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일민족국가 (문단 편집) ===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 많은 역사서가 [[한민족]]의 기원을 [[고조선]] 시대로 비정하고 한민족의 성격을 띄는 초기 집단으로 [[원삼국시대]] 부여계통인 [[예맥]]인과 한인(韓人)을 들고 있다. 외래인이 보기에 [[삼한]]의 의복, 언어, 풍습이 유사했던 것은 사서로도 확인되는 바이다. 일부 연구에서는 한계 또한 부여/예맥계보다 먼저 남하한 고조선 유민 출신으로 추정한다. 더욱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긴 하지만, 고조선과 부여와의 관계도 이민족이라고 구분할 정도로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 관점에 따라 부여/예맥계와 한계는 동질의식을 공유하기엔 거리가 멀었다고 보기도 한다. [[고구려]]는 피지배층의 일부로 [[말갈]]인이 있었고, [[백제]]는 내부적으로 [[부여]]계 백제인인과 [[마한]]계 백제인이 대립하는 상태였다. 그래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서로에게 문화적, 언어적[* 이기문, 고대삼국의 언어에 대하여 1984][* [[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20/05/466770/|고구려·백제와 신라는 언어가 같았을까?]]], 인종적[* (변태섭, 삼국통일의 민족사적 의미, 신라문화), (신형식, 신라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 선사와 고대)] 동질감을 느꼈고 스스로를 '[[삼한]]인'[* 노태돈,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연구』 38, 1982][* 역사적 삼한(마한, 진한, 변한)에는 고구려 일대가 포함되지 않으나, 삼국시대 사람들은 삼국이 삼한을 계승하였다고 인식했다. 삼한이 오늘날처럼 한반도 남부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 것은 조선 후기 [[실학]]의 영향이다.]이라고 지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는 이런 동족의식에 근거하여 통일의 명분으로 [[삼한일통]](三韓一統)을 내세웠고[*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과제, 김기덕] 이후에도 [[한(지역)|한]](韓)이라는 동족의식은 후삼국시대 고려가 계속 통일 명분으로 사용했다.[* 조선 시대에도 이어져 고종이 국호를 [[대한민국/국명|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는 명분]]이 됐다. 현대에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와 한민족(韓民族)이라는 말로 익숙하다.] 이를 보았을 때 삼국시대에도 중국의 '[[중화(중국)|중화]]'와 같이 보다 상위 단계의 공통 의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당전쟁]] 시기에 고구려인들과 백제인들이 신라에게 협력한 것에서도 이러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신라가 단일 정체성 만들기를 목표로 삼고 정책적으로 추진하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현대인들의 시각에서 보는 개념의 공통된 민족 의식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남북국시대]]까지도 신라와 발해 각국이 민족국가적 성격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발해]]도 그렇지만 [[신라]]가 삼국 백성들의 민족적 통합을 완료하지 못했다는 점은 [[후삼국시대]]의 난맥상만 보아도 확인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