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도부 (문단 편집) === 제4지구당 개편 === 하지만 51년 8월 31일자로 로동당이 중앙정치위원회 명의로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당 사업과 조직에 대해서’라는 ‘94호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당시 인편에 의한 전달 수단이 전선의 고착화로 막혀 있어 52년 8월경에야 남도부에게 전해진다. 94호 결정서는 기존의 유격전 만을 위한 지대 개편을, 다시 장기전으로 대비하여 당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지구당으로 개편하라는 것이었다. '미해방 지구에 있어서의 당 사업 조직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제111호 결정서'도 동시에 도착한다. 이에 따라 제3지대(경북도당)와 제5지대(남도부 부대)는 통합하여 제4지구당을 만든다. 이에 위원장으로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 부위원장에 남도부, 정치위원에 남도부 부대 정치위원이였던 안철이 임명된다. 그리고 94호 결정서에 의해 조직지도위원회를 구성해야 하는데 아마도 이상 3명에 경북도당부위원장 이영섭이 추가되어 조직된 것으로 추정된다. 4지구당 산하에는 2~3개 군당이 합쳐져서 소지구당이 되었다. >1소지구당 - 부산시당+동래군당 >2소지구당 - 밀양군당+청도군당 >3소지구당 - 울산군당+경주군당+양산군당 각 소지구당에는 남도부의 유격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즉 기존의 경남도당 조직은 당사업+유격활동을 병행하고, 남도부 부대는 유격활동만 전담하였다. 예를들어 3소지구당은 12명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남도부 산하의 백두흠부대 50명이 배속되었다고 한다. 실록 <남도부>에서는 김진기, 도영호, 홍길동, 백두흠, 성상성, 서상호, 추일, 김진구, 남명근 부대가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북위38도선>에 의하면 실제로는 부대는 3개였고 부대장들이 계속해서 전사하면서 계속해서 위의 인물들이 돌아가며 부대장이 바뀐 것이라 한다. 아마도 남도부 재판 판결문에 부대장들의 이름이 나열된 구절이 있는 것으로 봐서 여기서 인용한 것 같다. 또한 실록 <남도부>에서는 9개 소지구당이 있다고 나오나 정확한 지역가 부대장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여담으로 <신불산>의 주인공 구연철은 울산군당 조직부장이였다가, 조용구가 동부지구당 위원장이 되며 인사개편을 할 때 울산 군당 위원장이 다른 곳으로 가면서 구연철이 군당 위원장이 된다. 그런데 4지구당 개편으로 인해 3소지구당 조직부장이 된다.] 그에반해 <신불산>에서는 7개 소지구당이 있다고 하는등 정확한 편제는 불분명한 감이 있다. 대략 경남도당 동부지구의 소지구당과 남도부 부대의 유격대로 이원화 되었지만, 어느정도 연대 되어있는 조직으로 보인다. 박종근은 이미 사망한 상태라 위원장은 공석이였고 52년 11월에 중앙당에서 남파된 이구형이 임명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구형은 이미 전멸당한 경북도당을 부활시켜 도당 부위원장 자격이였다. 시점이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박종근이 지구당 개편즈음 하여 팔공산 인근에서 유격투쟁하다가 전사한다. 대략 군경의 제1차 대토벌작전이 끝나는 시기인 52년 2월쯤 토벌대에게 포위되었다가 자살 한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내의 자사전인 <이여자 이숙의>에 의하면 52년 3월에 신문을 통해 박종근이 죽었다는 것을 보았고 이때 경찰에게 끌려가 아는걸 불라고 두둘겨 맞았다고 한다. 대충 2월경 전사한 것이 맞을 듯] 공세인 그러자 신불산 사령부에서 열린 제4지구당 조직위원회를 통해 위원장에는 남도부 중장, 부위원장에는 이영섭이 선출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쪽 주장에는 남파된 이구형은 부위원장으로 합류했다고 한다. 웃기는 것은 이영섭 역시 경북도당 부위원장으로 제3지대 정치 부지대장이였다. 즉 경북도당은 전멸당해 실체가 없는데 부위원장만 이영섭과 이구형으로 두명이였다. 자꾸 옥상옥으로 간부들만 추가되고 일선의 전투원들은 급속히 소모되어 갔다. 3개 예하부대중 유일하게 최초의 부대장이 살아있던 울산부대장 홍길동 마져도 52년 가을에 전사한다. 울산부대 정치지도원인 인민군 현역 중위 김광섭이 후임이 되었지만 2달만에 전사하였다. 이로서 청도부대와 울산부대는 사실상 전멸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은 동래 부대 백두흠의 15명 가량 뿐이였다. 그러한 백두흠도 52년 겨울 유천역 철로 폭파 작전을 나갔다가 미군의 무장 열차를 만나 사살 당한다.[* 이에 실록 <남도부>에는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하여 9개 소지구당 체계로 바꾸는데 제4지구당 본부는 신불산에 두고, 제1소지구당 동해경남지구, 제2소지구당 위원장 유응재 경북 청도•밀양•달성지구, 제5소지구당 박근해, 제6소지구당 한영철, 제9소지구당위원장 강신응 영주일대 등을 임명하고 조직부장에 손대수를 선임 되었다고 나온다. 즉 처음 남파될 때의 주요 간부들은 이미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이정도의 병력이 남아 있을까 의심스럽다. <북위38도선>에는 이시기에 다합쳐서 9명 남아있다고 한다. 1인 1지구당 시대인가?] 그런데 남도부는 '94호 결정서'에서 남한 빨치산들을 싸잡아 비난한 것에 대해 분노하여 일종의 파업상태로 아무일도 안하고 있었는데, 그가 위치한 신불산이 임시수도 부산과 가까운 관계로 이승만은 수시로 빨치산이 나타났다며 계엄령을 걸어 야당 탄압 및 정권 연장을 위한 개헌의 수단으로 애용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국사교과서에서도 잘나오는 '부산정치파동'이다. 실제로는 특무부대장인 [[김창룡(군인)|김창룡]]이 대구형무소 중형수, 무기수 7명을 ‘큰 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 주겠다’고 빼내서 52년 5월 24일 공비가 나타났다며 부산 금정동에서 사살 한후, 계엄령을 내린 것이다. 5월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47명이 검문에 불응한다며 그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한 ‘[[발췌 개헌|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한다.[* 위에서 언급한데로 이지역을 담당한 것은 13명으로 구성된 동래부대였고 대장은 백두흠인데 그는 당시 부산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물론 국회에 공작금을 준 적도 없다. 당연한 소리이지만 김창룡의 말은 신뢰성이 부족하다.] 51년 11월 30일 부산 조병창 화재 사건도 있다. 이것은 남도부 부대가 일으켰다는 설도 있지만,(실록 <남도부>는 남도부가 했다는 설을 지지) [[김창룡(군인)|김창룡]]을 사살한 허태영 대령이 옥중에서 작성한 글 의하면 "(김창룡이) 한 지방민을 매수하여 대남간첩으로 가장시켜 이 간첩이 조병창 직원에게 지령하여 방화한 것이라고 날조했다."라고 되어 있다. 어쨌든 남도부 부대는 본의 아니게 이승만 정권의 권력 연장을 위해 애용되기는 했지만, 실제로도 활발한 유격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주로 여러 부대로 분산하여 상당한 교란 작전을 벌인다. 주로 대구와 부산을 오가는 군용차량을 공격하고 파괴하는데 맞쳐줬다. 이는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가 그의 저서에서 남부군등의 빨치산 활동을 비판하며 "(남부군은) 이기지 못할 전투만 골라서 한 셈이었다. 지금처럼 기관총을 거치한 경찰의 토치카를 백주 대낮에 정면 공격 하는 대신 모든 빨치산이 열명, 스무명씩 수백개의 소조로 나뉘어 그 독특한 게릴라 전을 펼쳤으면 어땠을까?"라고 하는데 남도부 부대의 유격활동 방식이 바로 이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부군의 악양전투 같은 굵직굵직한 대규모 작전이 없었다.[* 경남 하동 악양지서에 남부군이 경남도당, 충남도당의 지원받아서 대규모 [[레이드]] 뜨러 갔는데, 마침 그날이 국군의 1차대토벌작전 하루 전날이라 토벌군이 총집결해 있었다. 국군의 1차 대토벌작전때 빨치산이 큰 타격을 입은게 아니라 이미 하루 전날 괴멸적 타격.] 남도부의 대규모 교전을 철저히 회피한 유격활동 방식 덕분에, 국군의 51년말의 1차 대토벌작전은 잘 넘겼다. 그에 반해 52년의 소강기때 보급투쟁 나갈 때마다 몇명씩 계속 죽어나가 예하부대 3개는 사실상 전멸하고 이제는 사령부만 남았다. 군사도시 대구와 임시수도 부산이라는 매우 위험한 지역에 위치 해있다는 불리한 점도 작용되었다. 또한 다른 도당 부대는 산하의 군당, 면당 조직에서 조금씩이라도 병력 보충이 되는데 남도부 부대는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다. 애초에 전라남북도나 낙동강 이서 경남지역은 인민군이 한 번 점령했을 때 부역했던 이들이 인민군 후퇴시 우르르 입산해 빨치산 활동 시작시부터 병력이 많았지만, 남도부 부대의 활동지역은 항상 대한민국의 통치권으로 6.25 이전의 구빨치(6.25 발발이후 김상선같은 극소수 입산자)+북에서 파견된 남도부 부대가 전부로 원 병력자체가 적었다. 그나마 한국전쟁도 끝난지 3일후인, 53년 7월 30일에 북한에서는 [[남로당]] 최고간부들을 숙청하였고, 이에 동조하여 빨치산들은 남부군 사령관이자 제5지구당 위원장인 [[이현상]]을 숙청하였다. 남도부는 남로당을 통해 당원이 되기는 하였지만 이현상, 이승엽등과의 관계는 소원하며 오히려 김일성 쪽에 가까워 무탈하게 넘어갔다. 아니 그를 숙청할만한 주변 세력이 4지구당내에서 남아있지 않았다. 이어 53년말 국군의 2차 대토벌작전이 시작되어 남한내 빨치산이 깡그리 쓸려나갔는데, 여기에 대부분의 도당 위원장과 그 후임은 물론 도당 유격대가 산산 조각 났고, 오직 제4지구당 위원장인 남도부만 남았다. 이보다 얼마 전에 북한의 '결정서 111호'가 도착하는데, 여기에는 기존의 유격활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장차 휴전을 대비하여 도심으로 침투하여 지하공작을 실시하라는 것이였다. 앞서 언급한데로 남도부 부대는 소규모 단위로 활동을 하기 때문에 남도부가 직접 모든 부대를 이끌고 대규모 작전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신불산에서 남도부는 특별한 움직임 없이 조용했다.[* 남도부가 이시기 조용했던 이유를 당시 경남도경국장 박병배는 남도부가 이시기에 월북 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박병배 국장은 남도부가 김일성에게 '대구 폭파 후 월북'이라는 최후의 작전명령을 받고 다시 월남하였다고 증언하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