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재순 (문단 편집) == 생애 == 1926년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토성리에서 태어났다. [[주기철]]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조만식]] 장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광복 직후 [[평양 신사]]를 불태웠으나, 조만식의 "네가 할 일은 신사를 태우는 게 아니라 공부에 전념하는 것"라는 조언에 월남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주요한]]의 선거 사무장을 지냈으며, 민주당 선전차장으로 [[제3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 '못 살겠다 갈아보자' 구호 선정에 참여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양구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최규옥]]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양구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김영삼, [[박준규(1925)|박준규]] 등과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다. 같은 해 말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1960년)|신민당]]에 몸담았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후 [[박정희]]가 실권을 잡으면서 박준규 등과 함께 여당인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제6대, 7대,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철원군]]-[[화천군]]-양구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0년에는 교양지인 [[잡지|월간지]] <[[샘터]]>를 창간하였다.[* 2020년에 창간 50주년 및 500호 발행을 기록했다. 현재 그의 아들 김성구 씨가 발행인을 맡고 있다.] 당시 잡지는 벗겨야(...)한다는 한 업계 관계자의 조언에 "댁은 벗기시오. 나는 입히겠습니다"라고 했다고. [[3선 개헌]]을 마지막 출마라는 다짐을 받고 적극 추진하였으며, 1971년 민주공화당 원내총무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0.2 항명 파동]] 당시 항명을 제대로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원내총무직에서 사퇴하여야 했다. 개인 증언 따르면 [[10월 유신]] 당시에 사전 통보를 받지 못해 '박정희 그릇이 그것 밖에 안되냐'며 일갈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증언들은 후일 샘터를 통해 나온 증언이므로 어느정도는 에누리하고 들어야 한다. 본인이 '평안도 기질'이 있다고 하고 덧붙였으니 분명 직언하는 스타일은 분명했다고 봐야한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유신정우회]] 제1기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춘천시]]-춘성군-철원군-화천군-양구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공화당 [[손승덕]] 후보와 [[신민당(1967년)|신민당]] [[김준섭(1923)|김준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정치규제를 당하지 않았음에도 정치를 잠시 멀리하고 월간지 샘터 발행에 전념하였다.[* 샘터사의 대표 김성구 씨가 김재순의 아들이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철원군-화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제13대 국회 전반기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6051800344_0.jpg|width=100%]] || || '''{{{#c39335,#ca993b 김재순 국회의장}}}''' || 그러나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재산 공개 과정에서 축소 공개 등이 논란이 되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 때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기면서 배신감을 나타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재순은 민자당 내 [[민정계]] 중에서 드물게 김영삼을 지지하고 동료 민정계 의원들의 욕을 들으면서까지 변호해 주었다. 재산 공개 과정 당시 청와대에서 문제 삼은 것 중 하나가 하남에 있던 별장이었는데 알고보니 그 별장은 김영삼도 놀러갔던 곳이었다(...).] 이후, 1994년부터 2002년 3월까지 서울대 총동창회장을 역임하였다. 2016년 5월 17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철원에서 4선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 가장 자랑스러워한 업적은 토교 저수지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