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태섭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 === 1938년 5월 7일, 중국 창사의 조선혁명단 본부인 남목청에서 개최된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포회의에서 조선혁명당의 이운한(李雲煥)이 난입해 권총을 발사하여 [[김구]], [[유동열]], [[현익철]], [[지청천]] 등 지도자들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 벌어졌다.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고 김구와 유동열은 중상을 입고 상아의원으로 후송되었으며, 현익철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운한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이었다가 분란을 일으켜 당에서 제적당하자 앙갚음하려고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후 나태섭은 1938년 7월 1일 현익철을 대신해 군사위원회 군사위원 겸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39년 10월 1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군사특파원으로 선임되었다. 군사특파원은 1938년 7월에 구성된 군사위원회의 위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주임 조성환은 1939년 당시 군사부장으로써 군사위원회의 책임자였고, 나태섭과 함께 군사특파원으로 선출된 이웅(이준식)과 [[황학수(독립운동가)|황학수]] 역시 군사위원회의 위원들이었다. 이후 나태섭은 조성환, 황학수, 이웅(이준식), [[노복선]](盧福善), 서파(徐波) 등으로 구성된 군사특파단의 일원으로 시안을 향해 출발했다. 군사특파단 일행은 10월 하순 시안에 도착한 뒤 먼저 시안성 안의 통제방(通濟坊)에 판사처, 즉 사무실을 설치했다. 임시정부에서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한국인 장교들에게 한국광복군으로 참여할 것을 명령하였고, 중국군을 제대한 인원들을 군사특파단에 참여시켰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외무장 조소앙의 차남인 조인제(趙仁濟)와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 [[노백린]]의 차남 [[노태준]](盧泰俊),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춘생(安椿生) 등이 군사특파단에 참여했다. 이밖에도 현지에서 이석화(李錫華)와 김자동(金紫東) 등이 군사특파단에 참여했다. 군사특파단의 주요임무는 시안에 군사거점을 확보하고 화북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과 한국광복군으로 모집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나태섭은 1940년 11월까지 시안에서 군사특파단 단원으로서 활동하다가 1940년 11월 시안에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시안판사처가 설치되면서 끝마쳤다. 단장 조성환은 한국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된 지청천의 후임으로 군무부장에 선임되었고, 나머지 단원들은 서안총사령부의 간부로서의 활동을 계속했다. 나태섭은 1940년 8월 10일에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황학시, 조시원과 함께 총사령부 참모로 임명되었으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시안판사처의 부관조(副官組)의 부관으로도 활동을 지속했다. 또 제2지대가 편제되었을 때 고시복, 지달수(池達洙), 유해준(兪海濬), 이욕해(李慾海) 등과 함께 제2지대 창설 간부로 선임되었다. 1941년 2월엔 지대장 [[고운기]], 지달수, 유해준과 함께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로 진출하여 모병 및 선전활동을 전개했으며, 뒤이어 중국군 제12전구 사령장관 부작의(傅作義)의 예하 각 부대와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받으며 수원성 포두를 중심으로 하북성(河北省)의 북평(北平), 천진(天津), 당산(唐山)지역과 장가구(張家口)에 이르는 지역에서 선전 및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현지에서 모집한 한인 청년 중 한 명이 일본군에 투항하는 불상사가 벌어져 유해준이 일본군에게 붙잡히자, 나태섭 등은 시안으로 철수했다. 그 후 1942년 12월 24일에 고시복, 이지일(李志一), 조지영(趙志英)과 함께 군무부의 부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이어 1943년 3월 30일에는 군무부 총무과 과장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에서 군사활동의 실제적인 일들을 추진했다. 1944년 2월 8일, 나태섭은 군무부 산하의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임명되었다. 군사학편찬위원회는 한국광복군의 훈련 등과 관련된 각종 군사학 서적을 편찬하거나 저술하는 일, 또한 각종 군사법규를 기초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1944년 6월 1일에 생활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중일전쟁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충칭에 모여든 독립운동자들과 그 가족의 생계 유지 및 전시 하에서의 식량의 통제, 보건, 아동 교육 등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맡아 임시정부 요인과 독립운동자들, 그리고 그 가족의 생활을 보존하는 막중한 업무를 담당했다. 나태섭은 1945년 7월 1일부터 개최된 한국독립당 제4차 전당대회에서 황학수, 이상만, 이복원, 민필호 등과 함께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고, 7월 16일에 열린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민필호와 함께 상무감찰위원으로 선임되어 광복을 앞두고 한국독립당의 각종 활동을 감찰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