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도제 (문단 편집) == 사후 == 단도제가 처형된 뒤 문제는 대사면을 단행했다. 한편 단도제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은 북위에도 전해졌다. 단도제가 살아있을 때 북위 사람들은 단도제의 그림을 그려 귀신을 쫓기도 했는데, 단도제가 처형된 이후 북위에서는 "단도제가 죽었으니 남쪽은 두렵지 않다!"라는 말이 나왔다. 한편 유송에서는 다시 북벌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좌절되었다. 문제는 자신의 측근인 은경인을 불러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문제: 누가 단도제의 뒤를 이을 수 있겠소? >은경인: 단도제는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기에 위엄과 명성이 높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문제: 그렇지 않소. [[한나라]]의 [[이광]]이 살아있을 때 [[흉노]]는 감히 남쪽을 침범하지 못했는데, 뒤를 이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소? >---- >『[[남사]]』, 「단도제전(檀道濟傳)」 450년, 문제가 북위에 대한 북벌을 시작할 때 심경지는 단도제와 도언지에 대해 언급하며 북벌에 대해 반대했으나, 문제는 "단도제는 악인을 길러 스스로 생계를 도모했다"고 언급하며 심경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송서]] 심경지전(沈慶之傳), [[남사]] 심경지전(沈慶之傳)] 하지만 의욕있게 추진한 북벌이 실패하자 문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단도제를 처형한 것을 후회하였다. >단도제가 살아있었다면, 어찌 여기까지 왔겠는가! >---- >『[[남사]]』, 「단도제전(檀道濟傳)」 후대 [[당나라]]에서는 782년 [[안진경]]의 건의에 따라 고금의 명장 64명을 추봉하고 사당을 세웠는데, 이 64명의 명단에 단도제가 포함되었다. 송대에는 당나라의 관례에 따라 72명을 추봉하며 이때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십칠사백장전(十七史百將傳)』에서는 단도제의 이름이 올라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