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궁형 (문단 편집) == 궁형을 당한 사람 == * [[사마천]] * [[정화(명나라)|정화]] * [[오삼계]]의 미성년자 손자들 * [[야쿱 벡]]의 미성년자 아들 사마천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과도한 형벌을 받은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조상이 멸문지화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미성년자인 이상 본인의 죄는 없다고 판단되어 참수형 대신 궁형을 당한 것이다. 한나라 시절에는 궁형이 상당히 남용되었고 특히 무제 시절에는 사마천뿐만 아니라 왕의 비위를 거스른 수많은 선비가 궁형/참수형 중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았으며 그중 일부는 궁형을 받기도 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궁형을 택한 선비들은 비록 전에 엄청난 학식과 명성을 누렸어도 온 세상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명대 이후에는 남방의 이민족들을 포로로 잡은 경우 남성 성년은 모두 처형되고 여성과 여아는 노비가 되었으며 남아들은 궁형을 받기도 했는데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명나라]]의 [[정화(명나라)|정화]]다. 정화는 윈난성의 이슬람계 집안 출신인데 아버지가 친몽골 성향이어서 명에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정화 본인은 명군의 포로가 되어 어린 나이에 거세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원나라 조정에서 활약하던 [[색목인]]들 중에는 정부 요직에 앉은 사람들이나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대놓고 다 궁형에 처하지는 못하고 대신 한족과의 통혼을 무조건 강제한 적도 있었다. 북방의 이민족들을 포로로 잡은 경우는 대개 궁형을 행하지는 않고 주로 남쪽 밀림 지역으로 보냈는데 이유는 북방 초원지대 사람들이 밀림 지역으로 파견되면 열대 전염병으로 금방 우수수 죽어나가기 때문이었다. 주로 원명교체기에 포로로 잡힌 몽골인들이 이런 식으로 소모되었다. 이 둘을 조합한 사례가 [[정통제]] 시절 중국의 서남부 [[묘족]], [[요족]]이 반란을 일으키자[[https://en.wikipedia.org/wiki/Miao_rebellions_in_the_early_Ming_dynasty|#]] 명나라는 [[이이제이]]로 [[위구르]], [[몽골]]병을 보내 이들을 진압했고[* 다만 위구르와 몽골병은 각각 2천명, 1천명에 불과했고 실제론 주력은 한족 병력 3만여 명 및 묘족을 뒤통수친 [[요족]]과 [[이족|로로족]] 등이었다. 무엇보다 위구르인과 몽골인은 기병부대로 몽골인들은 궁기병들이었다.] 포로로 잡은 묘족 아이들 1565명을 모조리 거세하여 환관으로 황궁에 보낸 걱이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남방 밀림 지대의 소수민족이 계속 반란을 일으켜 진압군을 파견할 경우 전염병으로 손실되는 병력들이 많아지면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에 최대한 인구를 감소시켜 놓는 편이 유리했다. 대치 와중에 요족이 묘족의 뒤통수를 때리고 협공하여 승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요족들과 이족들이 묘족들의 [[화전(농업)|화전]]을 노리고 묘족들을 무자비하게 4만 명이나 학살하였고 명나라 측에서는 아이들에게 궁형을 시행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물론 현대에도 윤리적으로 비난받는 악행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궁형에 처해진 묘족 아이들 329명이 사망하였고 명나라에서도 아이들에게 대량으로 궁형에 처한 것에 경악하였으며 정통제도 이 보고를 듣고 경악하여 이 사령관을 질책할 정도였다. 청나라 시기에도 소수민족의 봉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종종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신장 지역을 침공하고 장악했던 [[야쿱 벡]]의 어린 아들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소수민족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분류:신체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