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태섭 (문단 편집) === 중국에서의 활동 === 나태섭이 1927년 7월 상하이에 도착한 뒤 1934년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미해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 독립운동 단체나 상하이 한국독립당과 관련있는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934년 2월 경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만에 입교했고, 거기서 [[이범석]], 조경한(趙擎韓), 윤경천(尹敬天), 한헌(韓憲) 등 교관들에게 각종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나태섭은 1934년 8월 한인특별반을 중도에 그만뒀다. 한인특별반 운영을 총괄하는 김구와 교육과 훈련을 주관하는 [[지청천]] 사이에 발생한 불화로 인해 김구가 한인특별반 입교생 중 자신의 휘하에 있는 인물 25명을 난징으로 철수시켰기 때문이다. 이후 나태섭은 김구의 주선에 따라 학생 13명과 함께 난징의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학하여 중국의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육군기계화교경학교(陸軍機械化交輕學校) 수업도 이수했다. 또한 나태섭은 1934년 12월에 조직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 결성식에 참여하여 제1대장으로 선임되었다. 한국특무대독립군은 김구의 지도력을 절대 옹호하고 철저한 복종을 규율화함으로써 김구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하는 사조직 성격이 강한 특무활동기구였다. 그는 특무대독립군의 결성식에 참여하여 "본인은 특무대에 가명하여 김구 선생님의 지도와 명령에 절대복종하며 본 대의 규칙을 엄수할 것을 자에 서약함"이라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하고, 특무대의 참모인 안공근에 의해 제1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 6월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서 보병과를 졸업한 나태섭은 같은해 11월 10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지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보궐 선출되었다. 이에 앞서 제 29회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새롭게 당선된 의원들에 대해 심사가 진행되었는데, 나태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왕중량(王仲良), 나이 37세, 직업 학업, 학식 군교필업, 경력 모지군교를 졸업하고 군사연구를 더욱 하는 중이며 청년계의 신망이 유함. 그러나 나태섭은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1939년 10월 3일에 개회된 제31회 임시의정원 의회까지는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중국군과 전투 진행지역에서의 일본군의 각종 배치현황 등 정보 수집이나 임시정부의 항일특무공작원의 모집과 같은 별도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한국국민당의 산하단체로 결성된 한국국민당청년단의 단장을 맡아 임시정부 주변의 각 독립운동 단체의 단원들에 대한 보호 및 대일정보 수집, 동지 규합, 인쇄물 등 선전활동, 친일분자 및 일본인 정보원들에 대한 처단 등 임시정부의 옛 경무국에서 진행하던 일들을 수행했다. 이후 나태섭은 임시정부의 특별 지시에 따라 이하유(李荷有), 조시제(趙時濟) 등의 동지와 함께 광서성으로 파견되어 대일군사 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과 정찰, 초모공작을 위한 기초정보 수집 등의 활동을 수행하면서 고향인 안악으로 사람을 보내 고향 후배인 고시복 등을 중국으로 망명하게 했다. 또한 1937년 말에는 중국 관내 각지를 이동 중인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을 충칭으로 옮기는 일을 중국군과 협의해 중국군의 차량을 지원받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을 충칭으로 옮기는 데 일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