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성팔족 (문단 편집) === 목씨(木氏)/목리씨(木刕氏) === >[[문주왕|문주]]가 곧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두 자 성인데, 《[[수서]]》에서는 목(木)과 협(劦)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년]]) 9월 목라(木羅), 목협(木劦)이라고도 표기되었는데, 목협(木劦)은 목리(木刕)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목리(木刕)와 목라(木羅)가 《[[일본서기]]》에서 별도의 훈 없이 똑같이 '모쿠라'라고 읽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목라씨'''였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참고로 '刕'의 음은 네이버 한자사전으로 검색해보면 '가를 리' 하나만 나오지만 다음 한자사전에 의하면 '가를 리, 가를 례'의 2개가 나온다. [[https://dic.daum.net/word/view.do?wordid=hhw000000617&supid=hhu000000617|#]] 오자인 '목협(木劦)'이 목례라 표기된 경우는 후자를 따른 경우이다. 刕는 현대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그냥 '리'로 읽힌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조미걸취와 함께 웅진성 천도에서 큰 공을 세운 [[목협만치]](木劦滿致)가 전부이며, 《[[일본서기]]》의 [[목만치]]와 동일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야]] 관련 기록이 특히 많은 《[[일본서기]]》에 자주 등장하는 집단으로, 그 구성원 중 처음 이름이 거론된 [[근초고왕]] 대의 [[목라근자]](木羅斤資)는 근초고왕의 남정을 주도했다. 이외에 목씨로 여겨지는 사람으로는 목리금돈, 목리마나, 목리문차 등이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목라근자는 369년 3월 [[근초고왕]]의 남정에서 가야 7개국[* [[비지국|비자발]](창녕), [[금관국|남가라]](김해), [[탁기탄|탁국]](영산), [[안라국|안라]](함안), [[다라국|다라]](합천), [[탁순국|탁순]](창원), [[반파국|가라]](고령).]을 평정했고, 그의 아들 목만치는 아예 가야 태생으로 신라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금관국]]을 도우라고 파견됐던 왜국의 [[카츠라기노 소츠히코]][* 사지비궤(沙至比跪)라고도 한다.]가 오히려 금관국을 침공해 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이 백제로 도망치자 목라근자가 구원해주었다는 기록 역시 목씨가 근초고왕의 남정에 적극 참여하며 가야 소국들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또한 근초고왕 대에는 같은 마한 내부에서 한성백제의 마한 맹주국 자격에 여전히 이의를 제기하던 소국연맹체 [[침미다례]]의 정벌에도 성공하는데, 기록에는 따로 목씨가 참여했다는 내용이 안 나오지만 정황상 역시 원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전성기에는 20여 거수국을 거느리고 중국 [[서진]]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낼 정도 위상을 자랑했던 [[침미다례]] 연맹은 근초고왕의 정벌 이후 별 수 없이 백제를 맹주국으로 승인하게 되고 그 간접 세력권에 들어가게 된다. 420년, 18대 [[전지왕]]이 사망하고 19대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국정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다 왜국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475년 고구려 대군의 침공으로 위례성이 함락되고, 21대 개로왕을 비롯한 부여씨 왕족들이 살해되어 웅진성으로 남천할 때 문주왕을 보좌하던 사람이 목협만치였다. 《삼국사기》에는 목씨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한다. 목씨는 사비백제 시절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출신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진 않지만 목라씨의 출신이 [[마한]] [[목지국]](目支國) 지배층이라는 유력한 추측이 있다. 목씨의 '木'과 '目'은 발음이 통하고 성읍을 뜻하는 '지(支)'는 벌, 평야, 성을 뜻하는 '라(羅)'와 의미가 통하므로[* 다만 '라(羅)'가 평야나 성을 뜻하는 맥락으로 사용되었다는 근거는 확실치 않으므로 유의하여야 한다.], 목라씨는 천안 [[청당동]] 목지국에서 비롯되었다는 논리이다. 고대사회에서는 국명, 지명을 성씨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므로 아주 무시할 가설은 아니다. 또한 국명을 씨로 삼은 경우가 흔히 그렇듯이 목지국의 유력세력, 더 나아가 아예 왕족이었을 가능성도 유력하다.[* 목지국 일대는 백제 때는 대목악군(大木岳郡)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목주(木州)라 불렸으며 조선시대부터 목천(木川)이 되어 현대에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이라는 지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목지국에서 유래한 게 맞다면 현대까지도 끈질기게 목지국의 흔적이 살아남은 셈이다.] 한편 일본의 고대 호족 중 하나인 '키씨(紀氏)'가 목씨(木氏)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목(木)'을 [[일본어]] 훈독으로 읽으면 '키'가 되며 키씨(紀氏)의 유명한 인물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행적이 [[목만치]](木滿致)와 닮았기 때문이다. 혹은 역으로 키씨(紀氏)에서 목씨가 유래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키씨(紀氏)가 백제에 정착하며 성씨를 현지화하면서 의미에서 따온 한자인 목씨(木氏)를 자칭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6세기에 백제에서 나솔(奈率) 키노 오미 미마사(紀臣 彌麻沙)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노노베(物部)씨의 경우처럼 키(紀)씨도 일부가 백제에 정착하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경우는 키씨가 그대로 키씨로써 정착한 경우이지 정착하며 목씨로 바꾼 것은 아니다.] 키(紀)씨가 기록에서 목씨로 표기된 사례로는 키노 츠노노 스쿠네(木 角宿禰)의 경우가 있다.[* 이 이름을 '목각씨(木角氏)'라고 오독하기도 하지만, '키(木)'가 [[우지(성씨)|우지]](氏)이고 '츠노(角)'가 이름이며 '스쿠네(宿禰)'는 카바네(姓)이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 치환하면 그냥 '키 츠노(木 角)'가 되며 목각씨가 기록에 등장한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 이와 별개로 [[일본]]의 고대 씨족을 정리한 서적인 《신찬성씨록》에서는 일본의 '하야시노무라지씨(林連氏)'[* '하야시(林)'는 [[우지(성씨)|우지]](氏)이고 '무라지(連)'는 카바네(姓)이다.]가 [[백제]]인 목귀(木貴) 공의 후손이라고 서술하고 있어 하야시씨(林氏)가 목씨에서 유래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표기인 협씨(劦氏) 성을 가진 인물은 단 한 번도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의 기록에서 목협씨(木劦氏)라는 형태로 협(劦)자가 등장하긴 하나 협씨가 단독으로 등장하는 것은 중국 기록 뿐이다. 그 때문에 목리씨(木刕氏)를 착각하여 탄생한 결과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문휴(汶休)씨의 음이 '몬쿠'이기 때문에 발음의 유사성을 근거로 목씨의 다른 표기일 것이라는 추측이 존재한다. [[삼국시대]]는 아직 고려나 조선처럼 한자 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이라 표기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김복순 교수는 백제 유민 중 승려 [[경흥]]의 성씨라고 기록된 수(水)씨가 한자 모양이 비슷한 목(木)씨의 이표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수씨는 전후 문헌에서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데다가 전근대에는 한자 표기를 오독해서 잘못 옮기는 것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장 목리씨(木刕氏)의 경우 목협씨(木劦氏)로 잘못 읽혀져 중국 사서에 그대로 기재되기도 했다. 또한 한자는 모르고 발음만 알고 있거나 사용한 한자가 벽자라 필기가 힘들었을 때는 그냥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대체해서 적는 일도 흔했다.] 상당히 유력한 가설이다. 현재는 목씨가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 존재하는 목씨는 木씨가 아니라 睦씨다.] 목씨 후손으로 추정되는 [[나주 임씨]](羅州 林氏)가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나주 임씨#s-3.2|해당 문서]] 참조. * [[목라근자]](木羅斤資): 13대 [[근초고왕]] 대의 인물이다. 369년 정복활동을 벌여 특히 한반도 중남부 방면으로 크게 영역을 넓혔다. 목만치(木滿致)의 아버지이다. * [[목만치]](木滿致): 19대 [[구이신왕]] 대의 인물이다. 아버지 목라근자의 공적 덕에 [[가야]]에서 전횡하다가 420년 백제에서 나이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백제의 국정을 쥐게 되었다. 목만치는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며 왕에게 무례하게 굴었으나, 결국 권력 다툼에서 패배했는지 왜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 목금(沐衿): 21대 [[개로왕]] 대의 인물이다. 458년 개로왕의 요청에 의해 남조 [[유송]]으로부터 용양장군(龍驤將軍)을 제수받았다. 목(木) 자가 아닌 목(沐) 자를 썼다. * [[목협만치]](木劦滿致): [[개로왕]], 22대 [[문주왕]] 대의 인물이다. 475년 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문주왕을 호위해 웅진성으로 천도하는 걸 도왔다. * [[목간나]](木干那): 24대 [[동성왕]] 대의 인물이다.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예곤(解禮昆)과 함께 490년 북위군에 맞서 크게 이겼는데 특히 북위군의 선박을 뺏은 공로를 세웠다. 495년 광위장군(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에 제수되었다. * [[목리마나]](木刕麻那): 25대 [[무령왕]]~26대 [[성왕(백제)|성왕]] 대의 인물로, 그 행적은 모두 《일본서기》에만 나온다. 504년 10월 마나군(麻那君; 마나 키시)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부레츠 덴노]]에 의해 억류되었는데, 이듬해인 505년 4월 그가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순타태자]]로 추정)과 교대했다.[* 왕족인 부여씨가 아니라 귀족인 목리씨를 사신으로 파견한 데 대해 왜국이 불만을 제기한 듯하다.] 529년 3월에는 마나 갑배라는 이름으로 목윤귀, 마로(麻鹵)와 함께 [[안라회의]]에 참여했고, 543년 12월 중좌평으로서 [[사비회의#s-3.5|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목리불마(木刕不麻): 25대 [[무령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서기》에 '전부 목리불마 갑배(前部木刕不麻甲背)[* 《일본서기》에 적힌 훈을 그대로 한글로 전사하면 '젠호우 '''모쿠라후마''' 카후하이'가 된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516년 5월 왜국이 보낸 모노노베노 치치노 무라지(物部至至連)를 기문 땅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백제 땅으로 인도했다. * 목윤귀(木尹貴): 25대 [[무령왕]]~26대 [[성왕(백제)|성왕]] 대의 장군으로, 그 행적은 모두 《일본서기》에만 나온다. 529년 3월 장군군(將軍君; 이쿠사노 키미)으로서 [[목리마나]], 마로(麻鹵)와 함께 [[안라회의]]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고위관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당(高堂) 위에 있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543년 12월 하좌평으로서 [[사비회의#s-3.5|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목리미순(木刕眯淳): 26대 [[성왕(백제)|성왕]] 대의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는 541년 7월(나솔)과 543년 12월의 행적이 남아 있는데,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오가며 가야의 복국을 위해 노력했다. 543년 12월 덕솔로서 [[사비회의#s-3.5|가야 재건을 위한 내부 회의]]에 참석했다. * 목리금돈(木刕今敦): 26대 [[성왕(백제)|성왕]] 대의 인물로,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552년 5월 8일 중부 덕솔로서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해 백제와 가야를 쳐들어오려 한다고 알리며, 선제공격 진행을 위한 원병을 요청했다. 이듬해 1월 15일에 왜국을 떠났는데, 특이하게도 출발할 때의 덕솔(德率)에서 한 단계 격하된 한솔(扞率)의 관등으로 바뀐 채 등장한다. * [[목리문차]](木刕文次): 26대 [[성왕(백제)|성왕]] 대의 인물이다. 가야 일대를 놓고 신라와 경쟁이 벌어진 554년 1월 왜국에 파견되어 원병을 요청했으며, 이에 왜국의 우치노 오미(有至臣)가 원병을 이끌고 왔다. * [[목소귀자]](木素貴子): 31대 [[의자왕]], [[백제부흥운동]] 대의 인물.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왜국으로 망명했다. 목소귀자는 목소씨였던 걸로 보이는데 목소정무(木素丁武)라는 다른 인물에 대한 기록도 있기 때문. 목소씨는 목씨의 분가일 가능성이 커보이는데 근초고왕의 후손이라는 [[억례복류]](憶禮福留)가 부여씨를 사용하지 않았고 [[흑치상지]]로 유명한 흑치씨 같은 경우는 대놓고 백제 부여씨 왕가에서 분가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백제사회에서는 촌수가 멀어질 때마다 분가가 활발했던 것 같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