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길선주 (문단 편집) === 도사, 기독교에 입문하다 === 길선주는 집을 떠난 뒤 각지를 정처없이 떠돌다가 도교의 일종인 관성교(關聖敎)에 빠져들었다. 관성교는 [[관우]]를 모시는 종교로, <각세진경(覺世眞經)>과 <명성경(明聖經)>을 경전으로 삼고 관성제군보서고(關聖帝君寶書誥)를 암송하며 관우를 천신으로 떠받드는 도교의 분파다. 길선주는 매일 '관성제군보서고'를 암송하면서 환성을 보고, 김순호에게서 산신 차력 주문을 받아 일주일간 외우면서 심신이 유쾌해지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수십년간 <옥경(玉經)>을 연구한 장득한으로부터 구령삼정(九靈三精) 주송법과 삼령(三靈) 주문 등을 배우고 평양 대성산에 들어가 밤낮으로 주문을 외우며 수련했다. 그는 21일, 49일, 혹은 100일 수련 기간 동안 금식기도, 철야기도, 통성기도, 새벽기도를 했다. 또한 운동과 단약 복용을 통한 차력으로 몸을 단련했으며, 정좌법, 도인법, 호흡법을 체득했다. 아들 길진경이 저술한 <영계 길선주>에 따르면, 길선주는 이러한 수행을 한 결과 웬만한 냇물은 건너뛰고 목침을 주먹으로 부수며 정좌한 채 공중에 부양하는 등 초인적 힘을 얻었으며 하늘의 영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도 도교 주문을 가르치고 한밤에 함께 경건히 기도했으며, 영웅을 생산하기 위한 부부 생활을 고안했다. 그는 이렇게 8년동안 이러한 혹독한 수행을 거듭하면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수행을 계속했고, 곧 선도에 통달해 사람들로부터 '길 장수', '길 도인'이라 불리며 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했다. 이후 그는 도인들을 만나 토론하기를 즐겼지만, 지나친 수행으로 인해 시력이 약해지고 배탈에 시달리는 등 몸이 갈수록 허약해졌다. 게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한 뒤 피난민들과 함께 전화를 피하던 그는 도탄에 빠진 민중을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관성교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이후 그는 성천 영대산에 1년 이상 은거하며 도교를 가르치고 수련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도교에는 민족을 구원할 만한 힘이 미약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1896년 봄 평양에 돌아온 그는 자신의 친구 김종섭이 예수교 신자가 된 것에 경악했다. 길선주와 가까이 지냈던 제임스 S. 게일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길선주가 김종섭에게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수련하던 도를 버렸단 말인가?"라고 꾸짖자, 김종섭은 "우리가 찾던 것을 예수교에서 찾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길선주는 서양 종교는 거짓이며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단정했다. 이에 김종섭은 <그리스도 신문>을 주고 기독교 신자가 될 것을 권유했지만, 길선주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김종섭이 나중에 전해준 <이선생전>을 읽고 한 아편 중독자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진실한 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뒤이어 <장원량우상론>과 [[천로역정]]을 읽고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품기 시작했다. 다만 그는 기독교 안에 다소 진리가 있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그 동안 삼령 주문과 구령 주문으로 늘 기도하며 삼천존(三天尊)의 성호를 높였는데, 이는 예수교의 삼위일체 신과 다름이 없으므로 굳이 예수교의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천로역정이 감동적이라는 것도 인정했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수 없었고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차츰 기독교와 도교 사이에서 번뇌했다. 길진경의 <영계 길선주>에 따르면, 김종섭이 예수교의 천부(天父)인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권하자, 길선주가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지존막대하신 상제님을 어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러자 김종섭이 아래와 같이 답했다고 한다. >그러면 상제님이라고 부르고 상제께 기도해보라. 길선주는 훗날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그(김종섭)의 모든 행동, 그가 앉고 일어서는 것, 잠자리에 드는 것, 걷는 것을 눈에 불을 켜고 주시했다. 여러 날이 지나면서 공포가 엄습했는데, 그가 나를 이긴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옛 방법인 기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길선주는 1896년 가을에 이른 새벽마다 겸손히 상제께 기도했다. 그는 예수교가 진리인지,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인지 상제께 묻는 순수한 진리 탐구로서의 기도를 '예수의 이름'으로 드렸다. 그는 훗날 게일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점차 나는 그렇게 완강히 붙잡고 있던 밧줄을 놓기 시작했고, 밧줄은 한 가닥씩 풀렸으며, 내 영혼은 심연 위의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이어 상실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그 고뇌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다. 일곱 째 되던 날 지치고 절망한 나는 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나는 갑자기 “길선주야!”라고 크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고, 그 소리는 반복해서 울렸다. 어리둥절한 채로 일어나 앉아 있는데 내 앞에 신비한 무엇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방 자체가 변형되었고 영광스러운 빛이 내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내 영혼에 안식과 용서와 애정이 자리 잡았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이를 증명했다.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 얼마나 기뻤던가! 모든 기도가 응답되고, 내가 수 년 간 고뇌하며 찾았던 하나님을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자가 되어 마음이 편했다. 그 자신이 게일 선교사에게 고백한 바에 따르면, 길선주는 이후 [[사도 바울]]처럼 얼마 동안 맹인이 되었다가 시력이 도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기독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기로 결심한 그는 1897년 8월 15일 28명의 교인들과 함께 장대현(章臺峴) 교회에서 그레엄 리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