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문고량주 (문단 편집) == 역사 == 다른 백주에 비해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술로 1949년 [[진먼 포격전]]을 계기로 생겨나게 되었다. 금문고량주는 당시 진먼섬의 주민이자 [[싱가포르]] 화교 출신었던 '''예화청(葉華成)'''이 자택에서 소규모로 술을 만든 데서 시작한다. 이 예화청이라는 인물은 원래 사업가로 양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중화민국 국군]]에서 퇴역한 양조기술자들로부터 기술을 배워 양조 사업에 뛰어들었다. 예화청은 1950년 진청진(金城鎭) 진먼청촌(金門城村)에 양조장 터를 잡고 '진청주창(金城酒廠)’을 세워 금문고량주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진먼섬에 주둔한 군에 군납용으로 술을 납품하기 위해 [[인맥]]을 통해 [[중화민국 국군]] 제19군 복지기구에 위탁판매를 할 수 있는 납품계약을 맺어 금문고량주의 판로를 열게된다.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과의 전투로 인해 작은 진먼섬에는 10만명의 군인이 주둔해 있었는데 [[진먼 포격전]] 당시 진먼섬으로 포격이 날아오면 병사들이 모두 지하벙커로 피신해야 했다. 한번에 수백발의 포탄이 떨어지는 극한 상황에서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반 백주보다 훨씬 독하면서도 맛이 좋았던 금문고량주는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원래의 금문고량주는 66도짜리다. 58도와 38도짜리는 나중에 상품화하면서 추가된 것.] 그러던 와중 진먼방위사령관이자 [[푸젠성(대만)|중화민국 푸젠성]]의 주석으로 진먼섬의 전권을 쥐고있던 '''후롄(胡璉) 장군'''이 19군 소속 연대장의 추천으로 금문고량주를 맛보게 되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 평소 진먼섬의 군대와 지역주민이 소비할 술과 쌀을 모두 대만 본토에서 들여오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던 그는 진먼섬이 [[수수]]를 재배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현지 주민들에게 수수 재배를 맡겨 수확된 수수를 군 보급품인 [[쌀]]과 맞바꾸고 백주를 현지에서 생산한다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섬 주민들은 [[쌀밥]]을 먹으면서 섬에서 생산한 술을 마실 수 있게되어 결과적으로 군과 민간인 사이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었다. 또한 부산물인 수숫대는 [[연료]]로 사용할 수 있으면서 본토에서 술을 들여오는 운임비도 지출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정말 일거양득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많은 점이 해결되는 방안이었다. 그리하여 1952년, 후렌 장군은 군을 동원해 예화청의 '진청주창’을 일방적으로 흡수하고 군이 직접 운영하는 양조장인 '주룽장주창(九龍江酒廠)'을 설립한다. 더불어 예화청을 기술책임자로 영입해 병사 중에 [[중국]] 본토의 주창에서 술을 만든 경험이 있던 병사들과 함께 금문고량주를 생산한다. 당시에 예화청은 꽤 불만이 있었으나 언젠가는 되찾을 가능성이 있던 양조장이 군을 통해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기술과장으로서 고액의 연봉을 보장받아[* 수령하는 월급이 당시 공장장 월급의 3배 이상이었다.] 큰 반발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1953년부터는 금문고량주의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었으며 1956년엔 지금의 이름인 '진먼주창(金門酒廠)'으로 회사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1992년 들어 진먼섬의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대만 정부는 군대가 소유하고 있던 진먼주창을 [[진먼현|진먼현정부]]에 귀속시켰고, 진먼현정부는 1998년에 시장 경쟁력을 높이기 위하여 [[주식회사]] 체제로 양조장을 독립시켜 금문고량주의 생산과 판매를 전담하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