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길선주 (문단 편집) === [[1907년 평양 대부흥]] === 길선주는 기독교 신자가 된 뒤 먼저 상투를 자르고 온 가족을 전도했다. 또 금식과 철야기도에 정진했는데, 한번 손에 성경을 쥐면 놓지 않을 정도로 열중했다. 그리고 1898년 봄에 영수로 선출, 임명받았으며, 1902년 장대현 교회 조사(助事) 겸 황해, 평안 2개도의 조사에 취임했다. 또한 1903년 봄에는 모펫(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에 세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고 1907년 졸업하여 7명의 동료와 함께 평양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장대현 교회 목사가 되었다. 한편, 길선주는 자신이 과거에 산 속에서 수행한 방식을 교회에 다닐 때도 접목시켰다. 그는 새벽, 정오, 밤에 반드시 기도했고, 개인적으로 하던 새벽 기도를 교회 신자들 전원에게도 수행할 것을 권고했다. 사실 그가 새벽 기도를 교회에 처음 도입한 건 아니었다. 첫 새벽기도회는 1898년 평양에서 가까운 황해도의 수안군 강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초보적 형태로 시작되었고, 휘트모어와 리 목사는 이들의 신앙적 열성이 대단했다고 보고했다. >이 사람들의 열심은 놀랍다. 이 사경회에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아침 해가 올라오기 훨씬 전에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공부하는 소리가 옆방에서 들렸다. 같은 찬송들을 하루 종일 밤늦게까지 들을 수 있다. 모든 비용은 본토인 그리스도인들이 부담했는데, 선교사들의 한국인 수행자들의 식비까지 부담했다. 길선주가 한 일은 이 새벽기도를 교회의 정식 프로그램으로 도입하고 교회의 모든 신도들에게 새벽 기도에 참여할 것을 권장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집 벽에 작은 통을 달아 놓고 적은 돈이라도 받아 오면 늘 십일조를 떼어 넣었고, 주일 아침에 전 가족이 통 주변에 모여 함께 기도한 후 돈을 꺼내 각자 연보할 돈을 받아 교회로 갔다. 길선주는 이 통을 ‘희락과 즐거움의 통’이라고 불렀다. 언제나 주님을 섬기기 위한 돈이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흉내만 내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외형적 신앙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1906년 2월 15일 <그리스도신문>에서 축음기에서 나는 기계적 소리나 앵무새처럼 뜻도 모르고 스스로 생각지 않고 하는 말을 예로 들고, 성령을 받지 못했으면서 학문과 말만 배워서 연설을 하거나 신문상에 논설을 하는 자는 실로 앵무새나 다름없다며, 성령을 받은 신령한 자만이 언행이 일치하는 성실한 인격자로 봤다. 길선주는 1904년부터 1906년까지 감리교 선교사들이 주도한 부흥운동이 개성과 원산, 서울에서 성공한 것을 보고 평양에서도 대부흥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07년 1월 14일부터 시작된 평양 대부흥 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매일 저녁 부흥 집회가 진행되던 중, 1월 20일 주일 오후 예배 때 행한 그의 설교는 회중들의 회개를 불러 일으켰다. 그레엄 리 선교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주일 오전 중앙 교회[장대현교회]에서 우리는 평소대로 성경 공부반을 열었다. 오후에 다른 위대한 능력이 나타났다. 길선주가 설교했는데 그는 매우 생생한 예화로 설교를 마감했다. 그는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한 손을 밧줄로 허리에 묶은 뒤, 한 영수에게 밧줄을 잡아 달라고 부탁하고, 매큔에게는 설교단에 서서 자신을 오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길 씨는 이것은 죄에 묶인 죄인이 밧줄을 끊고 하나님께 가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은 자처럼 나아가려고 하면서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손에서 밧줄 을 풀고 강단을 가로질러 달려가, 그와 매큔은 두 팔을 벌려 서로 끌어안았다. (중략) 길씨가 밧줄을 풀려고 할 때 회중은 숨을 죽였다. 그러다가 손이 풀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포옹했을 때 그 효과는 형용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즉시 일어나서 죄를 고백하겠다고 외쳤고, 다른 사람들은 울면서 너무나 괴로워서 몸부림치면서 바닥에 뒹굴었다. 길 씨는 그들에게 집에 가서 그들의 죄를 사람들에게 말하고 저녁 집회에 다시 오라고 말했다. 김양선 목사의 저작 <한국기독교사연구>에 따르면, 당시 예배에 참석했던 정닉노 장로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한다.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찬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는 길 목사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눈이 소경이어서 나를 보지 못하였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버릴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극심한 근심에 쌓인 얼굴과 죽음에 떠는 영을 가지고 예배당 안으로 돌아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그 후 길선주는 2월 서울 사경회에 강사로 가서 2월 17일부터 3월 초까지 3주일간 서울 3개 장로교 연합 사경회에서 설교했다. 그는 서울에서도 열성적으로 설교에 임해 수많은 신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한 서양 선교사의 보고에 따르면, 양반과 '상놈'은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각각 떨어져 앉았지만 그의 설교가 끝나기 전엔 함께 앉아 서로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으며, 여인들도 남자들과 함께 죄를 빌었고 길선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옷 한 벌을 만들어 선물로 주기도 했다.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도 자신들이 엄청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 운동은 이내 전국으로 번졌다. 길선주는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는 젊은 부흥사'로 불렸으며, 1907년 9월에 열린 제4회 노회 임원 선거에서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전도국장을 겸하며 '백만인 구령(救靈)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당시 그는 황해도의 김익두(金益斗), 의주의 이기선(李基宣)과 함께 '3대 권능(權能)목사'로 불렸다. 길선주는 한국교회의 개혁에도 힘을 기울였다. 우선 교회 안에서의 남녀 구별을 없애기 위해 교회당 안에 설치된 남녀 좌석 사이의 장막을 철거하였다. 또 우리의 전통음악인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으로 도입하여 행사 때나 교회 명절에 연주하게 하였다. 아울러 국내 최초로 성가대와 교회음악단을 조직하여 선교 활성화에도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랑이 없는 교회는 지탱할 수 없다"며 교회의 양적 팽창을 경계하며 신앙의 성숙을 강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