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궈모뤄 (문단 편집) ===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 === 상하이에 도착한 후, 그는 '구망일보(救亡日報)'를 창간해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을 선전했다. 그후 난징으로 가서 장제스와 면담한 후 '장 위원장 회견기'를 발표해 장제스의 리더쉽과 항일정신을 찬양했다. 샤옌은 이 당시 궈모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 시기 그의 가장 인상 깊은 모습은 당에 대한 무한한 충성과 저우언라이 동지에 대한 진지한 경의였다. 한번은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제스, [[천청]]과 감정을 교류했다. 매우 어색했지만, 나는 그들과 이야기하고 나서야 저우언라이 동지의 지시가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궈모뤄는 홍콩을 거쳐 광저우로 가서 1938년 1월 1일에 '구망일보'를 복간했다. 1월 9일에 우한으로 간 그는 황치샹(黃琪翔)으로부터 천청이 자신을 군사위원회 정무부 삼청장으로 초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를 거절하려 했으나 저우언라이, [[왕밍]], [[보구(중국 공산당)|보구]], [[둥비우]] 등 양쯔강 지부 지도자들이 그에게 천청의 초청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다. 이에 궈모뤄는 3월 중순에 군사위원회 정무부 삼청장에 부임했다. 중국 공산당 양쯔강 지부는 즉시 후위즈(胡愈之), 양한셩(陽翰笙), 위다푸(郁達夫), 쉬베이훙(徐悲鴻), [[선쥔루]](沈鈞儒) 등을 삼청에 보내 항일통전선 기구를 세우게 했다. 1938년 4월 1일, 정치부 삼청이 우한에서 정식으로근무하면서 '홍보주간 확장', '국민헌금' 등의 다양한 활동을 실시하였고 각종 노래를 작곡하고 연극을 제작했다. 특히 궈모뤄는 삼청의 문예선전 대상을 공장 광부와 하층민으로 확대하여 중국 공산당의 '항일구국 10대 강령'을 관철한다는 원칙을 중시했다. 이에 정치부 주임인 천청을 비롯한 국민당 일부 인사들은 이들이 국민당 내부에 공산당의 싹을 틔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반감을 품었다. 1938년, 공산당원이자 문학평론가인 후펑(胡風)이 당시 문화계에 "[[루쉰]] 선생처럼 세상을 뒤흔들 만한 대작가가 없다."고 지적했다. 저우언라이는 궈모뤄가 문화계의 지도자가 될 만하다고 생각했고 중국 공산당 중앙에 건의문을 제출했다. 1938년 여름, 중국 공산당은 궈모뤄를 루쉰의 계승자이자 중국 혁명 문화계 지도자로 결정했다. 1939년 10월 우한이 함락되기 직전, 궈모뤄는 저우언라이를 따라 우한을 떠나 충칭으로 향했다. 1940년 1월11일, 그는 창간 2주년을 맞이한 신화일보에 국민정부를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다. >"서민들이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반대로, 백성을 대표하여 말할 수 있다면, 그 힘은 장강, 대하보다 더 크다." 1940년 9월, 장제스는 궈모뤄를 군사위원회 정무부 삼청장에서 해임하고 정치부 설계위원으로 좌천시켰으며 군사위원회 소속원들에게 즉시 국민당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궈모뤄를 비롯한 삼청 내 문예계 인사들은 대거 사표를 제출했다. 이에 저우언라이가 급히 장제스를 찾아가 설득했고, 장제스는 결국 궈모뤄, 양한셩 등을 불러 정치부 문화공작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을 그곳에 배치할 테니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아도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1940년 12월 7일, 장제스는 문화사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궈모뤄 등을 이곳에 배속시키면서 이들이 문화 연구에만 전념할 뿐 정치 공작에 종사할 수 없음을 명문화했다. 이후 궈모뤄는 문예강좌, 문화강좌, 국제문제 강좌, 국제 문제 좌담회, 각종 형식의 보고회를 자주 개최했다. 얼마 후 [[환남사변]]이 일어나자, 궈모뤄는 시를 지어 국민정부를 비판했다. >강남의 한 잎사귀 같은 억울한 역사가 일어나(江南一葉奇冤史) >모든 사람들의 근심을 불러 일으켰네.(萬眾皆先天下憂) >눈물을 닦고도 쓴웃음을 지으니(淚眼揩乾還苦笑) >잠시 집을 잊고도 원수를 갚기 어렵구나.(暫忘家難賦同仇.) 중국 공산당 남방국은 환남사변의 여파로 충칭의 좌익 문화인들이 화를 입는 걸 예방하기 위해 그들을 옌안, 구이린(桂林), 쿤밍(昆明), 홍콩 등지로 보냈다. 하지만 궈모뤄는 충칭에 남아 문화사업위원회를 주재했다. 1941년, 궈모뤄 탄생 50주년과 창작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저우언라이는 양한셩에게 전국적인 정치 행사를 개최하게 했다. 그는 이를 통해 환남사변과 전황의 악화로 의기소침해진 좌파 문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했다. 이에 양한셩은 쑨커(孫科), [[사오리쯔]](邵力子), 천부레이(陳布雷), [[장즈중]](張治中), 장다오판(張道藩), [[펑위샹]], [[선쥔루]], [[황옌페이]](黃炎培), 덩샤오민(鄧初民), 젠보짠(翦伯贊) 등 각계의 인사들을 초청해 궈모뤄 축하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1941년 11월 16일, 저우언라이는 신화일보 1면에 궈모뤄에게 찬사를 보내는 사설을 실었다. >궈모뤄의 창작 생활 25년은 바로 신문화 운동의 25년이다. 루쉰은 자칭 혁명군마의 졸병이라고 말했는데, 궈모뤄는 바로 혁명대중의 중심이었다. 뤼신은 신문화운동의 스승이며 궈모뤄는 신문화운동의 주장이다. 루쉰이 길을 개척해낸 선봉이라면, 궈모뤄는 모두를 이끌고 함께 나아가는 길 안내자이다. 이날 오후 충칭의 중소문화협회 식당과 정원에서 열린 다과회에는 2만여 명의 참가자들이 참가했다. 또한 쿤밍, 옌안, 구이린, 홍콩, 싱가포르에서도 문화계의 축제가 열렸고 반년 동안 기념글이 잇달아 실렸다. 축제 기간 중 충칭에서는 곽조년(郭早年)의 연극 '당두의 꽃(棠棣之花)'이 상영되었는데, 당대 일류 배우들이 대거 주연을 맡았으며 궈모뤄는 직접 리허설과 대본수정에 참여했다. 이 연극이 충칭에서 대인기를 끌었고 저우언라이는 7차례나 관람했고 <신화일보>에 당두의 꽃과 역사극 창작에 대해 호평하는 글을 실었다. 1942년 1월 상순, 궈모뤄는 연극 "[[굴원]]"의 극본을 9일만에 완성하고 1942년 1월 24일부터 2월 7일까지 <중앙일보> 부간지에 연재했다. 또한 1942년 2월 상순에 역사극 "호부(虎符)"를 창작했으며 5월 6일에 역사극 "[[고점리]]"를 창작했다. 또한 1942년 9월 상순에 "공작담(孔雀膽)"을 창작했으며 1943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남관초(南冠草)"를 창작했다. 이 여섯편의 역사 비극 작품 중 가장 인기있는 작품은 "굴원"이었다. 역사학자 왕원의(王遠義)는 이시기 곽말약이 대중적인 형식과 엘리트의 창작, 현대성과 전통적인 민족문화가 공존하는 문학과 문화로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시기에 역사연구를 계속했고 1942년 4월부터 1945년까지 "은주의 노예사회 고찰", "묵자 사상", "술오기(述吳起)", "진한시대의 유자(秦漢之際的儒者)", "공자, 손자, 니자(尼子)의 음악이론", "[[여불위]]와 진나라의 정치", "청동시대", "십비판서(十批判書)"[* 중국의 고대 사회 기구와 고대 학술 사상을 열개 분야에 걸쳐 비판적으로 연구했다.] 등을 출간했다. 또한 역사 연구방향을 주제로 린위탕(林語堂), 선충원(沈從文), 스저춘(施蟄存)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45년 3월 30일,정치부 문예사업위원회가 장즈중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후 1945년6월, 궈모뤄는 충칭에서 미국 군용 수송기를 타고 인도, 이란을 경유하여 소련 모스크바에 가서 과학원 200주년 기념 대회를 참관했다. 6월 29일, 그는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등과 함께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등 [[독소전쟁]] 직후 페허가 된 도시들을 둘러봤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발표하자, 그는 8월 16일에 중국으로 귀국했고 8월 20일에 충칭에 도착했다. 그후 [[마오쩌둥]]이 장제스와 회담을 가지기 위해 충칭에 방문엤을 때, 궈모뤄는 마오쩌둥이 오래된 회중시계를 사용하는 걸 보고는 자신의 손에 있던 손목시계를 선물로 줬다. 이후 마오쩌둥은 오랫동안 이 손목시계를 사용했다고 한다. 1946년 1월 10일, 궈모뤄는 사회현달 대표로서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해 정부조직개편문제를 논의하면서 주석 권한이 너무 크고 국부위원은 건의권도 없다고 발언했다.그해 5월 8일, 그는 온 가족을 데리고상하이로 갔다. 그리고 1947년 11월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홍콩으로 이주해 중화 전국문예계협회 홍콩지회의 지도업무를 담당했다. 1948년 11월 23일 배를 타고 홍콩을 떠나 12월 1일 요동 안동 석성도 기슭에 도착했고 12월 6일 선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1949년 2월 25일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상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