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도부 (문단 편집) === 최후 === 더이상 기존처럼 산악지대에서 유격투쟁을 벌이는데는 한계점에 봉착해 있었다. 게다가 북한의 '결정서 111호'도 도심침투를 지시하고 있었다. 남은 유격대원은 겨우 9명. 사령관 남도부, 경북도당 부위원장 이구형, 부사령관 유응재(본명 홍영식), 부관 홍만식(본명 이원양), 연락원 문일준(본명 문덕준), 참모장 차진철, 간호장교 지춘란, 남대원 김병수, 여대원 김상선이였다. ~~지휘부 7명에 대원 2명이다. 조직 잘 돌아간다~~[* <신불산>에서는 결정서 111호가 도착했을 시기 경북 등지에 파견된 대원을 제외하고 본부의 당 요원중 살아 남은 사람은 11명, 남도부의 부대에서는 20여명등 합계 30명이 남았다고 한다. 이쪽 자료에는 지구당 본부에는 간부중에서는 부위원장(위원장?) 이영섭 아래로 선전부장 안병화와 기요과장, 제3소지구당 조직부장 안병화등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유격대에서는 사령관 남도부 이하 참모2명, 부관, 간호장교 지춘란등이 있다고 하며 유응재는 경북지역에 있어 연락 두절 상태라고 한다. 어느 한쪽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북위38도선>에서 생존자 9명설은 지구당 본부 인원을 제외한 유격대 인원만 계산한 것이고, <신불산>에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유격대원이 몇명 더 남아 있다고 잘못 추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유응재 부분은 어느 한쪽이 완전히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위원장 이영섭 아래로 10여명의 지구당 인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영섭은 2차 대토벌작전에서 신불산이 포위되어 더이상 저항하기 힘들어 이동하는 과정에서 53년 12월 사살된다. 이로서 사령관급에서는 남도부만 남게되어 그가 지구당과 유격대 양쪽을 전부 이끌게 된다. 남도부는 참모장 격인 차진철[* 본명 성일기. 소설 <북위38도선>의 주인공. 기존의 참모들이 일선부대장으로 갔다가 죄다 전사해버려, 정치위원 안철의 연락병인 차진철이 사령부의 참모장 격으로 남아 있었다. 성일기는 <북위 38도선>에서 53년 8월에 남도부가 휘하대원에게 항복을 타진해보라고 하산시켰다고 하는데, 이후에 남도부가 끝까지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나이는 겨우 19세에 부대 병력 자체가 워낙 적어 참모장이라고 부르기가 겸연쩍어 그냥 '지도원 동무'로 불렀다고 한다.]에게 9월경 그의 고향인 창녕으로 가서 도심 침투가 가능한지 타진해보라는 지시를 하였다. 차진철은 창녕에서 큰아버지 성윤경과 누이인 성혜분을 만나 근거지를 마련하고 남도부를 불러들인다. 이때 신문에서 5지구당 위원장이나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사살되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편 53년 12월 1일, 동해 지구 경비사령부(박기병 준장)가 876부대를 모태로 창설되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이들은 875부대와 877부대를 예하부대로 두고 1500명을 투입하여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미 유격대는 해체되고 각자 탈출한 뒤였다. 남도부와 차진철은 석달가량 함께 창녕에서 숨어지내다가 남도부 먼저 대구로 떠나게 된다. 이때 자료가 갈리는데 먼저 1970년 초에 동양라디오(DBS)에서 방송된 <광복20년>중에 한달간 방송된 <남도부사건>에 이과정이 잘 나와 있다. 극작가인 김교식이 남도부를 체포한 수사담당자를 취재하여 그들의 공로 위주로 하여 훌륭한 '반공홍보프로'로 만들었다. 여기서는 차진철은 창녕에 있는 큰아버지 성윤경과 누이인 성혜분에게 대구로 가서 자신과 남도부를 맞이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전 확인차 53년 12월 31일 대구에서 큰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실은 이 모든 과정을 육군본부 특무부대(특별수사반장 최룡 대위)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최룡 대위는 사전에 큰아버지와 누이를 만나 이미 포섭하였고, 둘은 다시 찾아온 성일기를 설득시켜 자수하게 만든다. 그리고 남도부가 약속한데로 대구의 성기수의 집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특무부대와 차진철은 남도부가 팔공산 아지트에 있는지 알았지만, 그는 이미 다른 루트로 대구시내로 내려와 동인동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통수]]의 통수~~ 게다가 그 하숙집은 특무부대 인근이었다. 그야말로 등잔밑이 어두운 격. 남도부는 이곳 하숙집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 부관이자 연락병인 홍만식, 팔로군 출신인 군의장 지춘란 소위 등을 성일기의 누이인 성기수의 집으로 보내 조금만 이상한 낌새를 보여도 돌아가곤 했다. 특무부대는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 그러나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자 남도부는 54년 1월 21일 오후 6시 동인동의 성기수 집으로 이동하였다. 대구 팔달교검문소에서 검문을 받기는 했지만 '한맹은'이라는 가명의 도민증을 보여주면서 통과한다. 그리고 경찰의 미행을 따돌리며 성기수의 집으로 들어왔다. 성기수의 집 밖에는 이미 특무부대원들이 2중~3중으로 포위하고 있었고, 집안에는 무술 유단자인 심재홍 상사가 세들어 사는 사람으로 위장하여 살고 있었다. 결국 남도부는 별다른 저항없이 체포되었다...라고 나온다. 실록 <남도부>도 이에 따라 집필되어 있다. 그에 반해 차진철의 증언으로는 남도부가 떠난 후 특무대에 의해 12월 31일께 창녕의 큰아버지 집에서 체포된다. 귀순한 여빨치 손미라가 자신의 친구인 성혜분과 차진철이 오누이라는 것을 청도 경찰서에 말한 것이다. 청도 경찰서는 성혜분이 창녕에 살고, 그녀의 오빠가 성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성일기가 바로 남도부 부대의 참모장 차진철의 본명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공로를 창녕 경찰서에 넘기기 싫어 특무대에 정보를 흘린다. 체포후 특무대 염일춘이 차진철이 자수했다고 공표했다. 차진철이 남도부 부대 참모장이 어떻게 자수할 수가 있냐고 생포로 바꿔달라고 했지만 염일춘은 성일기를 구명해줄 목적으로 그냥 자수로 상신하였고 CIC 특무대장 김창룡의 전결로 자수가 되었다. 아마 동양방송에서는 이에 따라 자수로 극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차진철은 대구로 압송되어 특무대장 [[김창룡(군인)|김창룡]], 사상검사 [[오제도]], 특무처장 [[이진용(1920)|이진용]]에게 심문당하였지만 끝까지 협조 안하고 버틴다. 며칠을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지금쯤이면 남도부가 대구를 떠났겠지, 하고 생각하여 대구의 친척집에 남도부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수사대는 이미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어디까지나 차진철의 증언일 뿐이다. 붙잡히자마자 남도부의 위치를 폭로하며 살려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 수사대가 이미 남도부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말은 차진철이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지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남도부는 대구에서 고물상으로 위장하여 그의 친척집을 기웃 거리다가 잠복조에 의해 체포당한다. 육군 특무부대는 곧 바로 팔공산 정상에 있는 남도부 부대의 아지트를 급습하여 군의장 지춘란 소위를 생포하고 제4지구당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섬멸한다.[* 당시 신문기사에서 인용한 자료이다. 신문에는 없지만 연락병 문일준, 여대원 김상선, 남대원 김병수도 이때 체포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들은 수사기관에서 차진철과 만나게 된다.] 이때 소련총 4정, 카빈소총 2정을 압수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몇명 남아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이미 54년 1월 16일에는 팔공산부대(4지구당 제3지대)장이자, 남도부 부대 부사령관격인 유응재가 대구시내 노상에서 체포되었고, 19일에는 대구 모처에서 잠복중이던 부관 홍만식이 체포되었다. 남도부 체포후 조선일보 54년 10월 13일자에는 "(남도부 부대는) 사변 전부터 지난 1월 중순 육군특무부대에 체포되기까지 약 5년 동안의 기록에 나타난 사실만으로도 군경과 양민학살 2,800여 명, 각종 무기약탈 20만여발, 민간방화 700호, 군용열차전복 28회, 군경자동차 소각 670여 회라는 어마어마한 해독을 우리에게 끼친 괴뢰중장 남한유격대총사령관 남도부(34세, 본명 하준수)"라는 기사가 실렸다. 재판과정에서 남도부는 자신을 포로대우를 해주고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묵살당했다. 결국 남도부는 54년 10월 14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때 같이 재판받은 유응재(부사령관, 본명 홍영식, 37세), 문일준(연락원, 본명 문덕준, 25세), 지춘란(간호장교, 24세)도 사형을 선고받았고 홍만식(본명 이원량, 23세)만 무기징역이었다.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대장, 2군사령관 [[강문봉]] 중장, 서울지구병사구사령관 허태영 대령, 특무부대 특무처장 이진용 대령이 남도부 구명 운동을 벌였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군은 정일권-강문봉-허태영 라인과 백선엽-김창룡 라인의 계파 싸움이 치열했다. 결국 김창룡 등에 밀려서 구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김창룡은 강문봉-허태영에게 암살당하고, 그 암살자들도 사형당하면서 양쪽은 동귀어진한다.] 당시 남도부에 대한 판결 의견서에 따르면 "괴뢰 노동당 중앙당부 직속 대남 유격대 제3병단 김달삼 부대 부사령관, 대남유격대 총사령관, 대남 유격대 제3지대장 등을 역임한 강원도, 경상남북도 일대의 유격대 총책임자로서... 국군사살 80여명, 미군 사살 16명, 경찰관 사살 70여명, 생포 10여명..."이라고 그의 신분과 전과를 밝혀 놓았다. 55년 8월 어느날 남도부는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에 의해 서울 수색의 육군사형집행장에서 눈가리개 없이 총살당한다. 입회하였던 군인들이 유가족에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남도부는 "인민공화국만세!"를 외치며 죽었다고 하는데 동양방송에서는 "대한민국만세!"로 둔갑하여 방송되었다. 다만 함께 총살된 부책인 유응재는 형장에서 울부짖으며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한다. 그외 빨치산 부하들은 감형을 거듭한 끝에 만기를 채우고 풀려났다. 지춘란 소위 역시 감형되어 20년만에 출소하였는데 서울의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면서 4지구당 사령부 출신들의 친목모임을 만들어 한달에 한번씩 만나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90년대 전반 한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외 다른 부하들도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모두 감형되어 20여년을 살고 풀려났다. 차진철(성일기)은 1954년 [[단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편입하여 59년도에 졸업하였다. 월북한 그의 여동생 [[성혜림]]이 [[김정일|뽀그리우스]]의 사실상 처가 되는 바람에 한때 매스컴을 타기도 하였다. 2006년에 그의 일대기인 <북위38도선>이 출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