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태섭 (문단 편집) === 초년기 === 나태섭은 1901년 12월 16일 황해도 안악군 문산면 원성리에서 부친 나관혁, 모친 김관옥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는 왕중량(王仲良)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해서, 본명보다도 왕중량으로 잘 알려졌다. 그의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중동학교에 입학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그는 1920년 3월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사이 [[3.1 운동]]에 참가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후 고향인 안악군의 봉심학교(奉三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기관인 대한적십자사의 부회장 [[안정근]](安定根)의 지시를 받고 고향 선배인 [[최익형(독립운동가)|최익형]]과 함께 매화동과 안악, 신천, 재령, 사리원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또 [[고시복]], 김상직, 권영선[*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권영선]]과 동명이인이다.], 최한병 등의 동지를 규합했다. 그러던 중 최익형이 일본 경찰에게 붙들리면서 나태섭의 행적이 노출되었다. 이에 그는 타지에서 장사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집안의 재산 일부를 정리한 후 봉삼학교에서의 교육과 독립운동 자금의 지속적인 모금을 고시복 등에게 부탁한 뒤 1923년경 원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원산에서도 일제 경찰의 추적이 계속되자, 결국 그는 1927년 5월 경 상하이로 망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