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량미 (문단 편집) === 반찬 === 시대나 배경에 따라 달랐겠지만, 잡곡밥과 함께 먹는 찬거리는 별로 없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이것은 다른 문화권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군대도 군량의 메뉴가 아주 조촐했고, 특히 따뜻하고 수분이 많은 음식은 없다시피 했다. 물론, [[쌀밥]]만 먹기에는 맛이 없고, 하루종일 전장에서 고생하며 땀을 비오듯 흘렸을 장병들에게는 짭짤하고 맛깔난 반찬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다만 부식에 대해서 역사 자료에서는 언급한 바가 적다. 이는 굳이 기록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종이가 아닌 비단이나 [[죽간]] 혹은 쪼갠 나무에 기록을 했던 고대에는 이러한 물건들이 지녔던 부피 때문에 책의 권수가 수레로 옮겨야 할 만큼 많았다. 때문에, 고대의 문집들은 핵심내용만 간략히 추려적었으며, 그러한 습관이 종이가 발명된 후에도 이어졌고 인류가 이러한 습관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손자병법]]만 해도 내용이 상당히 짧고 간략하다. 때문에 [[반찬]]이나 기타 부식 이야기 따위는 굳이 적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에 [[제갈량]]이 지휘한 촉한군은 [[무(채소)|무]]와 [[순무]][* 지금도 중국 사천지방에서는 무를 가리켜 제갈채라고 부르고 있는데, 제갈공명이 전장에 나아갔을 때 본영에서 무를 많이 심어서 그런 것 같다. 실제로 공명은 병사들에게 무씨를 가지고 다니라고 명할 정도로 무를 중요한 부식이자 대체 군량으로 여겼다고 한다. 더욱이 무는 볶거나, 끓이거나, 말리거나, 소금에 절이거나 그것마저도 안되는 환경이면 생으로라도 먹을 수 있는 등 요리법이 다양한 것도 장점. 순무는 그 이미지와는 다르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름난 전쟁식량이다. 1, 2차대전기 독일군도 순무를 애용했다.]를 반찬으로 먹었다고 기록한 서신이 남아있고[* 단무지처럼 [[염장]]한 순무로 추측된다. 촉한은 정염을 국가적인 산업으로 삼고 있었을 뿐더러, [[김치]]처럼 순무도 소금으로 절이면 보존성이 월등히 높아진다.] [[원술]]의 군대가 강에서 채집한 물풀과 [[다슬기]]를 끓여 먹었다는 기록과[* 국가의 정규군이자 [[조위]]가 정촉호군이라는 기병대를 따로 운용해 상대할 정도로 정예병이었던 [[촉한]]의 군대나, [[원소(삼국지)|원소]]에 이은 거대 [[군벌]]이었던 원술군의 전투 중의 식생활이 이런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다른 군벌은 좋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았지 더 나았던 식생활을 영위했을 리는 없다. 실제로 삼국시대보다 1300년이나 뒤인 [[센고쿠 시대|일본 전국시대]]의 병량이 쪄서 말린 [[현미]]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순무나 다슬기를 반찬으로 삼는 것은 어느 정도 경제력이 받쳐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센고쿠 시대|전란시대]]에 [[타쿠앙 소호]]가 [[단무지]]를 만들어서 군에 보급했다던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밥에 넣어먹는 건조 해물 가루인 [[후리카케]]를 정식으로 전투식량으로 보급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국가와 문화권의 경계를 떠나 장병들이 먹은 주된 반찬이자 부식은 [[소금]]이다. 밥에다 넣어 간을 맞추거나, 약간의 채소나 기름, 장 등을 넣고 소금으로 맛을 낸 염장국으로 끓여 먹었을 것이다.[* 실제로 염장국은 식량이 부족한 과거에는 흔하게 먹는 음식이었다.] 소금 이외에 일반적으로 기록에 필히 남는 동아시아권의 주요부식은 [[콩]]이었으며 콩을 이용해 만드는 [[간장]]이나 [[된장]] 같은 [[장류]]조미료도 중요하게 취급하는 부식으로, 전쟁대비 혹은 전쟁중에 장을 직접 담그거나 베나 덩굴 등에 절여 소지했다가 식사 때 물에 풀어 사용하기도 했다. 특별식으로 [[가축]]이나 [[멧돼지]] 등을 잡아 [[술]]과 함께 장병들에게 공급했지만 이런 특혜는 중요한 전투에 앞서 장병들의 체력을 증진시키고 [[사기(군사)|사기]]를 고무시키려는 목적을 지녔거나, 혹은 진중에 적장이 투항하거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는 등의 호재가 있었을 경우에 해당되었다. 물론, 잦은 극한 체력 소모와 부상에 시달려야하는 군대 입장에서 장병들의 전투력 유지를 위해 가능하면 육류를 많이 확보하는 것을 신경 썼다.[* 고대부터 고기는 기력 저하와 상처의 회복을 돕는 보약으로 여겼다. 지금도 환자들이 어느 정도 호전에 들어가면 고기 등의 육류를 섭취하게 하여 회복을 빠르게 하도록 돕는다.]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독립군들은 옥수수 가루를 대충 반죽하여 솥에다 구워낸 옥수수떡을 주로 먹었고[* 만주지역은 지금도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지으며, 옥수수에 부족한 양질의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명태와 콩을 중요한 부식으로 사용했다.], [[6.25 전쟁]] 당시에도 전장에서 소금으로 간을 한 [[주먹밥]]을 배급받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정규군이 아닌 의병이 전투시에 고두밥, 말린 어패류[* 주로 명태나 바지락 말린 것 따위.], 시래기 등을 가지고 다녔다는 일본측 기록도 있는 것을 미루어 전시 중에 현지에서 그때 그때 필요한 식자재를 보급했던 것 같다. 식자재를 관리하고 조리할 수 있는 진중에서는 그나마 제대로 밥과 반찬을 해먹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군대에서 육류 보급을 위해 가축을 도축하거나 사냥 등을 했고, 이것을 따로 관리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해안가 쪽으로 가면 청어, 명태, 조기 등등 다양한 생선과 김, 미역, 톳 같은 해조류도 비교적 잘 해 먹었다. 장병들 입장에서도 먹는 것은 사기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제대로 기풍이 잡힌 군대라면 가능하면 군사들을 잘 먹이는 것은 당연하다. 한나라 때 비장이라 불리던 명장 이광도 사냥한 짐승을 모든 병사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정유재란 발발 당시 보급상황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에서도 무짠지에 보리밥, 쇠기름 뜬 무국을 저녁식사로 냈으며, 인근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된장을 푼 생선탕을 군사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특히나 쌀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권에서 장이 식문화에 차지하는 비중은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진중에서 장을 담그는 일이 많았다.[* 이 때 생긴 것이 속성으로 만든 장인 전국장, 즉 [[청국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