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주성(축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고등학생 시절에는 고교 상비군에 이름을 올렸지만 당시만 해도 쓸만한 선수정도로 평가받았지 대단한 유망주는 아니었다. 서울 지역의 명문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으나 다른 축구부 동료 4명을 같이 받아주는 조건으로 [[조선대학교]]를 선택한 의리파. 당시 조선대 학생들 사이에서 김주성은 교내에 있는 돌계단을 공을 차면서 하루에 수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하던 미친놈으로 유명했다. 축구부 학생인건 알았지만 누군지는 몰랐던 무명 시절의 이야기. 결국 김주성이 스타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야 학생들은 그제서야 그때 그 학생인 걸 알았다고. [[1980년대]] 후반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그때 생긴 별명이 아시아의 '''[[삼손]],''' '''야생마.''' 김주성은 1986년 올림픽대표팀과 월드컵대표팀 간의 친선경기에서 올림픽대표팀 에이스로서 맹활약하며 월드컵대표팀을 2:1로 무너뜨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어 축구 팬들을 경악케 했다. 이후 차범근, 최순호, 허정무, 조광래, 박경훈 등 한국 역대급 선수진들이 가득한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되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3경기 선발 출장 2경기 풀타임을 소화하였는데 그 당시 나이가 22살이었다. (주민등록상 나이는 20살) 이청용이 22살의 나이로 2010년 월드컵에서 4선발 1풀타임을 소화하며 한국 축구의 차기 에이스로 인정 받았던 것을 고려하면 김주성 또한 실로 대단한 재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김주성은 아시아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했다. [[1988년 AFC 아시안컵]]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우승을 내줬음에도 대회 MVP는 김주성의 몫이었다. 그리고 1990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우리나라가 11전 9승 2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아시아 예선 우승으로[* 준우승 진출은 UAE] 90월드컵 24강 본선 진출권을 따냈고 팀의 에이스였던 김주성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103000329210008&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10-30&officeId=00032&pageNo=10&printNo=13567&publishType=00020#|예선 MVP]]로 선정되었다. 현재도 아시아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라 평가 받는 사우디의 레전드 [[마제드 압둘라]]는 동시대의 김주성에게 평가가 밀려 정작 당대 아시아 최고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이러한 높은 위상 속에서 김주성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24개국 본선]에 출전했다. 우리나라의 기대는 물론이고 유럽 클럽과 외신들까지 아시아 최고라 평가 받는 김주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 무대와 아시아 무대의 수준 차이는 컸다. 결국 3전패 22등으로 탈락했다. 월드컵 이전까지 한국의 에이스라 평가 받은 그는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61900329211003&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0-06-19&officeId=00032&pageNo=11&printNo=13763&publishType=00020|"리틀 삼손이 아닌 리틀맨", "오히려 명단에서 빼는 게 낫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부진했고 유럽 클럽들도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후 김주성은 동아시아 대회인 다이너스티컵을 우승하며 월드컵에서의 실패를 달랬다. 그래도 2년 뒤인 1992년 여름에 그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VfL 보훔]]에 임대 계약으로 입단하며 유럽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드리블의 위력이 약해진 탓인지 첫 시즌에 부진했고 팀의 강등을 막지 못했다. 2부 리그에서도 보훔은 우승을 차지하며 승격에 성공한 반면, 그의 활약은 평범했다. 독일의 대표적인 축구 매체 [[Kicker]]에서 매긴 [[https://www.kicker.de/joo-sung-kim/spieler/2-bundesliga/1993-94/vfl-bochum|그의 시즌 평점은 3.40이었다.]] Kicker는 1부터 5까지 평점을 매기며 숫자가 낮을 수록 평가가 높음을 의미한다.[* 보통 KIcker의 선수 평점을 보면 2점대 중반이 MVP 수준, 그 이상부터 3점대 초반까지가 탑 클래스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독일 2부 리그에서 3년 간 활약했던 [[이재성]]의 평점은 [[https://www.kicker.de/jae-sung-lee/spieler/2-bundesliga/2020-21/holstein-kiel|3.40, 3.08, 3.12]]였다. 첫 시즌을 제외한 2년 동안 리그 탑클래스로 인정받고 분데스리가로 진출한 그를 볼 때 3점대 초반의 평가는 받아야 1부 리그에서 뛸 만한 활약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8090028911300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8-09&officeId=00028&pageNo=13&printNo=1976&publishType=00010|시즌 중에 부상이 있었고,]] 가능성을 보았는지 보훔은 그와 계약을 연장할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어려움에 빠져있던 대우 로얄즈의 강력한 복귀 요청에 김주성은 2년 만에 다시 K리그에 복귀한다. 김주성은 [[1994 FIFA 월드컵 미국]][* 24개국 본선]에도 출전했다. 팬들은 전성기 머리를 휘날리며 필드를 달리던 '야생마' 김주성을 기대했지만, 전성기 때의 공격적인 롤이 아닌 공격형 미드필더로 주로 뛰었다. 참고로 이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머리도 잘랐다. 대표팀의 플레이메이커로 나서 여러 차례 찬스를 만들었으며 독일전에서 [[레인보우 플릭]]으로 [[슈테판 에펜베르크]]를 상대로 볼 키핑하는 등 중원을 누비며 활약했다. 이후 돌아와 다시 친정팀인 [[대우 로얄즈]]에서 뛰었다. 공격수였던 그는 인대 파열을 확진 받은 이후 주로 스위퍼로 뛰었다. 국가대표로 다시 뽑힐 정도로 완벽하게 포지션 변화에 성공하였고 1997년 부산에서 맹활약하며 '''수비수 부문으로 리그 MVP'''를 수상한다. [[유상철]]과 함께 '''[[K리그]] 역사상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베스트 일레븐을 수상'''한 단 둘 뿐인 선수이며 K리그 역사상 단 6명 있는 수비수 MVP 중 5번째 수상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