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태우 (문단 편집) == 여담 == * 따로 서예가 스승을 두는 등 노력하면서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지만 경매에서는 거의 거래되지 않는다. 시장 가격은 80~100만 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전두환의 서예 작품 시장가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수준이다. || [[파일:external/ppss.kr/%EB%85%B8%ED%83%9C%EC%9A%B02.jpg|width=100%]] || [[파일:external/www.insaauction.com/DI1307000048.jpg|width=100%]] || * 박정희의 친위 세력이면서 12.12 반란까지 주동한 하나회 출신이면서도, 그는 전두환과 다르게 학창 시절에도 그렇고, 육사 시절, 박정희 시절에도 상당히 지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육사에서 [[영어교사]]까지 한 적이 있으니... 특히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1년 형이면서 친구이자 전우이기까지 한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 보내다시피 쫓아내고, 대표적인 정적 중 하나였던 김영삼, 김대중을 포섭하려 했으며, 김영삼과 연합해서 3당 합당을 한 것과, 대통령 시절에도 김영삼을 포함한 여러 인재들을 불러서 주요 현안에 대해서 자주 토론한 행보도 그렇고, 그가 남긴 업적도 은근히 많은 데다, 아들인 노재헌도 광주를 직접 여러 차례 방문하여 5.18에 대해 거듭 사과하고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하는 상당히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등, 앞에서 서술한 상당히 흥미로운 행적으로 인해 재평가하자는 의견이 매우 많이 보이는 대통령이다. 현재는 노태우 자체도 상당히 좋은 대통령이었다고 [[재평가]]하는 경우도 많이 늘어났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죽을 때까지 매우 싫어하던 김영삼도 이런 행적 때문인지 노태우는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판받은 시기인 1996년 방영된 [[SBS]] 코미디 프로그램 '코미디 펀치펀치'에는 '배워서 남주나' 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에서 전두환 역으로 출연하던 [[박용식]]과 함께 역시 노태우 역으로 출연했던 [[김기섭(배우)|김기섭]]이 캐스팅되었다. 여기서 김기섭의 '친구야~' 라는 [[유행어]]는 당시에 대 히트였다. 덕분에 지금도 많은 이들이 노태우 [[성대모사]]를 할 때 흔히 '친구야'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둘 다 MBC드라마 출신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더 아이러니하게 SBS의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에서 전두환을 맡았던 [[정종준]]도 여기 출연했다. * [[영어]]를 매우 잘했다. 그의 영어 실력 덕분에 한때 영어 교관을 했을 정도로 팔방미인이었다. 1989년 10월 미국 순방 당시에는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영어로 연설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승만]]의 1954년 미국 국회 연설 이래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두 번째 사례였다.[[https://www.c-span.org/video/?9586-1/south-korean-president-address|#]] * 운동을 잘했다. 하지만 [[스포츠]] 자체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젊은 시절에 했던 [[럭비]]나 여가시간에 [[테니스]] 정도만 하는 수준이었다. [[축구]]나 [[야구]]에 [[복싱]]에까지도 관심이 많았던 전두환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역시 [[정치인]]이자 체육계 인사였던 [[민관식]]이 생전 회고록에서 둘을 비교하면서 은근슬쩍 노태우를 폄하했다.[* 민관식이 사망하기 직전 중앙일보에 회고록을 연재했는데 전두환은 체육계 전반에 관심이 많아 집무 당시에도 자신을 종종 찾았고, 심지어 퇴임이 임박했을 때도 사람을 보내 몰래 본인 비자금을 풀어 체육시설이나 인프라 확충에 투자를 했다. 하지만 노태우는 아예 관심이 없고 투자도 미비했었다고 밝혔다.] * 딸 [[노소영]]의 딸인 외손녀 [[최민정(1991)|최민정]]이 해군 장교로 임관했다. 2017년 11월, [[중위]]로 전역. [[파일:최민정(해군).jpg]] * 2015년에는 암 투병 중이고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2015년 11월 22일 KBS 뉴스가 밝혔다. 같은 날 사망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직접 가지 못하고 아들 [[노재헌]]을 대신 보냈다. 빈소를 찾아간 노재헌은 고인의 아들인 [[김현철(1959)|김현철]]을 만났는데 [[파일:/image/001/2015/11/25/PYH2015112505060001300_P2_99_20151125132705.jpg]] 둘 다 각자의 아버지와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010629|#]] * 노태우가 [[장교]]였던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이 노태우와 [[차지철]]에게 권유해서 박정희와 그 가족들, 차지철과 노태우가 휴가를 같이 갔었는데 차지철이 물에 절대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자, 박정희가 '물이 무섭냐'고 묻자, 차지철이 '저희 어머님이 물에 들어가지 마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물에 들어가지 않았었다고 회고했다.(출처: 노태우 회고록) * 부모님 중 한 분이 대통령 취임 당시에 생존해 있던 대통령이기도 하다. 노태우의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07~1999) 여사는 생전에 아들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지켜본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권한대행까지 범위를 넓히면 [[참여정부]] 시기 [[고건]] 전 [[국무총리]]의 아버지 [[고형곤]] 전 전북대학교 총장도 포함.] 나머지 사람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버지 김홍조(金洪祚, 1911~2008) 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어머니 강한옥(姜韓玉, 1928~2019) 여사,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현직 대통령]]의 부모 [[윤기중]] 교수와 최정자 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이후 김태향 여사는 아들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6년 뒤인 1999년 4월 5일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는 선거운동을 했는데 어디서 섭외했는지 여자 어린이를 안고 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그 여자 어린이는 1980~1981년 생 정도로 추측된다.[[https://brunch.co.kr/@brunch699f/1|#]] *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미남]]인 인물로도 손꼽혔으며,[* 키가 178cm[[https://blog.naver.com/torrancejoy/90045326046|#]]로, 사실 [[1930년대]] 생 치고는 키가 훤칠한 편이고 너무 몸이 옆으로 벌어지거나 골격 전체가 큰 것도 아닌 날씬한 체형이라 외모적으로 어필한 측면도 상당히 있으며, 기본적인 표정이 웃는 상이라 이미지에서 호감을 준 측면도 크다. 대통령 이전과 이후 촬영된 사진들만 봐도 전두환, 김영삼보다 확실히 크며, 김종필보다도 약간 크다. 근데 사실 오히려 노태우는 유전자에 비해 못 큰 편이라고 하는데, 요절한 노태우의 아버지 노병수는 키가 189cm인 엄청난 장신이였다고 한다. 사실 젊은 시절 외모는 김대중, 김영삼이 더 낫다고도 할 수 있다. 김대중도 나이가 들어서도 무난한 외모였고, 김영삼은 민주화 운동으로 고생을 많이 했고 [[60대]]에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미남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사실 그도 젊었을 때는 외모가 준수했던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양김은 1987년 대선 즈음엔 이미 모두 60대 [[노인]]들이었으니...][* 대통령 중 가장 잘생긴 축은 [[문재인]]이다.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미남이었으며, 정계에 몸담던 시절에도 [[미노년]]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다.] 실제 당시를 살던 어르신들 사이에서 [[부처님]] 상이라면서 노태우를 뽑은 사례도 존재한다는 얘기가 돌곤 한다.[* 흔히 노태우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 등을 평가할 때 중요하게 다뤄지는 요소 중 하나가 '준수한 외모' 이다. 정치인을 신념이나 재능, 정책이 아니라 외모로 평가한다는 것이 좀 웃기게 보이기는 하지만 현대와 같이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호감가는 외모가 정치인의 중요한 자산 중 하나였던 것이다. 긴단히 말해, 정치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창구 자체가 현재보다 훨씬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인 만큼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정치홍보물인 선거 포스터등에 멋있게 나와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호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위의 전 대통령들과 차이라면 특이하게 젊었을 때보다도 중년에서 초로기의 인물이 더 좋다는 거다.[* 다만, [[노동자]] 출신 [[시인(문학)|시인]]으로 유명한 [[박노해]] 같은 이는 "화이트칼라들은 노태우의 외모가 호감형이라고 하던데, 내가 보기엔 저렇게 간사해보이고 기분나쁜 얼굴이 또 없다! 사람의 외모를 두고서도 계급적 입장이 이렇게나 다르다!"라고 맹렬하게 [[디스]]했다. 기본적으로는 군사독재정권을 혐오했던 박노해가 아무 말로 노태우를 디스한 것이기는 하지만... 육체 노동자의 비율이 지금보다 훨씬 높던 당대에도 별로 고생 없이 산 것처럼 탱탱하고 부드러운 인상이 호감가는 외모로 받아들여지고 거친 환경과 고된 노동에 시달려 거칠고 까맣게 타고 주름도 많은 외모는 '초라하고 거칠어 보인다' 고 받아들여지던 세태에 대한 풍자로 보기도 하니, 참고하여 각자 알아서 판단하자.] 때문에 자녀 [[노소영]]과 [[노재헌]], 외손녀 [[최윤정(1989)|최윤정]]과 [[최민정(1991)|최민정]]도 상당히 준수한 외모를 물려받았다. * [[삼김]]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은 모두 전두환은 싫어하였지만, 노태우에게는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다. 자신들을 거칠게 탄압한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그들의 정치 규제들을 풀어주었고 웬만해선 건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정국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삼김]]을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여기고, 만남을 자주가지며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려고 노력했다. 결정적으로 [[3당 합당|삼김 중 김대중을 제외한 나머지 2명과 힘을 합쳤다]]. *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과 힘을 합치고 화해를 하려고 노력을 한 반면 [[전두환]]에 대해선 [[백담사]]에 보내는 선에서 끝났다. 사실 [[박정희]] 정권 말기 실세 역할을 했던 [[삼대장]](전두환, 노태우, [[차지철]])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성격을 가진 노태우였으며 문민 정권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어느정도 노력은 했으나 문제는 노태우 본인이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일, 그것도 전두환에 이어 2인자라는 점, 사적으로도 전두환의 친구라는 점 때문에 군부독재를 청산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군부독재정권을 본격적으로 척결하기 시작한 것은 [[문민정부]]에서의 일이다. * 2017년 현재, [[구글]]에서 노태우를 검색해 보면 자동 완성으로 쌩뚱맞게도 노태우 수영복이 뜬다. 이는 그의 이름을 딴 별명으로 불리는 [[NTW-20(소녀전선)|NTW-20]] 때문이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gfl&no=1204535|실제 사진이 있긴 하다]]. * 2019년 7월 현재 1987년의 대통령 선거에 부정선거를 모의했다는 의혹이 외신을 통해 알려졌다.[[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190721/96621877/1|#]] * 전임 전두환의 뒤를 이어 두번째로 [[2월 25일]] 취임해서 [[2월 24일]] 퇴임한 대통령이다. 민주화 이후 이 기록은 이명박까지 이어진다. *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와 기일이 같다. 42년 차이가 난다. * 2021년 10월 26일 사망하면서, [[윤보선]], [[이승만]]에 이어 세상을 떠난 역대 대통령 중 세 번째로 장수했다. 이어 4주 뒤인 11월 23일 [[전두환]]이 사망함에 따라, 네 번째로 장수한 역대 대통령이 되었다. 여담으로 현재 생존 중인 역대 대통령은 6공화국 시기에 당선된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뿐이다. * [[러시아]]에는 '로대우(Ро Дэ У)'라는 잘못 전사된 표기로 굳어졌다. 성씨인 '노(盧)'야 원음이 '로'이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지만[* 실제로 '이' 씨도 '리(Ли/Ри)'로 옮긴다. 대체로 북한 쪽 인명의 경우 Ри로 쓴다.], '태'는 유성음으로 바뀔 여지가 없는데도 잘못 옮겨졌다. 원칙대로 쓰자면 Но Тхэу가 맞는다. * [[김종인]]이 그의 최측근으로 보건사회부장관, 경제수석을 맡았다. 당시 재무부 장관, 경제기획원장 모두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을 지명해서 경제수석으로 들어갈 정도의 왕수석이었다고 한다. 오랜 기간 정치 전략가로 활약한 김종인이 킹메이커 역할을 한 첫 대선을 13대 대선으로 보기도 한다. * [[여성가족부]]의 연혁을 되짚어 가면 초대 장관이자 '''유일한 남성 장관'''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전두환 정권 시기 노태우가 맡은 정무제2장관이 훗날 [[여성가족부장관]]으로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당시 정무제2장관은 국가안보 관련 업무를 맡았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후에야 오늘날처럼 여성 청소년관련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노태우가 여성 청소년 업무를 맡은 것은 아니다. * 젊은 시절 머리를 크게 다친 적이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른게 아니고 기차에서 객기부리다 추락해서였다. 당시의 열차는 느린 증기기관차가 운행했고 선로 역시 오늘날처럼 직선화, 복선화가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 속도가 30~50km에 불과했다. 그로 인해 열차가 커브를 돌때 뛰어들거나 뛰어내리는 도비노리(飛び乗り)가 [[일제강점기]]때부터 성행했으며, 이런 행태들은 산업화 이후 디젤기관차가 도입되고 열차속도가 빨라지면서 사라진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랐던 젊은 장교 노태우도 괜히 멋있어보이려고 부대까지 기차로 출퇴근하면서 열차가 정차하기 전 뛰어내려 플랫폼에 착지하는 짓을 자주 했는데, 그러다가 플렛폼 콘크리트 조형물에 머리를 크게 부딪힌 것이다. 당시 머리를 크게 다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나, 겨우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의지해 겨우 응급실까지 도착해 겨우 회복을 했다고 한다. 덤으로 이때 사관학교 동기([[김복동]])의 여동생이었던 [[김옥숙]]이 그를 간호해주면서 사이가 가까워져 결혼까지 골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에게 찾아온 지병 소뇌위축증에 어느정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 처남이자 [[민주자유당]] 의원인 [[김복동]]이 [[3당 합당]] 후 [[상도동계]]의 마찰로 인해 탈당계를 제출하고 [[동구 갑|지역구]]로 낙향을 시도하자, 경찰과 안기부를 동원해 [[동대구IC]]에서 다시 서울로 끌고 온 전적이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스마트폰은 커녕 [[핸드폰]]도 활성화되기 전이었으니 당연히 양대[* [[민주자유당]]과 김복동에게 러브콜을 보내던 [[통일국민당]].]당사는 김복동의 실종 소식에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3661636?sid=102|뒤집어졌고]], 김복동이 노태우와의 만찬에 합석한 모습이 기자들의 눈에 띄면서 겨우 일은 진정되었다. 노태우 입장에서는 절친한 동료이자 처남이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바꾸는것을 막기 위해 무리수를 둔 셈이다. 그러나 결국 김복동은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둘은 한동안 만나지 않다가 퇴임 후 1994년 1월 [[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3736832|노태우가 김복동의 딸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재회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