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무군벌 (문단 편집) == 설명 ==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일본)|경찰예비대]] 시절에 군색을 빼려고 시도했고 그 때문에 [[일본군]] 출신들을 배제했다. 대신 [[계급]] 등을 두고 [[군대]]와 가장 유사한 시스템인 [[경찰]] 출신들을 채용했다. 이들은 초기에 주요 [[요직]]을 차지했다. [[1950년]] [[7월]]부터 [[경찰예비대(일본)|경찰예비대]]가 모병되었는데 전부 [[이등병]]으로 배치했다. 초급 [[간부]]들은 이등병 계급으로 [[대대장]], [[중대장]] [[완장]]을 차고 [[지휘관]]교육을 받았다. [[1950년]] [[10월 9일]]에 [[내무성]] 추천으로 내무성 출신의 요시다 주이치(吉田忠一), [[하야시 게이조]], [[쓰쓰이 다케오]], [[오모리 간]], 다케우치 쇼헤이(武内征平)가 경찰감([[중장]])으로 [[특별임관]]되었다. [[1952년]] [[10월 15일]]엔 [[보안대(일본)|보안대]] 개편이 되면서 새로이 내무성에서 추천된 나가노 도시오(中野敏夫), 가나야마 구니치(金山國治)와 [[일본 육사|육사]] 34기 출신의 기시모토 주이치(岸本重一)와 37기 출신 이모토 구마오(井本熊男)[* 일본군 [[대좌]] 출신이었다.]도 보안감(중장)으로 [[특별임관]]되었다. 그러나 경찰이나 [[관료]] 출신들은 군의 [[시스템]]을 잘 이해하지 못 했고 자위대의 [[사병]]들은 일본군 사병 출신[* 사병들은 징병으로 갔기 때문에 공직 추방령에서 빠졌다.]들이 많았던 탓에 이런 [[미필]] 간부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전술적 지휘에서 우수한 기량을 보이자 [[미국]]은 마음을 바꿔 [[대령|대좌]] 이하의 일부 [[장교]] 출신들에게 [[입대]]를 허용했다. 이들은 [[1960년대]]까지 내무군벌과 [[육상막료장]] 자리를 두고 힘싸움을 벌였고 내무군벌 출신 육막장이 사라지게 되면서 [[1980년대]]까지 [[막료장]] 자리를 차지하다가 늙어서 은퇴했다. 그 이후엔 [[방위대학교]] 출신들이 독점 중. 단 [[해상자위대]]의 경우 [[일본 해군]] 소해대가 그대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98% 이상이 일본 해군 출신이었다. 야마자키 고고로가 초기에 잠깐 반짝했을 뿐 해자대에는 내무군벌이란 [[개념]]이 거의 없었다 봐도 무방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