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진시 (문단 편집) == 지리 == 당진은 4극점으로 볼 때 일그러진 평행사변형 형태로 남북보다는 동서가 긴 모양으로 북위 36°45′ ∼ 37°04′과 동경 126°25′∼ 126°51′사이에 위치하여 한반도의 기후형인 온대계절풍 및 대륙성 기후권에 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진은 온순기후에 해당되어 4계절이 뚜렷하고, 기후형으로 겨울철에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여름에는 남서계절풍의 영향을 받는 기후적 위치에 속하고 있다. 당진시 읍내동을 기준으로 서울까지 102㎞, 수원 90㎞, 평택 50㎞, 천안 66㎞, 청주 120㎞, 대전 136㎞, 공주 93㎞, 홍성 42㎞, 서산25㎞, 강릉 329㎞, 포항 386㎞, 부산 430㎞, 목포까지 326㎞ 떨어져 있다. 충남의 최북단에 위치한 당진시는 북쪽으로는 송산면, 송악읍, 석문면 등이 [[서해]]와 [[아산만]]을 경계로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과 [[안산시]] 풍도동, [[인천광역시]] [[옹진군(인천광역시)|옹진군]] 자월면[* 풍도, 육도 등이 속한 풍도동이 안산시 관할이며, 해수면 상으로 접한다. 세 지역 모두 바다 건너 마주보고 있으나 연결되는 도로가 없다.]이 접해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서해대교]]와 [[평택·당진항]]으로 [[경기도]] [[평택시]]와 접한다. 동쪽으로는 신평면, 우강면, 합덕읍이 [[삽교천]]을 경계로 [[아산시]] 인주면과 선장면에 접해있고, 합덕읍은 남쪽으로 [[예산군]] 신암면과 접하고 면천면은 예산군 고덕, 봉산면과 접한다. 서쪽으로는 대호지면이 [[서산시]] 대산읍과 지곡면과 접한다. 이 중 시 경계 남쪽과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은 바다를 건너야만 인접 지자체로 이동할 수 있었으나 북쪽 지역을 제외하고는[* 장기적으로 서해안권 산업 시너지와 서해대교 우회경로 확보를 위해 경기도 화성시와 당진시를 대교로 연결하자는 구상이 존재는 하나 현 시점에 실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다.] 다리 또는 방조제로 연결되어 양측을 편하게 오고갈 수 있다. [[서해안고속도로]]로 경기도를 벗어나면 가장 먼저 도달하는 곳. 간척 사업 이전 당진은 바닷물이 내륙으로 깊숙하게 들어올 수 있는 지형이었다. 지금도 당진시는 시 경계 2/3가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다 과거에는 전국에서 가장 조차가 큰 아산만의 특성까지 더해져 지금은 내륙으로 취급되는 당진읍, 합덕읍 지역에서도 밀물 때마다 서해로 나갈 수 있는 나루터를 운영할 정도였다. 거기에 북서쪽으로 튀어나온 반도적 특징으로 육로 상의 이동은 매우 불편하여 섬이 아님에도 해로로의 접근이 육로보다 편리한 묘한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특성 탓에 한국사에서 거의 비중이 없는 조용한 지역이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좋지 않은 일에 자주 연루된다. 중앙정부가 위치한 한양 및 경기도 지방과의 육상교통이 불편하다는 점 때문에 [[사화]]에 연루되어 왕에게 찍힌 선비들의 귀양지로 애용되었고, 해로교통이 편리하다는 점 때문에 [[유럽]] 상선들이 개항을 종용하며 수시로 도발하였다. 또한 서양 세력과의 교류 및 선교는 다른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고 이루어질 수 있지만 중앙 정부와의 소통은 어려웠기에 조선 말에는 옆 동네 서산과 함께 [[천주교]]가 빠른 속도로 전파된다. 당장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종교)|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고향이 당진시 우강면인 것을 그 예로 볼 수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알아챈 중앙정부는 이후 지역 내 천주교도들을 이 잡듯 찾아내 서산 [[해미읍성]]으로 모아 처형을 집행하게 된다. 1919년 [[3.1 운동]] 영향으로 4월 4일에 대호지면에 4.4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독립운동을 기려 647번 지방도에는 '4.4만세로'라는 도로명이 부여되었다.[* [[http://www.chungnam.go.kr:8100/multi/multiMedia.do?article_no=MD0001372195&med_action=view&mnu_cd=CNNMENU00014|4.4 독립만세운동의 태극기 물결 - 충청남도 미디어]]] [[경기도]]와는 아산만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어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과의 육상교통은 매우 불편했고[* 바닷길로는 석문면에서 인천항까지 50km가 채 안되는지라 과거에는 배타고 인천까지 학교를 통학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실제로 삽교호방조제 완공 이전에 하루 3회 당진지역의 나루터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가 운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느 충남 해안가 지역처럼 농업와 어업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다 1970년대 전국적인 간척사업을 거치면서 북부 해안에 대호방조제, 석문방조제, 삽교호방조제가 차례대로 건설되며 육상교통은 편리해졌다. 다만 산업화 시기 개발이 경부선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에 당진, 서산, 태안, 예산을 비롯한 충남 서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개발에서 소외되었다.[* 수도권으로 가는 유일한 길목이었던 충청 내륙 지역은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번영하게 된다.] 그 결과 당진은 방조제 건설로 드넓은 간척지와 평야지대를 얻었지만 90년대까지 침체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되자 당진에게도 빛이 오기 시작했다. 2000년 [[서해대교]]가 건설되어 [[서해안고속도로]]를 통한 수도권과의 교통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이다. 당진은 새로운 산업단지 후보지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현대제철]], [[동국제강]], [[KG동부제철]] 등 여러 철강 회사들을 유치하며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 들어서는 [[현대제철]] 고로까지 완공되면서 당진은 [[포항]], [[광양]]에 이은 국내 제3의 철강산업 도시로 부상했다.[* [[제7차 교육과정]] [[한국지리]] 과목에서도 철강산업이 발달한 곳 중 하나로 포항, 광양 외에 당진이 거론된다. 물론 1,2위와의 격차는 넘사벽.] 2012년 인구 증가의 기세를 몰아 시로 승격되었으며, 시 승격 이후에도 꾸준히 인구가 늘어나다가 관련 사업체들의 부진으로 2010년대 후반부터는 인구 증가세가 정체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