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수항 (문단 편집) == 가족 관계 및 후손 == * 양조부: [[김상헌(조선)|김상헌]](金尙憲, 1570 ~ 1652) * 친조부: 김상관(金尙寬, 1566 ~ 1621)[* 김극효(金克孝)의 차남으로 [[김상용]]의 동생, [[김상헌(조선)|김상헌]]의 둘째 형이다. 음보로 관직에 올라 회양부사, 판관, 장단부사를 지냈다. 후손의 번성으로 이조참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 부: 김광찬(金光燦, 1597 ~ 1668)[* 본디 김상관의 차남이다. 친형 김광혁(金光爀, 1590 ~ 1643)은 1624년(인조 2년) 문과 급제 후 광주목사, 동부승지를 역임했다. 친자가 없어 김광찬의 차남인 김수흥이 양자로 입적되어 뒤를 이었다. 김광찬은 광해군 시기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1627년 (인조 5년) 생원시에 합격한다.이후 음보로 관직에 진출했다. 1655년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대궐 출입을 하게 되었고, 1658년 파주목사, 1662년 다시 첨지중추부사와 공조 참의가 되었다. 1668년 김수흥, 김수항이 모두 판서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현종의 지시로 1품계를 더 올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병자호란 시기 김상헌의 자결 시도를 만류하지 못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김상헌이 심양에 끌려가 있을 때 양모가 사망하였을 때 극진한 효성을 보였다고 하며, [[나만갑]]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모보(某甫)처럼 양자가 되어 상을 치르면서 그 슬픔을 다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라고 했다한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E&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97A_0210_010_0050|김수항이 쓴 행장]][[https://sillok.history.go.kr/id/krb_10902024_002|실록 졸기 링크]]] * 모: [[연안 김씨]][*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의 친손녀로 인목왕후의 조카이다.] * 형: 김수증(金壽增, 1624 ~ 1701)[* 호는 곡운(谷雲)이다. 당쟁에 관여하기보다는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형조정랑, 회양부사 등을 역임했다. 김상용, 김상헌의 문예 의식을 전수 받아 금석서예에 조문이 깊었고, 조선 예서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전대의 예서풍을 전수 받아 본인의 필법인 곡운체를 창안하여 후대에 전수한다. 예서의 맥을 전수하며 노론계의 서체로 굳어지게 되며, 훗날 예서의 절정기에 [[추사]]에 의해 추사체가 탄생하게 된다. 산수를 좋아하여 많은 유기를 남겼다. 강원도 화천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만년에는 은거하였다. 본인도 곡운 일대를 경영하는 계획과 과정을 글로 남겼으며, 화가 조세걸([[김명국]]의 제자)이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를 그리고 아들과 조카들의 글을 받아 곡운구곡도첩을 만들었다. 이 기록들로 현대에도 지속적으로 연구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대부의 주거, 생활공간에 대한 기록 및 삶과 문학과의 연관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훗날 기사환국으로 풍비박산이 난 가문을 지탱해낸다. 무너질 수 있던 조카들의 마음을 다잡아준 것이 백부 김수증이다. 김수항은 사사가 결정된 후 큰 형에게 편지를 남겨 아이들을 지휘하고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하였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E&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97A_0280_010_0550|김수항의 서한]] 아들은 김창국, 김창숙, 김창직이 있고, 딸이 [[어유봉]]과 혼인하였다. 김창국의 딸은 [[영빈 김씨]]이다. 자신의 예술 전통이 자손을 통해 전해지기를 바랐으나, 뛰어났던 둘째 아들 김창숙(金昌肅, 1651 ~ 1673)이 일찍 사망하였고(동갑이지만 생일이 빨라 김창숙이 형이라 부른 절친했던 김창협이 훗날 묘지명에서 '만일 조금 더 살았더라면 아마도 [[구양수|구양영숙]](歐陽永叔)이나 조명성(趙明誠, 남송의 금석학자, 시인.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의 남편이기도 하다)처럼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435A_0280_010_0080|김창협이 쓴 묘지명]], 영민함을 보였던 손자 김오일(金五一, 1675 ~ 1682, 셋째 아들 김창직의 아들)에게도 큰 기대를 걸었으나 8세에 사망하였다. 셋째 김창직(金昌直, 1653 ~ 1702)은 1686년 문과 급제 후 지평까지 올랐다. 조카 김창집의 아들인 김호겸(金好謙, 1681 ~ 1699)을 김창숙의 후사로 삼아 소장한 도서, 그림, 김창숙의 유묵을 물려주어 문예 전통을 계승하려 하였으나 그 또한 일찍 사망했다. 결국 그의 계승은 실질적으로 조카 김창협과 김창흡(특히 김창흡의 둘째 아들 김치겸이 김수증의 장남 김창국의 아들로 입적하게 되어 김수증을 잇게 된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김창흡이 백부의 시문을 정리하고 편집하여 서문을 썼고, 김수증의 생질인 이의현(李宜顯, 1669 ~ 1745, 김창협의 제자이며 훗날 영의정까지 역임)이 경상도 관찰사일 때 1711년 문집 '곡운집(谷雲集)'을 간행한다. 실록의 졸기는 [[https://sillok.history.go.kr/id/ksa_12703004_001|링크]] 참조. - 출처: 이효숙, 기사환국의 트라우마와 그 치유 양상 - 장동 김문을 중심으로 + 안대회, 조선후기 士大夫의 집과 삶과 기록 + 이종호, 金壽增의 文藝志向과 家學傳受] * 형: 김수흥(金壽興, 1626 ~ 1690)[* 호는 퇴우당(退憂堂)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백부 김광혁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문과 급제 후 동생 김수항과 승승장구하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부교리, 대사간, 도승지를 거쳐 1666년 호조판서, 1674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예송논쟁으로 남인에 밀려났다가, 1680년 서인의 재집권으로 다시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유배당했고 이듬해 사망하였다. 2남 5녀를 두었으며, 후손들 중 일가 친척인 [[김조순]]의 항렬인 5대까지 문과 급제자가 보이지 않는다. 장남 김창렬(金昌烈)은 조졸하였고 차남 김창열(金昌說)은 안악 군수를 지냈으며 [[박태보]]와 함께 순절한 오두인의 딸과 혼인하였다. 셋째 딸은 [[이단상]]의 아들 이희조와 혼인하였다. 김수항은 둘째형에게도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E&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97A_0280_010_0560|링크]] 묘지명은 조카 [[김창흡]]이 찬하였고, 묘표는 [[김창협]]이 찬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sa_11610012_001|실록 졸기 링크]]] * 부인: 안정 나씨, 나성두의 딸. [[나만갑]]의 손녀 * 장남: [[김창집]](金昌集, 1648 ~ '''1722''')[* 딸 둘은 모두 [[여흥 민씨]]와 혼인하였다. 장녀는 [[민정중]]의 손자이고 우의정 민진장의 아들인 민계수와 혼인하였고, 차녀는 [[민유중]]의 손자이고 좌의정 [[민진원]]의 아들인 민창수와 혼인하였다. 양가는 매우 친밀하여 김창흡은 훗날 민정중의 묘표에서 '양가일체(兩家一體)'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 손자: 김제겸(金濟謙, 1680 ~ '''1722''')[* 숙부 김창흡의 제자이다. 1717년 부친이 영의정이 되었다. 1719년 문과 급제 후 정언, 예조참의, 승지를 역임하였다. 신임옥사에서 부친이 몰락하고, 본인도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한다. 이배 되던 중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되어 묘지문을 작성하였다. 영조 등극 후 관작이 복구되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삼남 김원행은 당숙 김숭겸의 양자로 입적된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 증손자: 김성행(金省行, 1696 ~ '''1722''') [* 신임옥사 당시 지평으로 재직중이었다. 심문 당하는 도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부, 부친과 함께 사망하였다. 훗날 영조는 등극 후 '종사(宗社)가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김성행의 힘이었다'고도 하며 직접 그의 제문을 짓기도 했다. 영조의 명으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가, 훗날 정조가 이조참판으로 추증한다. 결국 영의정까지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 현손자: 김이장(金履長, 1718 ~ 1774)[* 가문의 봉사손 (부친 김성행은 1남 1녀를 두었다.). 증조부, 조부, 부친이 모두 신임옥사로 사망하였고, 당시 5세였다. 숙부 김원행의 가르침을 받았고, 봉사손으로서의 일에 충실하였다. 1761년에야 음보로 출사하여 황주목사, 장악원정를 역임했다. 셋째 아들 김인순(金麟淳)은 당숙인 김이직(金履直)의 양자로 입적한다.] * 내손자: 김복순(金復淳, 1744 ~ 1821)[* 장남. 음직으로 황주목사까지 올랐다. 장남 김영근(金泳根, 1793 ~ 1873)은 생원시 합격 후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김영근의 장남 김병준(金炳駿)은 진사시 급제 후 이조참의까지 올랐다. 차남 김병기(金炳冀, 1818~1875)는 호가 사영(思穎)이며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의 양자가 된다.] * 내손자: 김태순(金泰淳, 1747 ~ 1825)[* 증 좌찬성. 아들 김교근(金敎根, 1766 ~ 1844)은 문과 급제 후 이조판서에 오른다.] * 내손자: 김이순(金頤淳, 1761 ~ 1831)[* 양자 김문근(金汶根, 1801 ~ 1863)은 [[철종]]의 장인으로 [[철인왕후]]의 부친이다.] * 증손자: 김달행(金達行, 1706 ~ 1738)[* 중형 김원행이 작성한 묘지명에 따르면 가문의 화로 벼슬 생각을 접었고,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배우자는 한산 이씨로 [[혜경궁 홍씨]]의 모친의 자매(=혜경궁의 이모). 혜경궁의 모친이 어려운 자매를 많이 챙겼다는 기록이 한중록에 있다.] * 현손자: 김이기(金履基, 1724 ~ 1790)[* 능주목사, 광주목사] * 내손자: 김용순(金龍淳, 1754 ~ 1823)[* 1777년 진사시 급제. 공조참의. 사촌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金逌根, 1785 ~ 1840)이 양자로 입적한다. 김유근은 대사성, 대사헌, 이조, 병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역임했고, 1832년 친부 김조순 사망 및 1834년 순조 승하 후 초기 세도 정권을 무난하게 이끌었으나, 1835년 중풍으로 쓰러져 실어증 후유증으로 정권에서 물러난다.] * 현손자: 김이중(金履中, 1736 ~ 1793)[* 1771년 진사시 급제. 호조좌랑, 고양군수, 평양서윤, 서흥부사를 지냈다.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내손자: '''[[김조순]]'''(金祖淳, 1765 ~ 1832) * 현손자: 김이경(金履慶, 1738 ~ 1816) * 내손자: 김명순(金明淳, 1759 ~ 1810)[* 친부는 김이기이다. 작은 아버지인 김이경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1810년 문과 급제. 승지, 대사간, 호조, 이조참판을 지냈다. 장남은 김홍근(金弘根, 1788 ~ 1842)이며 문과 급제 후 좌의정까지 오른다. 그의 아들인 [[김병시]](金炳始, 1832~1898)도 문과 급제 후 6조 판서를 거쳐 훗날 영의정에 오른다. 혼란하던 조선 후기 청, 일의 개입을 반대하였고, 아관파천 이후 친러 내각의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나 취임하지 않았다. 차남 김응근(金應根, 1793 ~ 1863)은 생원시 합격 후 가문의 힘으로 충청도 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에 이른다. 삼남 김흥근(金興根, 1796 ~ 1870)은 영의정까지 오른다. 김흥근은 세도를 빙자하여 위세를 부렸고 탄핵 받아 유배가기도 했다. 그의 별장을 탐낸 흥선군에게 반강제로 헌납한 것이 [[석파정]]이다. 김흥근의 아들인 김병덕(金炳德, 1825 - 1892)도 문과 급제 후 판서와 참찬을 지냈으며, 대원군 집권에도 숙청되지 않고 좌의정까지 이른다. 청렴했다고 알려져있다. 사촌 동생 김병시의 권력욕을 경계했다는 기록도 있다.] * 증손자: 김탄행(金坦行, 1714 ~ 1774)[* 1726년(영조 2년)에 유배지였던 금산에서 풀려났다. 훗날 노론 집권 후 금산군수, 남원부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까지 오른다.] * 현손자: 김이소(金履素, 1735 ~ 1798)[* 호는 용암(庸庵). 1764년 문과 급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1780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홍국영을 탄핵한 바 있다. 6조 판서를 모두 역임 후 좌의정까지 오른다. 외교에 뛰어나 청나라에만 5차례 다녀왔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2208024_001|실록 졸기 링크]]] * 내손자: 김지순(金芝淳, 1772 ~ 1827)[* 생부는 부친의 바로 아랫 동생 김이유(金履裕)이다. 생원시 합격 후 충주 목사를 지냈다. 김지순의 아들 [[김조근]](金祖根, 1793~1844)의 딸이 [[헌종]]비 [[효현왕후]]이다. 김조근의 동생인 김보근(金輔根, 1803~1869)은 종숙 김홍순(金鴻淳, 김이도의 아들)의 양자로 입적한다.1837년 문과 급제 후 대사성, 부제학, 이조참판, 예조,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도 등용되었다.] * 현손자: 김이유(金履裕, 1741 ~ 1819) * 내손자: 김난순(金蘭淳, 1781 ~ 1851)[* 김이유의 차남. 1813년 문과 장원 급제 후 대사헌, 대사성,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도 뛰어났다고 한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아들 김신근(金愼根, 1799 ~ 1851)도 문과 급제 후 예조 참판까지 오른다.] * 현손자: 김이도(金履度, 1750 ~ 1813)[* 1800년 문과 급제 후 대사성, 대사간을 거쳐 예조, 형조, 병조, 공조판서를 거쳐 좌참찬까지 올랐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 내손자: 김홍순(金鴻淳, 1777 ~ 1820)[* 김보근이 양자로 입적한다. 증 좌찬성.] * 손자: 김호겸(金好謙, 1681 ~ 1699)[* 김수증의 차남 김창숙의 아들로 입적하나 일찍 사망한다.] * 차남: [[김창협]](金昌協, 1651 ~ 1708) * 손자: 김숭겸(金崇謙, 1682 ~ 1700)[* 호는 관복암(觀復庵)이다. 부친이 벼슬길에 나서지 않으며 은거할 때 함께 학문을 닦다가 요절하였다. 시에 뛰어나 '관복암시고(觀復菴詩稿)'를 남겼다.] * 증손자: 김원행(金元行, 1702 ~ 1772)[* 호는 미호(渼湖). 본디 김제겸의 차남으로 김창협의 손자인 김숭겸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신임옥사로 인한 친조부, 부친, 형이 사망하였으나, 출계된 상태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1719년 진사시 합격은 하였으나 이후 벼슬의 뜻을 접고 학문에 전념한다. 훗날 김창협, 김창흡을 잇는 낙론의 종주가 되어 가문의 서원인 석실서원을 이끌었고 명유로 이름을 남겼다. 꾸준히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생을 마감한다. 아들 김이안이 '아버지는 과거를 가볍게 여기셨다(知科擧之輕)', '다시는 한양에 한 걸음도 들이지 않았다(不復踐京城一步)' 고 기록한 바가 있다. 제자로 아들인 김이안을 비롯하여 박윤원(朴胤源), 홍대용(洪大容), 황윤석(黃胤錫), 오윤상(吳允常)을 배출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812030_002|실록 졸기 링크]]] * 현손자: 김이안(金履安, 1722 ~ 1791)[* 호는 삼산재(三山齋),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진사시 급제만 하고 부친 아래에서 가학을 계승하여 학문으로 이름이 높아 [[김장생]]-[[김집]] 부자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실학에도 관심을 보이기는 했으나 예설과 역학에 조예가 깊은 전통적인 성리학자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홍대용, 박제가, 박윤원, 이직보, 오윤상 등과 교유하였다. 1762년 학행으로 천거받아 경연관에 기용되기도 했고, 충주목사, 지평, 보덕, 찬선, 좨주를 역임했다. 정조가 그를 등용하려고 내린 글도 홍재전서에 남아있다. 그의 초상이 남아있는데 보물 1500호이다.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VdkVgwKey=12,15000000,11|문화재청 링크]],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1505027_003|실록 졸기 링크]], 증손자 [[김병운]](金炳雲, 1814 ~ 1877)은 문과 급제 후 대사헌, 이조판서에 오른다. 시호는 문정(文靖).] * 현손자: 김이직(金履直, 1728 ~ 1805) * 내손자: 김인순(金麟淳, 1764 ~ 1811)[* 김이장의 셋째 아들로 김원행의 둘째아들인 김이직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음직으로 거창부사까지 오른다. 아들 김수근(金洙根, 1798 ~ 1854), 김문근이 있다. 김문근은 김인순의 형 김이순의 양자로 입적된다. 김수근은 1834년 문과 급제 후 대사성, 공조판서, 대사헌,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김수근의 아들이 [[김병학]], [[김병국]]이다.] * 삼남: [[김창흡]](金昌翕, 1653 ~ 1722) * 손자: 김양겸(金養謙, 1675 ~ 1728) * 증손자: 김범행(金範行, 1706 ~ 1764) * 현손자: 김이현(金履鉉, 1726 ~ 1794) * 내손자: 김달순(金達淳, 1760 ~ 1806)[* 문과 급제 후 이조판서, 우의정. 시파였던 대부분의 문중 사람들과는 달리 벽파에서 활동했다. 벽파의 수장으로 1805년 정순왕후 사후 김조순의 섭정에 반기를 들었다. 그를 외척으로 규정하고 공격하였으나, 김조순은 자신의 수족같은 이들(이우, 박하원, 홍지섭)도 내치며 김달순도 함께 처리하여 순조의 명으로 결국 사사된다. 훗날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 현손자: 김이계(金履銈, 1736 ~ 1785) * 내손자: 김근순(金近淳, 1772 ~ 1820)[* 1794년 문과 장원 급제. 대사성, 부제학.] * 현손자: 김이수(金履鏽, 1747 ~ 1822) * 내손자: 김매순(金邁淳, 1776 ~ 1840)[* 호는 대산(臺山). 문과 급제 후 예조참판에 이른다.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사촌형 김달순의 옥사에 연루되어 20년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문집에 포함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는 한양의 연중행사 약 80여 개를 기록해두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 손자: 김치겸(金致謙, 1677 ~ 1747)[* 삼연의 차남으로 당숙 김창국(金昌國, 1644 ~ 1717, 김수증의 장남)의 양자로 출계되었다.] * 증손자: 김문행(金文行, 1701 ~ 1754)[* 1746년 문과 급제 후 좌승지, 대사간에 이르렀다. 황윤석이 김문행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는데, 김원행을 추천하여 그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김문행의 증손자 김영근(金英根, 1805 ~ 1885)도 문과 급제하였다. 이조참의 역임.] * 손자: 김후겸(金厚謙, 1687 ~ 1727)[* 삼연의 막내 동생 김창립이 18세로 요절하는 바람에 딸 1명 외에는 후사가 없어, 3남 김후겸을 양자로 삼아주어 김창립의 대를 잇게 했다.] * 증손자: 김간행(金簡行, 1710 ~ 1762)[* 김후겸도 후사가 없어 김후겸의 큰 형 김양겸(김창흡의 장자)의 둘째 아들 김간행이 출계되었다.] * 현손자: 김이석(金履錫, 1748 ~ 1814)[* 진사시 급제 후 나주 목사를 지냈다.] * 내손자: 김학순(金學淳, 1767 ~ 1845)[* 호는 화서(華棲). 1805년 증광시 장원, 전시 병과 급제. 순천부사를 거쳐 도승지, 공조, 형조, 이조판서 역임.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학순의 손자 김병주(金炳疇, 1819 ~ 1853)는 순조의 딸 복온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된다(昌寧尉; 창녕위). 김병주의 손자인 김석진(金奭鎭, 1843 ~ 1910) 은 1867년 문과 급제하였고 영의정까지 역임하였으나, 을사조약에 통분하여 벼슬에서 물러난다. 한일합방 후 일본이 내린 남작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하고 아편으로 음독 자결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 창녕위궁 재사]] 참조.] * 사남: [[김창업]](金昌業, 1658 ~ 1721) * 손자: 김우겸(金祐謙, 1676 ~ 1709) * 증손자: 김유행(金由行, 1706 ~ 1760) * 현손자: 김이익(金履翼, 1743 ~ 1830)[* 1785년 문과 장원 급제 후 대사성, 대사간, 공조, 병조, 형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역임한다. 시호는 간헌(簡獻)이다. ] * 손자: 김언겸(金彦謙, 1686 ~ 1738) * 증손자: 김제행(金悌行, 1724 ~ 1787)[* 문과 급제 후 우승지, 동래부사를 지냈는데, 1776년 홍인한과 같은 패로 몰려 파직당하여 유배된다.] * 손자: 김신겸(金信謙, 1693 ~ 1738)[* 자는 존보(尊甫), 호는 증소(橧巢),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숙부 김창흡, 김창즙의 제자이고, [[이이명]]의 사위이다. 1721년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1722년 신임옥사가 발생하여 백부 [[김창집]]과 장인 [[이이명]]이 사사되었다. 백부가 사사될 때 임종을 지켰다. 이후 연좌되어 유배되었고, 1725년 유배에서 풀렸으나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강원도 영월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을 하였으며 안동 김씨의 의리학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경학과 시문에 뛰어났고 기행문도 많이 남겼다. 민우수, 유숙기, 이봉상 등과 함께 당대 노론의 학맥을 이었다. 김창흡을 가장 오래 모시며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김창흡이 임종시 자신의 행장을 작성하도록 명한다. 민우수는 김창흡의 의발이 그에게 전해졌다고 평했으며 주변에서 바라본 사실상의 수제자이다. '百六哀吟(백육애음)'을 지어 가문에 남겼고 김창집과 함께 유배되었을 때 그리고 그의 사후에 지어나간 작품이다. 가문 사람(김수증, 김수항, 부친과 삼촌인 육창, 김제겸 등), 가문과 관련 있는 사람들(민우수, 유척기, 이건명, 권상하 등) 과 주변 사람들(승려, 노비, 부친 김창업이 청에서 만난 중국인 등) 각각에 대해 시 106수를 지어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전성건, 선덕(先德)과 조훈(祖訓)의 기억-안동 김문의 가사(家史) 계승을 중심으로, 2012 참조). 김창흡의 행장은 김신겸이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아들인 김양행이 이어서 작성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집 '증소집(橧巢集)'이 전한다. 김신겸의 행장은 민우수가 작성했다.] * 증손자: 김양행(金亮行, 1715 ~ 1779)[* 호는 지암(止菴),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부친 김신겸이 민우수와 금란지교였고, 김양행의 딸(=김신겸의 손녀)이 민우수의 손자인 민이현과 혼인하며 인척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낙론은 김원행과 민우수 학맥으로 분화했는데, 김양행은 민우수와 김종후의 학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공정한 인물로 평가되었다(참고: 조성산, 18세기 洛論系 學脈의 변모양상 연구). 뛰어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아 정조가 꾸준히 불렀으며[[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584A_0370_010_0020&solrQ=query%E2%80%A0%EA%B9%80%EC%96%91%ED%96%89$solr_sortField%E2%80%A0$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GS$solr_toalCount%E2%80%A023$solr_curPos%E2%80%A02$solr_solrId%E2%80%A0GS_ITKC_BT_0584A_0370_010_0020|정조의 편지]], 이조참의, 형조참판을 역임했다. 이우신(李友信, 1762 ~ 1822), 민우수의 증손자 민치복(閔致福, 1766 ~ 1814), 박준원(朴準源, 1739 ~ 1807)이 제자이다. 정조가 여주 행궁에 나아갔을 때 일부러 불러 보았던 기록도 보인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308006_001|링크]] 친척 형인 미호 김원행, 녹문 임성주 등과 친하였고 그들과의 서한도 전한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519A_0050_010_0200|김원행의 서한]][[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532A_0250_010_0120&solrQ=query%E2%80%A0%EA%B9%80%EC%96%91%ED%96%89$solr_sortField%E2%80%A0$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GS$solr_toalCount%E2%80%A023$solr_curPos%E2%80%A01$solr_solrId%E2%80%A0GS_ITKC_BT_0532A_0250_010_0120|임성주의 제문]] 그의 손자인 김건순이 강이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을 때 보고를 들은 정조는 "김건순은 참판 김양행의 손자라고 한다. 내 일찍이 작고한 참판에게는 잊지 못할 일이 있는데 어찌 그 손자 하나를 돌보아주지 못하겠는가." 라며 김건순을 석방시켜 주었던 바 있다. 그러나 훗날 신유박해가 일어나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va_10311023_002|실록 졸기 링크]].] * 현손자: 김이구(金履九, 1746 ~ 1812) * 내손자: 김직순(金直淳, 1765 ~ 1812)[* 호는 실암(實庵)이다. 1796년(정조 20년) 당시 우의정이던 윤시동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 사헌부 지평, 집의를 지냈다. 천거할 때도 사직하려고 할 때도 김양행의 손자라는 언급이 꼭 들어간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IT#/dir/node?dataId=ITKC_IT_W0_A09_01A_24A_0006A&solrQ=query%E2%80%A0%EA%B9%80%EC%96%91%ED%96%89$solr_sortField%E2%80%A0$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IT_AA$solr_toalCount%E2%80%A0163$solr_curPos%E2%80%A0162$solr_solrId%E2%80%A0BD_ITKC_IT_W0_A09_01A_24A_0006A|일성록 링크]]] * 내손자: 김건순(金建淳, 1776 ~ 1801)[* [[신유박해]] 때 순교한 그 사람이다.] * 손자: 김윤겸(金允謙, 1711 ~ 1775)[* 김창업의 서자. 아버지처럼 그림을 잘 그렸으며, 정선(鄭敾)이 이룬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을 이어받아 강희언(姜熙彦), 김응환(金應煥) 등과 함께 정선파(鄭敾派)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정선이나 정선파 화가들의 경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화풍을 갖춘 화가로 평가된다.] * 증손자: 김용행(金龍行, 1753 ~ 1838)[*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직접 서화를 지도받아 나중에는 "서화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고, 고상하고 예스러운 분위기가 나서 우리나라 화가들의 비루한 습관을 떨쳐버렸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초정(楚亭) 박제가, 청장관(靑莊館) 이덕무, 영재(泠齋) 유득공과 매우 친했다고 한다.] * 손녀[* 김창협의 제자인 [[조문명]]과 혼인하였다. 조문명은 처가와 달리 소론계였으며, 영조의 탕평책에 호응한 탕평파의 영수였다. 안동 김씨 사후 조문명은 전주 이씨와 재혼하였고, 그 사이에서 출생한 딸이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비 [[효순왕후]]이다.] * 오남: [[김창즙]](金昌楫, 1662 ~ 1713) * 손자: 김용겸(金用謙, 1702 ~ 1789)[* 호는 효효재(嘐嘐齋)이다. 포음의 늦둥이 아들로 12세에 포음이 사망하면서 친한 같은 가문 사람이자(김상용의 고손자) 김창협의 문하인 김시보(金時保, 1658 ~1734)에게 교육을 부탁했다. 20세(1721년)에 백부 김창집 사사시 전주에 유배된다. 당시 살려는 의지 없이 마치 상주처럼 지냈다고 하며 소론 가문인 청송 심씨 부인과는 대화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24세(1725년)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고 출사를 포기하고 학문에 집중한다. 1726년 부친의 문집 '포음집(圃陰集)', 1727년 '안동김씨족보'의 간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나서, 이재와 박필주 문하에서 학문에 집중한다. 도봉서원에서 이의철, 이규신, 권진응과 함께 강학을 맡았고 '따르는 자가 구름같았다'고 할 정도로 명성을 얻는다. 1740년(영조 16년)의 경신처분으로 가문이 신원되었고, 그의 교유의 폭은 점점 넓어졌다. 44세(1745년)에 처음 천거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고, 47세(1748년)에 음서로 선공감 감역으로 뒤늦게 관직에 오른다. 그러다가 정조의 눈에 들어 공조참판, 승지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른다. 음률, 예학에 밝았으며 북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홍대용, 박지원과도 나이를 넘어서서 친했다고 한다. 첫 관직에서는 책임자던 소론의 [[이종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며 파직된 바도 있다. 그러나 점점 도량이 넓어지며 인생 후반기의 김용겸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김원행(김용겸이 당숙이다.)의 제자이기도 한 27세 연하인 황윤석과의 교우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당시 김용겸은 장동 김씨 집안의 좌장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지방 사족으로 한양에 올라와(1766년 38세에 음직으로 참봉을 제수받아 근무하고, 1768년에 의영고 봉사(義盈庫 奉事)가 되어 한양 생활을 시작한다.) 말직에 머무르던 황윤석이 '씨족원류'라는 책을 빌려달라며 느닷없이 찾아왔다고 한다. 김용겸이 처음에는 떨떠름했으나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알아보았고 나들이도 함께 가기로 약속한다. 이후에는 책을 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인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도 많이 해주었다. 황윤석의 학문 발전에 가장 지속적이고 우호적인 도움을 주었고 관료생활에서의 어려움에도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참조: 이지양,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 1768년~1771년까지의 한양 생활을 중심으로 -) 실록에 언급된대로 송덕상에 대한 평을 정조에게 가차 없이 하여 주변에서 놀랐던 바가 있다. 송덕상은 다름 아닌 최강 권신 홍국영이 추천했던 사람이었다. 김용겸의 삶에 대해 잘 정리된 논문이 PDF 로도 있으니 참조해도 좋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02684|논문 링크]][[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02009_001|실록 졸기 링크]]][* 참고 문헌 - 이경구, 곤경에서 곤혹으로: 18세기 중반~19세기 초반 낙론 학자들의 딜레마, 2020] * 육남: 김창립(金昌立, 1666 ~ 1683)[* 호는 택재(澤齋)이다. 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김상헌과 함께 척화파였던 이경여의 손녀(이민서의 딸)와 결혼하였다. 이민서와 김수항은 친밀하였고, 이민서의 아들은 이관명(좌의정 역임. 이관명의 아들인 이망지는 김창즙의 딸과 혼인하였다.), 김창집과 함께 노론 4대신이었던 [[이건명(조선)|이건명]]이다. 김창립은 택재제라는 서실을 짓고 공부했는데 거기에서 호를 땄다. 18세에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마마 감염이 원인이었다. 당시 한양에 마마가 창궐하였고, 임금 숙종도 마마에 걸렸었다. 김창립은 숙종의 모친 명성대비의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거기에서 마마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 김창흡에게 배웠고 빼어난 재주로 가문의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사망 다음해에 같이 김창흡의 제자로 절친했던 홍유인의 주도로 정리된 유고를 김창흡이 산정하여 남겼던 시를 묶은 유고문집 '택재유타(澤齋遺唾)'가 간행되었다 (처음 정리되었을 때의 이름은 '택재고(택재가 남긴 글)'였는데 '택재유타(택재가 남긴 침방울)'로 변경되었다. 간절함과 시를 모두 싣지 못한 아쉬움도 들어있는 이름이다.). 홍유인은 김수항의 큰 형인 김수증의 외손자이다. 이 작은 책의 서문과 발문에 참여한 자들이 엄청난데 서문은 [[김석주]], 발문은 부친인 김수항, 형 김창흡 외에 [[송시열]], [[김만중]], 남용익이 작성하였다. 부친 김수항의 영향력을 볼 수 있는 일례이다. 김수항의 슬픔은 특히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행장도 직접 작성하였고(보통 자손이나 지인 중 문장력 있는 자가 작성한다), 여러 글도 남겼다. 훗날 본인이 사사 당하기 전에도 김창협에게 명하여 김창립의 묘지명을 짓게 한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B&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435A_0280_010_0090|묘지명 링크]], 아들이 없어 김창흡의 3남 김후겸이 김창립의 양자로 입적된다. - 김순희, 택재 김창립의 택재유타에 관한 연구, 2011 참조] 김수항의 여섯 아들인 육창의 재능으로 안동 김씨는 힘을 불려 나갔다. 특히 김수항의 차남과 삼남인 [[김창협]], [[김창흡]]을 필두로 사남 [[김창업]], 오남 [[김창즙]]이 힘을 보탠 학문과 시문에서 안동 김씨의 위상은 김신겸, 김용겸, 김원행, 김양행, 김이안, 김매순으로 이어져 나갔으며, 정승을 역임한 장남 [[김창집]]과 김이소, 김달순 그리고 [[김조순]]과 그의 후예들의 세도정치로 이어지며 정계에서도 정점을 찍었다. [[정조(조선)|정조]]는 1785년 [[일득록]]에서 육창을 포함한 안동 김씨 집안을 이렇게 평가했던 바 있다.[* 결국 정조 본인의 탕평책을 파기하는 선택을 하면서까지 김조순을 순조의 후견인으로 낙점한다.] > “淸陰 金尙憲의 바른 道學과 높은 節義는 우리나라에서 존경할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도 敬服하는 바이니, 문장은 나머지의 일일 따름이다. 내가 그를 말할 때에 故相이라고 하지 않고 先正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날 致祭文에서 '그의 문장은 韓愈와 曾鞏이요, 그의 학문은 濂洛이라'고 한 것은 道學과 文章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동해의 물과 西山의 고사리, 잔 들어 제향하니 맑은 모습 이와 같도다'라고 한 것은 節義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仙源文集 이 비록 몇 편에 지나지 않지만 형제(김상용・김상헌)의 雙節은 옛날에도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文谷(김수항)이 조부에게 부끄럽지 않고, 退憂(김수흥)가 자기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으며, 夢窩(김창집)의 忠節과 農淵(김창협・김창흡)의 經術文章에다, 老圃澤(김창업・김창즙・김창립)이 나란히 훌륭한 명성을 날렸으니, 참으로 전후에 드문 名閥이다.” >[* 김태희,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 2015,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