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관총 (문단 편집) == 발굴 경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img.donga.com/70265213.1.jpg]]}}}||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경주에는 많은 옛 왕릉들 바로 옆까지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당시에는 대부분 단순한 언덕 정도로 치부했다고 한다. 석침총 등 몇 군데 발굴조사를 하긴 했지만 예산 문제로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집이 증축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공사의 여파로 약간의 구슬이 굴러다녔고, 아이들이 이걸 가지고 노는 것을 지나가던 [[순사]]가 발견해 자세히 살펴보다가 이게 단순한 언덕이 아니라 금은보화가 들어찬 고대의 무덤임을 알았다. 이후 긴급히 유물을 수습하고 조사를 시행했는데 여기서 [[금관]]과 수많은 금 장신구, 그릇, 투구를 비롯한 4만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그러나 갑자기,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 [[고고학자]]에 의해 정식으로 발굴한 것이 아니라서 유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많이 얻지 못했다. 금관총보다 나중에 발굴된 다른 무덤들은 그나마 낫지만 금관총은 '''나흘''' 만에 해치웠다고 한다.[* 비슷하게 우연히 발견되어 졸속으로 '''하루 만에''' 조사를 완료해버린 [[무령왕릉]]도 있다. 초기 한국의 열악한 고고학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 금관총의 발견으로 경주의 수많은 신라 왕릉들의 가치를 모두가 알게 되었고, 당시 세계 고고학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게 되자 [[일본인]]들은 서양 중심의 고고학 판도에서 자신들이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 관심이 커져 1921년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과가 신설되고 [[서봉총]], [[금령총]] 등 다른 근처 대형 고분들도 잇따라 발굴하는 유행이 일었다. 일제도 미리 준비계획하고 시작한 발굴이 아니었던데다 시대가 시대라 지금 기준으로 보면 졸속 발굴되었기 때문에,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은 금관총을 재발굴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의 졸속한 발굴의 한계 및 오류를 바로잡고, 돌무지덧널무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함이었는데 여기서 아래에 나올 무덤의 주인에 대한 단서인 이사지왕 명문,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 과정에서 목조가구를 세우고 강돌을 채웠다 사실 등 새로운 발견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