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시대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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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朝 | 남북조
Nan Bei Ch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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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北朝)
왕조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수도
성락
평성
낙양

장안

장안
군주
건국군주
멸망군주
14제(帝)
탁발규
원수
1제
원선견
원선견
3제
원보거
원곽
6제
고양
고항
5제
우문각
우문천
성립
386년
534년
535년
550년
557년
멸망
534년
550년
557년
577년
581년
개시
439년 북량의 멸망
결속
581년 양견의 찬탈
남조(南朝)

왕조




수도
건강
건강
건강
강릉
건강
군주
건국군주
멸망군주

8제
유유
유준
7제
소도성
소보융
4제
소연
소방지
5제
진패선
진숙보
성립
420년
479년
502년
557년
멸망
479년
502년
557년
589년
개시
420년 유유의 찬탈
결속
589년 수나라의 침략
1. 개요
2. 역사
3. 특징
4. 한국사와의 관계
5. 중국 남북조 시대의 역대 국가




1. 개요[편집]


386년[1]/420년[2]/439년[3]~589년

중국 역사시대 중 하나로, 크게는 위진남북조시대에 속한다.

동진이 끝난 뒤의 시대로 남조는 유유의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 사마덕문에게 선양받은 420년부터 시작되고, 북조는 북위(北魏)가 건국된 386년, 또는 화북을 통일한 439년부터 시작된다.


2. 역사[편집]


파일:external/study.zumst.com/%EC%9C%84%C2%B7%EC%A7%84%C2%B7%EB%82%A8%EB%B6%81%EC%A1%B0%EC%8B%9C%EB%8C%80%EC%9D%98%EC%A0%84%EA%B0%9C.png

북위화북을 통일하고 남조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梁)의 명장 위예(韋叡)[4]에게 종리(鐘離)에서 대패했고, 그 뒤에 육진의 난(六鎭之亂), 진경지(陳慶之)의 북벌 등이 벌어지며 헬게이트가 열렸다.[5]

이후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면서 다시 왕조가 바뀐다. 동위는 북제, 서위는 북주로 바뀌었다. 고씨의 북제는 처음에는 강성했으나, 곡률광, 고장공이라는 뛰어난 명장들이 전부 황제에게 죽으면서 쇠퇴해졌다. 반면 우문씨의 북주는 점점 강성해졌다.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두 나라의 강을 사이에 둔 대치 지역에서 처음에는 겨울북주가 북제를 막으려고 얼음을 깨 도강을 막으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북제가 북주를 막으려고 얼음을 깼다.

끝내 북제를 멸망시킨 북주 무제는 중원 통일을 꿈꾸었으나 급서하였다. 황제의 장인이자 북주의 대장군이었던 양견은 권력을 장악한 뒤, 섭정을 시작했다. 선제(宣帝)가 매우 어리석어 난폭한 짓만 하다가 죽게 되자 북주 정제에게 선양을 받은 뒤, 수나라를 건국한다. 이 사람이 바로 수 문제다.

수 문제는 즉위한 지 8년 째(개황 8년)인 588년 10월, 한금호(韓擒虎), 하약필(賀若弼) 등의 명장들에게 52만 대군을 맡기고, 여덟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남조의 진(陳)을 공격하였다. 진의 수도 건강(建康)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우물에 숨어있던 황제 진숙보(陳叔寶)가 사로잡히면서 진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3. 특징[편집]


이 시대의 특징으로 개막장의 끝을 달리는 막장 중의 막장을 보여주는 지도자들이 있다. 특히 남조의 유송는 아주 피가 철철 흘러 넘친다. 의외로 선비족에서 출발한 북쪽은 조금 덜했다. 이쪽은 또 이쪽 나름 삼무일종법난 가운데 두 가지가 터졌다. 또한 동진 시대 정치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권신의 선양 풍조를 방지할 목적으로 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위 정통론 대신 촉한정통론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촉한이 정통으로 대두되는 시기는 한참 지나 성리학이 정립되는 남송대 이후지만.

그리고 남북조 내내 남조는 열세에 있었는데, 한나라 시절에는 강남에서 개간이 된 지역이 장강 유역이었고 유역 너머 남쪽은 인구도 별로 없고, 땅이 습하고 더워서 열대성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6] 겉보기에 비해 별로 좋지도 않은 땅이었다. 또 한나라 시절에는 강남 지역의 개발이 적어서 벼의 품종이나 농법 등의 벼농사 기술도 덜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당연히 강남의 농업 생산력도 낮았다. 그래서 남조가 강남 지역을 개발할 동안에 화북 지역은 전연이 245만 호, 북제가 303만 호, 북위가 500만 호를 찍는 데 비해 강남 지역은 남북조시대 최강국인 송이 91만 호, 진은 50만 호를 겨우 찍을 정도로 인구 차이가 현격했다.[7]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강북의 경제력은 후한 말 군웅할거, 팔왕의 난, 영가의 난, 오호십육국시대와 같은 전란으로 황폐화되거나 기후 변화와 섬서, 산서 일대 장기간에 걸친 건조화로 인해 환경파괴가 일어났으며 정체되어 갔다. 반면 강남에선 남조가 개발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였고 땅에 물기를 어느 정도 빼니 벼농사를 짓기 최적화된 땅에 거기다가 더워서 2모작, 3모작, 그러니까 1년에 벼농사를 2번, 3번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점이 발견되어 이는 강남의 경제력을 크게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벼농사의 발달로 벼농사와 생산력이 역전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강남의 경제력이 제대로 커지며, 실제로 당과 북송 대에서는 강남 지역의 발전으로 강북의 경제력과 비슷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정강의 변이 터지면서 화북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뛰어난 상업 기술을 강남에 전파하고 활용하면서 끝내 남송(南宋)시대 때 절정에 이루며 완전히 강남이 강북을 압도하게 되었다.

열세의 또 다른 원인은 중앙 정부가 지방을 잘 통제하지 못했다. 인구 면에서도 열세인 만큼 행정에서도 열세라 수도에서 멀수록 중앙의 지배력이 닿지 않았다. 원인은 토착 호족의 영향 그리고 화북 출신 귀족들과 토착 세력 간 반목으로 조정이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전대미문의 대혼란과 군벌의 난립으로 현실정치에서 유교는 크게 쇠퇴하고 상대적으로 도교, 불교가 주목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문화 예술의 발전이 눈부셔서 늘 북조 국가들을 오랑캐라고 무시했지만 여기는 대신 암군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8] 당최 하루도 왕조가 편할 날이 없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아웅다웅 열심히 싸웠다. 가끔 명군이 나타나 평안한 때가 있기도 했고 육조시대 마지막 국가인 진나라는 비교적 멀쩡한 국가이긴 했지만...

적어도 남조는 북방 이민족에게 망하지 않고 사직을 지켜냈으며, 일방적인 열위에만 있지 않고 몇 차례 큰 공세를 퍼부은 적도 있었다. 남조는 양나라 이전에도 여전히 북방 오호들의 불안정한 국가들보다는 안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서진의 남은 기반을 긁어모은 동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치통감만 해도 삼국시대에 대해선 무통으로 보면서 위나라 위주로 기재하다가, 그 뒤엔 주로 동진-유송-제-양-진으로 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한 남조 정권들의 지배층들은 국가적 역량이 쇠퇴한 것을 무작정 무기력하게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남조를 정면에서 깔아뭉개는 이들이 등장하는 건 이들을 아예 오(吳)의 무리로 비하하기 시작하는 북위 때부터지만, 그런 주장에 모두가 동의했던 건 아니었다. 가령 서양에서는 남조 정권을 동로마 제국과 동일시해서 보는 시각이 학계의 정설로 굳어져가는 상황이다. 당장 육조시대라는 명칭부터가 성행했던 것이야 말로 남조 정권이야말로 중국의 정통 왕조라는 인식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주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르주 뒤비에의 세계 지도에서 나타나는 이 시기의 중국사 지도에선 대놓고 남조만 중국(China)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북조에서 호한체제(胡漢體制)가 성립된 이후 남조의 폐단을 억제하기 위해 과거제 도입이나 귀족층인 관롱 집단의 억제를 시행했다는 사실까지 간다고 해서 남조 정권들이 할 말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때문에 남조의 의의를 적게 볼 순 없다. 남중국을 적극 개발해서 중국의 범위를 확장시킨 점과 함께 과거의 한족 문화를 보존해서 이후의 통일 왕조에게 전수한 점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

사실 육조 시대는 강남의 기반을 닦았다는 의의가 있다.

훗날의 송·위 전쟁기에도 북위가 자만하고 함부로 너무 이남으로 대군을 밀어넣었다가 제대로 박살나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만큼, 늘상 북조에게 열위에 있지만은 않았다. 또 북방과 중원의 백성들도 살육과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황족 다툼이나 파벌 다툼으로 남조를 한심하게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좀만 기분이 나쁘면 관료 목을 막 치거나 배신을 밥먹듯 하며 이합집산이 잦았던 화북 왕조들의 형편이 남조보다 늘상 나았던 건 아니다.[9] 심지어 제도나 문물은 북조도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물론 통일은 북위의 바통을 이어받은 북주 그리고 수나라가 이루게 되지만, 수나라가 정작 많이 참고한 관료제는 북위나 북주보다는 남조의 그것이었다.[10]

전진이 잠깐 놀라운 융성을 자랑했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화북 일대는 다시 후진과 후연이 들어선다. 남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진 정권이 매우 실망스러운 형태로 붕괴했고 이후 전중국은 마땅한 정통 통일 왕조 없이 혼란의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그래도 동진이 과거 통일 왕조의 저력을 이어받았던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석륵과 석호의 후조는 가장 강성할 때도 회수 일대를 지키는 옛 서진 군단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유민 군사 집단에게 막혀서 회수 이남으론 손을 뻗지 못했으며, 적어도 석륵 이상은 될 부견의 전진에게 한참 밀릴 때도 영토들을 그렇게 호락호락 내줬던 건 아니었다. 남북조의 대치는 꽤 오랜 기간을 두고 이뤄졌으며, 북위는 결국 북제와 북주로 짜개져 한동안 북방 유목민들에게도 일시 수세였던 기간에도 남조의 양나라는 번영을 자랑했다. 남북조의 대치 상황이 완전히 확고하게 북강 남약으로 굳어지는 건 북주가 북제를 멸한 시기 이후인데[11], 이때는 이미 남북조가 거의 끝나갈 시점이다.

반면 이와는 정반대로 처음부터 알타이 콤플렉스적인 시각을 가지고 북조를 무분별하게 까는 경우도 있다. 오호십육국을 시작으로 북방 계열의 침투왕조들이 북조의 주도권을 쥐고 이것이 북주 및 이후의 수당 통일왕조로 이어지는 바람에 중화 문명의 몰락이 이루어졌다는 식의 주장인데, 역사학 등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주장이니 그냥 가볍게 무시해주면 된다. 정작 중국 현지에서는 "중화 문명의 전성기"를 꼽으라고 하면 남북조시대 이전의 한나라보다 오히려 남북조시대 직후의 당나라를 선택하는 여론이 조금 더 우세하다. 그냥 질 나쁜 인종주의일 뿐이다. 일전에는 중국이 한나라 시기까지 역대급으로 발전했다가 그 이후에는 오히려 그 상태로 정체되었다는 얘기가 정설 같이 돌기도 했었는데 이것도 사실을 따지고 보면 한국과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주로 있었던 얘기일 뿐 해외에서는 데니스 트위쳇(Denis Twitchett)과 같은 학자를 비롯해 당나라를 오히려 큰 전환점의 일종으로 보는 시각이 아주 예전부터 있었다.


4. 한국사와의 관계[편집]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장수왕이 즉위한 뒤(413) 동진이 망하고, 북위가 화북을 통일했다. 장수왕과 뒤를 이은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으로 이어지면서 남북조 국가들에게 모두 고구려왕의 직위를 받는 등 양팔 외교를 이어갔다.[12] 이런 북방의 안정을 토대로 나제 동맹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였지만 안장왕, 안원왕 대에 가면서 왕위 분쟁이 본격화해 점차 국력이 쇠퇴한다. 말기로 가면 백제성왕신라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온달 등이 땅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또 관산성 전투(554년) 이후 신라는 전성기를 누렸다. 즉 고구려가 강성하고 다시 기울기 시작하는 시대다. 일부 인터넷 강사들과 한국사 교사들은 삼국시대를 가르칠 때 위진남북조시대를 배경으로 깔고 가르친다.


5. 중국 남북조 시대의 역대 국가[편집]


북조
北朝
북위
(386년 ~ 534년)
동위
(534년 ~ 550년)
북제
(550년 ~ 577년)

북주

581년)


(581년 ~

(통일)
589년)
서위
(535년 ~ 556년)
북주
(557년~
(경계)
산동반도회하 이북[13]
회수
이북
강릉
서위가 점령
(551년 ~ 554년)
진의 일시적
강북 진출
(575)
남조
南朝

(420년 ~ 479년)

(남제,
479년 ~ 502년)

(502년 ~ 557년)
한(漢)
(551년 ~ 552년)[14]

후량後梁
(555년 ~ 587년)[15]


(557년 ~ 589년)

한국사
고구려 전성기
(~ 503년)
고구려
우세기
(503년 ~ 529년)
나제동맹 우세기
(529년 ~ 554년)
신라 우세기
(554년 ~)


[1] 북위 건국.[2] 유송 건국.[3] 북위의 화북 통일[4] 몸이 약해서 가마를 타고 지휘했지만, 위호(韋虎)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북위군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5] 하지만 정작 양나라는 양무제의 말년 혼치와 후경의 난으로 사실상 멸망하고, 후경의 난을 처리한 진패선이 진나라를 건국한다.[6] 오나라의 요절 징크스의 원인이기도 하다.[7] 이러한 인구 격차에도 불구하고, 북조가 남조를 빨리 멸할 수 없었던 점은 국가의 응집력과 북조 이민족 지배층의 통치경험 부족 등의 문제다. 이는 6세기 중후반에 가며 북조의 지배층에게도 국가통치경험이 축적되면서 타파된다.[8] 이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는 이 당시 한족들 사이에서 환각제가 유행했던 점이 오히려 사서들에서 축소되어 서술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시기에 편찬된 다른 서적들을 보면 특히 한의학 서적들의 경우, 다른 시기에 비해 환각제에 대한 서술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난다.[9] 막말로 백성들에게는 지배 계급에서 배신을 하든 이놈의 목을 쳐라를 하든 상관없다. 근데 북쪽처럼 살육과 약탈 잔치는 백성들에게 제일 치명적이다.[10]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구품관인법 연구 참조.[11] 정확히는 양나라에서 후경의 난이 일어난 바로 그 시점부터이다.[12] 북위는 남조 사신의 숙소를 가장 크게 그 다음으로 고구려 사신의 숙소를 크게 지어놓고 남조와 고구려의 사신을 나란히 앉혔다. 이에 송나라의 사신이 "고구려가 우리나라에서는 신하를 자청하는데 이럴 수 있냐" 라고 따지기도 했다.[13] 양주(梁州, 량주), 서주[14] 육조시대 소량 때 난을 일으킨 후경소동에게 양위받아 세운 나라이다.[15] 서위의 괴뢰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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