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수항 (문단 편집) == 유계(遺戒)[* 부친이 남긴 유서. 아들들에게 김수항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 == >나의 직위는 삼사(三事 삼정승)에 올랐고, 나이가 육순을 넘겼다. 왕명을 받아 죽어도 다시 한탄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다만 한스러운 것이 있으니, 세 조정에 걸쳐 망극한 은혜를 입었으면서 털끝만큼도 갚지 못한 채, 마침내 큰 죄에 빠져 충성하고자 했던 뜻을 홀로 저버리게 된 일이다. 이것이 첫 번째 한이다. > >내가 어려서부터 배움에 뜻을 두어 의리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었으며, 늙어서도 또한 이 뜻을 감히 잊지 못하였다. 그런데 용렬하고 나약해서 대충 그럭저럭 하는 옛 버릇에 빠져 하루도 그 힘을 실제 써 보질 못하고, 마침내 이렇다 할 명성도 없이 죽게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한이다. > >내가 비록 벼슬길에 일찍 나왔지만, 사실 벼슬에 대한 뜻은 거의 없었다. 성품이 또한 산수를 좋아하여 매번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한 곳으로 가 고요한 물가에서 노년을 보내려고 생각하였다. 일찍이 백운산(白雲山) 속에 초가집을 지어 실로 여기에 뜻을 두었지만, 속세의 굴레에 매여 마침내 귀자연(歸自然)을 이루지도 못했다. 이것이 세 번째 한이다. 이는 너희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일이기에 써서 보여 주노라. > >나는 마침 위태롭고 힘든 날을 만나 오랫동안 차지해서는 아니 되는 높은 지위를 외람되이 차지하였고, 세상을 널리 구제할 책무는 본래 감당할 일이 아니었으니, 관직과 나라를 병들게 한 죄는 참으로 이루 다 용서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는 일념만큼은 귀신에게 스스로 물어볼 수 있지만, 오늘에 이르러 구구한 이 마음을 또한 스스로 밝힐 수 없으니, 다만 후세의 양자운(揚子雲)이 알아 주길 바랄 따름이다. >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에, 일찍이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유계(遺戒)를 남기셨다. 변변치 못한 내가 진실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만분의 일도 못 따라가고, 더구나 지금 임금님께 죄를 받아 선조의 덕(德)을 욕되게 했으니, 아무런 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상례와 제례의 모든 일은 검약을 힘껏 준수하여 조금이라도 분수에 넘치지 않게 해서 나의 이 뜻을 따르도록 하거라. > >우리 집안의 상례와 제례는 옛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 자못 많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매번 선세(先世)부터 행해진 지 벌써 오래되었으니 뜻에 따라 가볍게 고치기가 어렵다며 가르치셨다. 그렇지만 또한 그 가운데에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면, 후손들이 헤아려서 고칠 수 있다는 가르침도 일찍이 남기셨다. 모든 일이란 오래되면 변해야 하는 법이니, 하나같이 고집스레 지킬 수는 없다. 지금 내가 죽으면 상례와 제례의 여러 가지 예법은, 고금이 다르거나 재력이 미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따라서 시행하라. > >묘역의 석물을 지나치게 사치하고 크게 만들어 폐습을 따르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다. 그리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신도비 역시 치명(治命 죽기 전 정신이 맑을 때 내린 유명(遺命))에 의해 세울 수가 없었으니, 이제 내 묘에는 단지 짧은 묘표(墓表)만 세워라. 또한 지석(誌石)을 묻을 때에는 세계(世系)와 생몰연대, 이력만을 간략히 기술해서 장황한 문자로 남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도록 하라. > >나는 본래 재주와 덕이 없는데, 한갓 조상의 음덕을 빙자해서 나라의 은혜를 두텁게 입었고, 자리를 훔친 게 분수에 지나쳐 스스로 화를 재촉했다. 오늘의 일은 관직이 융성했음에도 그만두질 못하고, 물러나려 하다가 물러나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비록 후회해 본들 어쩔 수가 없다. 자손들은 마땅히 나를 경계로 삼아 항상 겸퇴(謙退)의 마음을 지녀라. 벼슬길에서는 현요(顯要)[* 현관(=높은 벼슬)과 요직]의 직책을 피하고 멀리하며, 집에서는 공검(恭儉)을 힘써 행하라. 교유를 삼가고 의론을 간략히 하도록 함에 이르러서는, 선세(先世)의 남긴 법도를 하나같이 따르면서 자신을 바르게 하고 가문을 지키는 터전으로 삼는 것이 지극히 좋을 것이다. 여러 손자들의 이름을 지금 '겸(謙)' 자로 명명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김수항의 손자들은 이름이 '김x겸'이다.반면, 김상용의 후손인 선원파의 경우, '겸'에 해당되는 항렬자는 '시(時)'이다.] > >옛사람이 이르기를 독서 종자를 끊어지게 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여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힘을 기울여, 마침내 충효와 문헌의 전승을 잃지 말아야 한다. 문호를 유지하는 일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 >기사년(1689, 숙종15) 4월 초이렛날 문곡 노인은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에게 써 주니, 여러 손자들이 성장하거든 또한 이 종이를 전해서 보여 주도록 하라.[[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97A_0260_040_0090|문곡집 26권]] 유계를 받들어 [[김창집]]을 제외한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김창립은 부친 김수항보다 먼저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김창집은 현요의 자리에 올라갔고 좋지 못한 최후를 맞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