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팔 (문단 편집) === 역대 의회 (1959 ~ 현재) === ''' 의회(1959~1960)''' * 1959년 2월 18일에 네팔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를 실시하여 국회의원 109명을 뽑았다. 투표율은 42%였고 [[네팔 회의]]가 74석을 차지하였다. '''무정당 판차야트 1기(1961~1980)''' * 1960년 12월, 당시 국왕인 마헨드라는 민주주의를 네팔에 어울리지 않는 외래사상으로 간주하고 직접 통치를 선언,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와 내각을 해산했다. * 네팔 회의와 공산당 등 모든 정당이 불법화되었고, 독재에 대한 불평과 비판을 범죄 행위로 간주하는 등 언론출판의 자유도 완전히 억압하였다. * 마헨드라 국왕은 자신이 수상과 내각을 구성하고 의회의 기능을 대신하는 ‘무정당 판차야트[* Rastriya Panchayat(국가 위원회), 줄여서 Panchaayat. [[네팔어]]로 판차야트는 의회, 위원회라는 뜻이나, 보통 '판차야트'라고만 할 때에는 1961년부터 1990년까지의 무정당 판차야트를 가리킴.] 체제’를 도입하였다. * 판차야트를 소집하고 폐회할 권한이 국왕에 있고 국왕이 주재하는 국가회의 감독하에 있기 때문에 의회(판차야트)는 당지 명목상 기구로 전락해버렸다. * 최초의 판차야트 선거조차도 마헨드라 국왕이 사망할 즈음인 1971년에야 실시되었고, 그나마도 보통선거가 아니었다. 국왕이 16명을 임명하였고, 각종 단체가 뽑은 대표 15명[* 농민 단체 4명, 청년 단체 4명, 여성 단체 3명, 노동자 단체 2명, 퇴직 군인 단체 2명]에, 지역 대표 90명, 그리고 대학 졸업자[* 1971년 당시 네팔의 대학 졸업자 수는 1만 3천 명이었다.]에게만 투표권을 줘서 4명을 뽑았다.[* 지역 대표조차 국민이 직접 선출한 것이 아니니, 결국 네팔 국민 중에 선거권을 가진 사람이 대학 졸업자 1만 3천 명뿐이었단 얘기다.] '''무정당 판차야트 2기(1981~1990)''' * 1979년 4월에서 5월에 걸친 네팔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 정부가 발표한 인명 피해는 사망 11명에 부상 164명이다.]에 당시 국왕이던 비렌드라가 1980년 다당제와 무정당 판차야트 가운데 어디를 국민이 선택할 것인지 투표에 부의하였는데, 투표 참여자의 54%가 판차야트를 지지하였다.[* 국민투표는 노랑과 파랑이 인쇄된 투표용지를 썼고 판차야트를 지지하는 사람은 노란색, 다당제를 지지하는 사람은 파란색에 기표하도록 했다. 네팔 국민 대부분이 믿는 힌두교에서 노란색이 종교적인 의미(성인聖人을 가리킴)가 있다는 점에서 국민투표 당시에도 색깔을 의도적으로 선정했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투표 결과가 색상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새 판차야트[* 지역 대표 112명과 국왕 임명 28명으로 구성되었다.]의 임기는 5년이었고 1981년과 1986년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후보가 무소속으로 등록해야 했던 이 선거에 네팔의 정당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1981년 선거는 1959년 이후 22년만의 보통선거였음에도 투표율이 52%에 불과했다. 다당제를 지지한 사람들이 판차야트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얘기.] '''의회(1991~2002)''' * 1990년 네팔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국왕 비렌드라는 정당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고, 국왕이 임명하는 의원을 폐지[* 대신 왕당파인 '국가민주당'이 창당되어 총선에 참여하였다.]하였다. 1991년, 1994년, 1999년 세 차례의 총선에서 네팔 공산당이 번갈아 1당을 차지하며 양당 체제를 구축하였고, 국가민주당은 제3당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임시의회(2006~2007)''' * 국왕 비렌드라가 아들에게 피살된 뒤 왕위를 계승한 갸넨드라가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독재 정치를 하고 이에 반발하는 마오주의자가 내전한 끝에, 2006년 민주화운동(Loktantra Andolan) 승리로 구성된 임시의회[* 갸넨드라가 해산했던 의회의 의원과 임명직 의원을 합쳐 330명으로 구성되었다.]가 임시 헌법을 만들어 그 때까지 존재하며 상원 역할을 하던 국왕 주도의 국가 회의를 폐지하고 단원제 국회를 만들었다. 이 임시의회는 위의 한 문장으로 끝내기에는 중요한 결정을 하였는데, 통합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의 의원인 비디아 데비 반다리가 올린 '''의원의 3분의 1 이상을 여성으로 선출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이다. '''제헌의회(2008~2017)''' * 임시의회가 만든 임시헌법에 따라, 새 의회는 정원 601명으로 지역대표 240명[* 지역구 120개에서 2명 씩 선출]과 비례대표 335명, 의회 임명 26명으로 구성되었다. 2008년 4월 10일 실시된 총선에서 마오주의자는 229명[* 지역대표 120명, 비례대표 100명, 의회 임명 9명][* 1위이든 2위이든 120개 모든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단 얘기다.]을 당선시키며 제1당이 되었고, 전통적인 양당이던 네팔 회의당이 115석, 네팔 공산당이 108석을 얻었다. 왕정을 지지하는 국가민주당은 지역구 당선자 없이 비례대표 단 4명 만이 당선되어 네팔의 왕정 폐지는 시간 문제가 되었다. 결국 2008년 5월 28일 개회한 새 의회는, 첫 의제로 왕정 폐지를 올리고 찬성 560, 반대 4로 왕정을 폐지했다. 헌법 제정이 늦어 2013년에 제헌의회를 다시 구성했다. '''의회(2017~)''' * 새 헌법에 따라 구성한 첫 의회이다. 제헌의회보다 의원 수가 줄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