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광역시 (문단 편집) === [[대구읍성]] 관련 지명 === 원래 대구도 둘레 2.7km, 높이 5m의 [[한양도성]], [[동래읍성]]과 비슷한 성이 있었다. 바로 [[대구읍성]]. [[선조(조선)|선조]] 23년(서기 [[1590년]])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져서 [[경상감영]]을 유치하는 등 조선 후기에 [[경상도]]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 [[친일파]] [[박중양]]이 일본인 상권 확대를 위해 불법 철거하여 현재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대구읍성 성곽에서 나온 돌들은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동산의료원]], [[약령시(대구)|약령시]], [[청라언덕]]의 선교사 주택, [[신명고등학교]], [[계성중학교]] 등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들의 자재로 쓰였다. 하지만 대구읍성의 흔적은 대구 곳곳의 지명에 남아있다. 현재 [[대경권]] 최대의 번화가인 [[동성로(대구)|동성로]], [[1905년]] 들어선 [[경부선]] [[대구역]]에 의해 일본인 상권으로 발전했고 철물점 거리가 됐다가 최근 '''공구골목'''이라는 카페 거리로 조성 중인 [[북성로(대구)|북성로]], [[약령시(대구)|약령시]]와 [[대구제일교회]]와 [[계산성당]]이 있는 [[남성로(대구)|남성로]], 타올 판매점이 많고 돼지골목과 깡통골목이 유명한 [[서성로(대구)|서성로]]가 바로 [[대구읍성]] 동쪽, 북쪽, 남쪽, 서쪽 성곽을 허문 자리에 생긴 거리다. 그래서 동성로, 북성로, 남성로 바닥에는 옛 성벽이 있던 자리를 울퉁불퉁한 보도 블럭으로 표시해 뒀으며, 곳곳에 대구읍성의 흔적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설치되어 있다. 20세기에 대구 도심을 가리키던 관습 지명인 '''성내''', [[중구(대구광역시)|중구]] 산하 [[행정동]]인 [[성내동(대구)|성내1~3동]]은 대구읍성 내부에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며, [[조선시대]]부터 전국 3대 [[재래시장]] 타이틀을 지켜온 [[서문시장(대구)|서문시장]]은 대구읍성 서쪽 문에 생긴 시장이라는 뜻이다. 그 외에 [[동인동]], 남문시장, 서문로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