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시리야 (문단 편집) == 역사 == [[아마라]], [[라마디]]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오스만 제국]] 시기에 세워진 도시로, 1872년 현지 문타피크 부족의 셰이크 나시르 앗 사둔 파샤가 건립하였다. 설립과 함께 나시리야는 문타파크 산작의 치소가 되었고, 나시르 앗 사둔 파샤는 그 산작베이 (총독)가 되었다. 후자의 아들 사둔 파샤 역시 나시리야의 무타사리프 (징세관)을 역임하였고,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집권 전까지 사실상 이라크 남부의 통치를 맡았다. 그 무렵 나시리야에선 가죽, 곡물, 버터가 생산되었고 6백개의 석조 주택과 더 많은 진흙 벽돌 건물이 있었다. 또한 무역의 활성화로 350개의 상점과 5개의 칸 (여관)이 있었다. 도시는 비옥한 농지와 [[대추야자]]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다른 주요 도시들과 성벽이 둘러지지는 않았다. [[1차 대전]] 중인 1915년 7월, 영국군은 4백의 전사자를 내며 도시를 점령하였다. 1920년경 나시리야에는 6천 5백의 주민이 거주하였고, 특이하게도 아랍 무슬림 외의 인구가 적지 않았다. 10%의 [[만다야교]]도, 8%의 [[유대교]]도, 5%의 [[페르시아인]], 4%의 [[루르인]], 소수의 튀르크인과 기독교도 등이 거주하였다 한다. 1930년대에는 유수프 살만 유수프 (파흐드)의 주도 하에 이라크 공산당의 첫 지부가 세워졌고, 50년대에 [[바트당]]을 세우는 푸아드 알 리카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초기 바트당은 나시리야 출신이 다수였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다국적군의 이라크 진격에 있어 나시리야는 그 최북단 점령지였다. 그해 3월에 미군이 철수하자 현지 쉬아 주민들이 반정부 봉기를 일으켰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며 잔혹히 진압되었다. 2003년 봄 [[이라크 전쟁]] 시에 나시리야는 대도시 외의 도시들 중 미군에 가장 격렬히 저항한 곳 중 하나였다. 10여일간 이어진 전투 끝에 미군은 바그다드 점령 시와 비슷한 34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이라크군은 4백여명이 전사하였다. 그해 11월 폭탄 테러로 30여명이 사망하였다. 2017년 9월 재차 테러가 터져 83명이 사망하였다. 이라크전 당시 한국군이 주둔하였고, 2020년에는 서희부대가 배치되기도 하였다. 2019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유전 시설을 장악하였고, 2022년 봄에도 밀값 폭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분류:이라크의 도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