 이를 도이칠란트 프로토파시즘이라고도 한다.] 민간 [[정부]]는 군부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였고, 카이저와 군부를 조금이라도 비판했다간 반역자로 낙인찍히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미국]]까지 [[연합군]]으로 참전하였고, 독일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독일 제국은 16~17세의 청소년까지 징집하여 군사교육을 시키고 연합군에 맞서려 했지만 실패하였으며, 그 결과는 [[11월 혁명]]과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이후에도 [[독일]]의 군국주의는 [[전간기]]에 수립되었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권을 무너뜨리고 탄생한 [[나치 독일]] 정권 아래에서 계속 이어졌고[* 당시 도이칠란트는 민주주의를 대전쟁의 승전국들에 의해 강제로 수용하게 된 베르사유의 굴레로 여겼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축 역시 왕당파, 즉 융커였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 융커 중 한 명인 [[프란츠 폰 파펜]]은 [[하인리히 브뤼닝]]의 성급한 개혁의 실패와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무능을 틈타 힌덴부르크의 신임을 얻어 히틀러를 통제해보겠다고 그에게 요직을 준다.], 그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의 [[독일 국방군|독일군]]은 [[일본군]]과 함께 군국주의의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군대]]에 대한 [[문민통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절실하게 보여줬다. 이후 [[독일]]은 겨우 군국주의에서 벗어 났으며, [[민주주의]]와 [[문민통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원래 해체되었던 군이지만 [[냉전]]에 대비하기 위해 [[독일연방군]]이 창설되었다. 이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장군이 아돌프 호이징어 장군이다. 또한 만슈타인 원수가 고문으로서 연방군에 기여하는 등 과거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또한 그와 동시에,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오랜 세월 동안 전통적으로 추구해 왔었던 '[[정치]]에 귀속되지 않는 [[군대]]'라는 목표를 아예 포기하기에 이르고 있다. '정치에 귀속되지 않는 군대'라는 목표를 포기하고, 문민통제의 원리에 따라서 군대는 결국 정치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결론을 내린 것.[* 왕과 귀족의 사소한 정치놀음에 군대가 동원되어 참혹한 전쟁을 사사로이 일으키는 일을 막는다는 취지였으나, 그 결과 역으로 정치가 군대에 가해야 할 군령과 군정마저 포기하게 된 것이다. 사냥개를 만지다가 물릴까봐 목줄을 놔버린 셈.]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에 [[독일]]에서는 [[반군국주의]]를 지향하는 탈나치화가 추진되었으나 사회, 문화적인 부분에서는 군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으며,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도 [[나치 독일]] 시대까지 이어진 군국주의 문화가 [[독일인]]들에게 한동안 찌꺼기처럼 있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사실 튜튼 기사단부터 수백 년간 이어진 '문화'를 십수 년 만에 바꾸는 건 매우 어렵긴 하다-- [[냉전]] 시기 [[서독]] 한정으로 [[68혁명]] 이후에 군국주의 시절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 가능했다. 현대 [[독일]]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일인 [[1945년]] [[5월 8일]]은 '0시'(Stunde Null)라고 말해지는데, 군국주의와 결별하고 '새로운 독일'이 만들어지는 시점이란 뜻이 담겨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