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사독재 (문단 편집) == [[대한민국]]의 군사독재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대한상이용사회의 5.16 지지행렬.jpg|width=100%]]}}} || || {{{-1 대한상이용사회의 5.16 지지행렬}}} ||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대략적인 군사정권 시절 역사, rd1=대한민국 군사정권)] 대한민국의 권위주의 정부 집권 기간은 [[6.25 전쟁]] 기간 및 [[제1공화국]] 말기[* 당시에는 [[6.25 전쟁]]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설 수조차 없었다.] 1972년 [[제4공화국]] 성립부터 1987년 [[6월 항쟁]] 기간까지 합쳐 약 18년 정도로 여겨지고 있지만 실제로 군사정권이 시작된 것은 [[5.16 군사정변]]을 통해 제2공화국이 무너진 1961년부터이다. 1960년대~70년대 초반의 경우, 직접 선거를 통해 군인 출신의 인물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기에 해당 기간을 독재로 치지 않고 [[비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으며[* 비자유민주주의도 민주주의로 평가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관점으로 보면 이 시기는 완전한 독재는 아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정부가 구성되는 2020년대의 [[헝가리]], [[싱가포르]], [[방글라데시]], [[튀르키예]]가 사실상 독재국가라는 평가를 받듯 이 체제는 현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이 경우 [[10월 유신]] 이후 [[6.29 선언]] 이전(1972~1987)까지의 15년간을 실질적인 군사독재로 여긴다. 박정희 정부는 우선 2년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거친 뒤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했고 정부 출범 이후에는 경제개발에 전력투구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며 가시적인 경제개발의 성과로 국민들의 지지[* 혹은 최소한도의 묵인]를 이끌어내었다. 실제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직접 선거]] 방식의 [[제5대 대통령 선거]]을 진행했고, 여기서 [[박정희]]가 승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에 취임하는 절차를 밟음으로써 당대 집권의 [[명분]]은 충분한 것으로 여겨졌다. 박정희 정부는 [[1969년]] [[3선 개헌]]으로 [[임기]]를 연장하는 등의 권위주의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지만, 1970년대 초까지는 보통 [[비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는 정도다. 물론 당시에도 군인 출신의 박정희가 정부수반이었고 상술한 것처럼 비자유민주주의 체제 역시 권위주의의 일종으로 분류되므로 군사독재로 칭하는 것이 아주 틀린 표현은 아니다.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0월 유신 공포 3년 기념식.jpg|width=100%]]}}} || || {{{-1 10월 유신 공포 3년 기념식}}} || [[1972년]]에는 [[10월 유신|한국식 민주주의]]라 자칭한 [[친위 쿠데타]]인 [[10월 유신]]이 공포되어 사실상 [[박정희]]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위한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이 수립된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은 [[5.16 군사정변]] 직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었지만, 단지 비자유민주주의 체제였던 이전과는 달리 독재 체제임이 명백해져 이 시기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권위주의 군사독재 정권으로 분류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며 유신정권이 붕괴하게 되고 [[10.26 사건]] 이후 한국 국민들은 [[유신헌법]]의 폐지와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며 군사정권의 종식을 [[서울의 봄|기대했다]]. [[최규하]] 대통령도 [[12월 8일]] 비상조치 9호를 해제해 그간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허락하며 이에 화답하였다.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979.12.12 중앙청.jpg|width=100%]]}}} || || {{{-1 1979년 12월 12일(제4공화국) 중앙청}}} || 그러나 곧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의 서막을 연 [[12.12 군사반란]]과 이듬해의 [[5.17 내란]]으로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은 [[하나회]]라는 '''군내 사조직'''을 통해 군권과 국가 통치권을 모조리 장악하였고, [[박정희]] 대통령 사후 [[민주화]]의 열망에 가득찼던 [[야당]] [[정치인]]들과 [[국민]]들,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신군부]]는 이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본보기로 진압하여 [[정통성]] 문제를 일축하였다. 그러나 [[야당]]과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식을 줄 몰랐고 결국 [[1987년]] 전국적인 [[6월 항쟁]]과 함께 [[미국]]의 압박까지 들어오자[* 6월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으나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청와대]]로 찾아와 ''''[[계엄령]]을 선포할 경우 [[한미동맹]]의 심각한 타격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본국의 경고장을 전달했다. 마침 과거 박정희 정권 말기때 한미관계가 악화된 적이 있어서 전두환도 손을 쓰지 못했다.]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해당 시기 [[전두환]]은 이미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려고 마음먹은 상태였으나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머뭇거리자 [[노태우]]를 압박하기 위해 '''[[계엄령]]''' 선포를 거론했다는 설도 있다. 대표적으로 [[제5공화국(드라마)|MBC의 제5공화국 드라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김대중]]의 사면복권, 각종 자유화 조치 등을 시행하면서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정착되었고 이를 통해 겉으로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던 한국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게 되었다.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일성 유일체제 시작.jpg|width=100%]]}}} || || {{{-1 북한 김일성 유일체제의 시작}}} || 한편 [[북한]]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김일성]]파와 [[갑산파]]를 제외한 타 계파가 숙청되면서[* 갑산파 또한 이후 [[갑산파 사건]]으로 숙청하였다.] [[김일성]] 일가의 [[독재]] 체제를 성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초기에는 [[권력]] 안정을 위해 [[천리마 운동|경제 발전]]에 힘을 썼으나, [[1960년대]] 무리하게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과정에서 사실상의 [[병영국가]]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도 [[조선로동당]]은 [[조선인민군]]의 군 인사권과 검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선군정치]] 시절에도 [[조선인민군]]은 단지 [[김정일]]의 사병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저 [[문민]] [[수령]] 독재가 군정의 모습을 취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군국주의]] 국가, [[병영국가]]라고는 할 수 있지만 군사독재와는 거리가 있다. 선군정치도 사실상 심하게 뒤틀린 [[문민통제]]에 가까웠던 셈이다.[* 대체적으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는 [[정치장교]]를 통해 문민통제는 잘 이루어진 편이었다. 단지 그게 공산당의 사병화가 되어서 그렇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