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도부 (문단 편집) === 광복 후 정국 === 감격의 해방이 오자, 함양군으로 들어가 일제에게 충성을 하던 순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자치적으로 군수와 경찰서장을 선정하는 것을 돕는다. 이후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서 함양을 접수하러 오는데, 건준은 함양의 자치군수(양지환), 자치경찰서장(박갑수)을 인정하면서 양쪽은 자연스럽게 합쳐진다.(즉 건준 산하의 인민위원회인 셈 쳐주게 된다.) 이후 남도부는 정신적 지도자로 여운형을 추종하게 된다. 하준수는 보광당 출신의 인원 50명 정도로 '조선건군준비위원회'(건군)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된다. 미군정은 함양군에 미 24군단 40사단 예하 약 1개소대 병력의 군정대를 파견한다. 이들의 첫번째 조치는 하준수가 가둬둔 일제 순사들을 석방시켜 주라는 것(...) 일제에 충성을 다하며 하준수등의 징병 대상자를 추적하고, 심지어 교전까지 하던 이들 조선인 순사들은 해방된 조국의 경찰로 재등용 되었다. 그래도 초기에는 하준수의 주오대학 선배인 정범석(이후 건국대 학장 역임)이 통역관을 맡고 있는 덕분에, 미군정대장 루이스 대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스 대위가 하준수 편을 들어 경남도지사(미국인)가 보낸 일제 순사 출신 경찰관들이 함양경찰서를 접수 하는 것을 막았다가 1946년 초 헌병들에게 잡혀가버린다. 이후 일제 순사... 아니 경찰들과 하준수의 관계는 최악이 된다. 이때 [[조선공산당]]도 하준수를 포섭하려고 하는데,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그는 그냥 무시한다. 하여간 남도부도 반대한민국 빨치산 조선인민유격대 인기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독립운동사 인기보다 훨씬 좋은 희한한 현상의 수혜자이다. 1920년대 이래 국내 독립운동을 이끌어 온 조선공산당을 빨치산이 무시하는 게 긍정적인 일처럼 강조되는 걸 보면. 그 후 함양군내 우익 인사였던 장인 이민종의 추천으로 [[이승만]]의 경호대장으로 뽑혀서 서울로 올라갔지만,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친일 인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다. 고향에 내려오니 하준수가 조직하였던 건군은 지리멸렬 하였고 경찰들은 하준수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결국 경찰들에게 시달리다가 1946년 늦여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피신한다.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면서 남로당 측에서는 하준수를 입당시키려고 공작하는데, 하준수가 추종하는 여운형은 3당 합당에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좌우합작 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라, 하준수 역시 입당을 거부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까지도 하준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였고, 그냥 일제시절 자신을 잡아 학병으로 보내려고 했던 일제 순사들을 싫어할 뿐이였다. 그런데 그가 정신적으로 추종하던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암살되자, 남로당에 입당한다. 즉, 하준수는 좌익에게 우호적인 중도좌익쯤 되었는데 중도좌익을 이끄는 여운형의 죽음으로 더이상 무소속으로 버틸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남로당에 합류한 것이다. 이후 남로당 함양군당이 개편되어 군당위원장에는 하준수를 포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리산에 들어온 공산이론가 박우럭이 임명되고, 부위원장에 하준수가 임명된다. 이후 군정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횡포에 많은 청년들이 하준수를 찾아 지리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하준수는 인근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는 무장 투쟁을 하였다. 이때 하준수가 이끄는 부대원들은 1천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만약 그말이 사실이라면 당시 어떤 야산대와도 비교 할 수 없는 대병력이였다. 한편, 이 시기 남로당과는 별개로 북로당에서 남한에 비밀군사단체 '인민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이후 경찰의 일제검거로 폭망하는데, 북로당을 견제하기 위해 남로당에서 경찰에 찔렀다는 설이 있다.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 항목도 참조] 인민혁명군에서 대전 이남의 제2지구를 담당하는 [[이혁기]]는 과거 여운형을 추종하던 자였다. 이혁기는 전북책임자 겸 지리산공작책임자로 오영주를 임명하고, 하준수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후 하준수는 48년 4월 20일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이 회의에서 상당히 공산주의에 동조하게 된다. 남한으로 돌아온 하준수는 5.10 단정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5.7 천왕봉무장봉기'를 일으킨다. 5.10 단정 반대 투쟁 즈음하여 남한 각지의 군당별로 50~100명 가량의 야산대 조직이 꾸려지며 그 활동이 활발해 지는데, 하준수는 이러한 남로당-도당-군당으로 이어지는 조직 밖에 위치해 있었다. 위의 문단에서 나오다 시피 이시기 하준수는 북로당에 가까웠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직전 북한에서 남북조선대표자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남한 대표 1,080명을 황해도 해주로 소집하였다.[* 1,002명만 참가하고 78명은 교통 사정 혹은 월북중 체포로 불참]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는 8월 21일 열렸는데, 육군본부의 <남도부사건기록>과 이를 참조한 듯한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 의하면 하준수는 이 때 월북하여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으나 대의원으로 선출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육군특무부대 특무처장 이진용은 그냥 처음부터 대의원으로 지명된 상태로 하준수가 북한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심지어 하준수가 체포된 이후 그의 재판에 관여했던 대법원 김모 과장은 "남도부를 월북시킨 것은 소련당국이었어요. 인민군 장성으로 임명하기 위해 북으로 소환한 거지요. 남도부는 김일성 보다 먼저 [[레닌훈장]]과 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