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오설 (문단 편집) == 가계 == 그가 태어난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은 [[안동 권씨]] 복야공파(僕射公派) 집성촌으로, 전통적인 양반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디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었는데, 1420년경에 권오설의 직계조상이기도 한 참의공 권항(權恒, 1403 ~ 1461. 6. 18)이 이 마을에 살던 사직(司直, 정5품)을 지낸 [[류(성씨)|풍산 류씨]](豊山 柳氏) 류서(柳湑)라는 사람에게 장가들게 되었고 이 때부터 안동 권씨 일족 또한 세거하게 된 것이다. 이 마을은 권오설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 운동가를 배출하여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의 거점으로도 크게 두드러졌는데, 이 때문에 한때 '안동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이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희곤, 「안동 가일마을 사람들의 항일투쟁」,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5권 제1호, 2012.5, 467-496 (30 pages)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1881994|참조]] / [[http://www.815gb.or.kr/myboard/Indperson2|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홈페이지]]] * [[권각]](權慤, 1923~1943) - 조선문화학원(朝鮮文化學院)[* 기독교계열의 민족교육기관으로 보이는데, 확실한 정보는 없고 다만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912070020920201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39-12-07&officeId=00020&pageNo=2&printNo=6573&publishType=00020|1939년 동아일보 기사]]에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인 연지정(蓮池町)에 있던 학교 건물을 서대문정에 있는 피어선성경학원으로 옮긴다는 정보가 있다. 여기서 피어선성경학원은 현재 [[평택대학교]]의 전신이다. 또 [[http://db.history.go.kr/id/im_101_21194|대한민국인물연감]]에 의하면, [[한양대학교]] 설립자 [[김연준]]이 조선문화학원을 설립했다고 한다.] 중등과에 재학중이던 1940년 서울 [[사직공원(서울)|사직공원]]에 '[[대한독립만세]]' 라고 쓴 벽보를 붙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음.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 권영달(權寧達, 1901~1945) -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경성고등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에 [[6.10 만세 운동]]에 관련되어 일본 경찰에 쫓기자 자퇴하였다. 이후 [[예천군]]의 대창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는데, 이때 [[최현배]]를 비롯한 한글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한글 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했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경의 감시를 피해다니며 잠적하였음. * 권영식(權寧植, 1894~1930) - [[박상진|대한광복회]] 단원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던 중 1918년 검거되어 공주감옥에서 수개월 간 옥고를 치렀고, 1920년에 안동청년회와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음. * [[권오돈(1900)|권오상]](權五尙, 일명 권오돈(權五敦), 1900~1928) - 1924년 서울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청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1925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그 해 고려공산청년회 및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1926년 [[6.10 만세 운동]] 당시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하는 등 주도 역할을 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그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음.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 권오운(權五雲, 1904~1927) - 서울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귀향하여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 활동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음. * 권오직(權五稷, 1906~?) - 권오설의 동생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다.[* 199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은 [[권오직]](權五稷, 1927~1981)과는 동명이인이다.] * 권오헌(權五憲, 1905~1950) - 1928년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이후 안동청년동맹 풍산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1929년 일제에 결사항쟁할 것을 독려한 축문(祝文)을 썼다고 하여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음. * 권재수(權在壽, 1882~?) - 1920년 [[신흥무관학교]] 생도를 모집하다가 체포되었음. * 권준표(權準杓, 1894~1953) - 1919년 족손 권오설이 세운 원흥의숙(元興義塾)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후 1923년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소작운동을 전개하였음. * [[권준희]](權準羲, 1849~1936) - [[박상진|대한광복회]] 고문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던 중 1918년 검거되어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고령으로 풀려났음. 201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됨. * 권준흥(權準興, 1881~1939) - [[박상진|대한광복회]] 단원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던 중 1918년 검거되었다. 이후 1919년 족손 권오설이 세운 원흥의숙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음. * [[권혁수(독립운동가)|권혁수]](權赫壽, 일명 권재탁(權在倬), 1926~1965) -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안동농림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4년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을 조직, 안동 시내의 경찰서 및 헌병파견대 등을 습격한 후 [[의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교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드러나 1945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광복으로 풀려났음. 200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됨. 이상 12명의 독립운동가가 기록상으로 확인되며, 이 중 권오설을 포함한 5명이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그만큼 권오설의 이후 생애에 주변 사람들의 영향이 크게 있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안동시 출신 인물]][[분류:안동 권씨 복야공파]][[분류:1897년 출생]][[분류:1930년 사망]][[분류:옥사한 인물]][[분류:건국훈장 독립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