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조시대 (문단 편집) == 의의 == 사실 육조 시대는 강남의 기반을 닦았다는 의의가 있다. 훗날의 송·위 전쟁기에도 북위가 자만하고 함부로 너무 이남으로 대군을 밀어넣었다가 제대로 박살나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만큼, 늘상 북조에게 열위에 있지만은 않았다. 또 북방과 중원의 백성들도 살육과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황족 다툼이나 파벌 다툼으로 남조를 한심하게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조금만 기분이 나쁘면 관료 목을 막 치거나 배신을 밥먹듯 하며 이합집산이 잦았던 화북 왕조들의 형편이 남조보다 늘상 나았던 건 아니다.[* 막말로 백성들에게는 지배 계급에서 배신을 하든 [[이놈의 목을 쳐라]]를 하든 상관없다. 그러나 북쪽처럼 살육과 약탈 잔치가 벌어지면 백성들에게 제일 치명적이다.] 심지어 제도나 문물은 북조도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물론 통일은 [[북위]]의 바통을 이어받은 [[북주]], 그리고 [[수나라]]가 이루게 되지만, 수나라가 정작 많이 참고한 관료제는 북위나 북주보다는 남조의 그것이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구품관인법 연구 참조.] 전진이 잠깐 놀라운 융성을 자랑했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화북 일대는 다시 후진과 후연이 들어선다. 남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진]] 정권이 매우 실망스러운 형태로 붕괴했고 이후 전중국은 마땅한 정통 통일 왕조 없이 혼란의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그래도 동진이 과거 통일 왕조의 저력을 이어받았던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석륵]]과 석호의 후조는 가장 강성할 때도 회수 일대를 지키는 옛 서진 군단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유민 군사 집단에게 막혀서 회수 이남으론 손을 뻗지 못했으며, 적어도 석륵 이상은 될 부견의 전진에게 한참 밀릴 때도 영토들을 그렇게 호락호락 내줬던 건 아니었다. 남북조의 대치는 꽤 오랜 기간을 두고 이뤄졌으며, 북위가 결국 북제와 북주로 쪼개져 한동안 북방 유목민들에게조차 일시 수세였던 기간에도 남조의 양나라는 번영을 자랑했다. 남북조의 대치 상황이 완전히 확고하게 북강 남약으로 굳어지는 건 북주가 북제를 멸한 시기 이후인데,[* 정확히는 양나라에서 후경의 난이 일어난 바로 그 시점부터이다.] 이때는 이미 남북조가 거의 끝나갈 시점이다. 반면 이와는 정반대로 처음부터 [[알타이 콤플렉스]]적인 시각을 가지고 북조를 무분별하게 까는 경우도 있다. 오호십육국을 시작으로 북방 계열의 침투왕조들이 북조의 주도권을 쥐고 이것이 북주 및 이후의 수당 통일왕조로 이어지는 바람에 중화 문명의 몰락이 이루어졌다는 식의 주장인데, 역사학 등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주장이니 그냥 가볍게 무시해주면 된다. 정작 중국 현지에서는 "중화 문명의 전성기"를 꼽으라고 하면 남북조시대 이전의 [[한나라]]보다 오히려 남북조시대 직후의 [[당나라]]를 선택하는 여론이 조금 더 우세하다. 즉 그냥 질 나쁜 인종주의일 뿐이다. 일전에는 중국이 한나라 시기까지 역대급으로 발전했다가 그 이후에는 오히려 그 상태로 정체되었다는 얘기가 정설 같이 돌기도 했는데 이것도 사실을 따지고 보면 한국과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주로 있었던 얘기일 뿐 해외에서는 데니스 트위쳇(Denis Twitchett)과 같은 학자를 비롯해 당나라를 오히려 큰 전환점의 일종으로 보는 시각이 아주 예전부터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