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제국 (문단 편집) === 근대화 추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광무개혁)] 대한제국 시기에 급속도로 근대화가 추진됐다. 정부 기관과 제도를 개편하여 13도를 골자로 하는 지방행정도 개편되어 오늘날 대부분의 [[도(행정구역)|도]]와 [[시(행정구역)|시]][[군(행정구역)|군]]의 구역과 명칭이 이때 탄생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시기인 [[건양]] 원년(1896년 8월) '칙령 36호-지방제도개정'으로 개편하였다.] 외국자본에 각종 부설권과 광산개발권을 주고 세금을 부여하였고 도로망과 등 기간시설을 구축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이전에 비하여 세수를 크게 늘렸다. 광무양전으로 경작지에만 국한되던 토지측량을 임야와 해안 등 모든 국토에 대해 호구조사 지질조사와 병행해 측량하여 종래의 토지결수를 늘리고 집세를 부과하였다. 서울 시내와 인천 간에는 전철이 다니며 대로변과 시가지가 정리되고 수많은 유럽풍의 근대 건축물이 들어섰다. 전기회사와 발전소를 설립하여 전신, 전화 통화가 가능해졌고 밤에는 가로등이 시내를 밝혔다. 복식도 크게 변화하여 1895년에 일본이 시행했던 1차 [[단발령]]은 실패한 반면 대한제국이 시행한 단발령은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행하였고, 중앙정부 관료들만 입던 서양식 복식도 지방관과 대중들에게 확대되었다.[* 을미개혁 때의 단발령은 엄청난 반발로 인해 철회하였다가 1900년에 고종이 단발령을 재공포하고 관리들의 양복 착용을 법제화하였다. 또한 관공서에 근무하거나 신학교에 입학하는 조건이 단발이어야 한다는 조칙을 넣어 상당수가 자발적으로 단발을 하였고 복식이 변화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버티는 사람은 있었다.] 상공업을 장려하여 한국인이 설립한 수많은 기업과 가게가 들어서고 많은 서양 문물이 전파된다. 오늘날의 많은 대학교 등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이 대폭으로 설립되어 근대식 교육이 시행되었고 공문서의 국문화 또는 국한문화와 함께 12개의 신문을 발행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과 군사력은 위협적이었고 그만큼 변화도 빨랐다. 광무개혁 이전에 방문했던 외국인 기자와 선교사들은 몇년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고 평가할 만큼 급진적이었다. 식생활에서도 서양 문화가 많이 도입 되었다. 대한제국 곳곳에 [[경양식]] 식당들이 개업했고 여전히 밥, 국, 반찬으로 먹었지만 한국인들도 서양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실제로 서양 음식을 먹는 한국인들 사진이 찍히기도 하였다. [[황제]]인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아예 궁전 내부에 [[카페]]를 만들어서 커피, 홍차, 디저트를 즐겨먹었고 수라상에도 사이다, 디저트, 커피, 홍차, 파스타, 스테이크, 돈까스 같은 서양 요리들이 차려졌다. 군사적으로도 많은 개혁을 진행하여 근대식 군대인 [[대한제국군]]이 탄생하였고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들을 양성하였으며 [[기관총]], 서양식 [[대포]] 같은 최신무기들을 도입했고 비록 사기당했고 무장이 빈약했지만 [[양무호]]라는 [[순양함]]을 도입했으며 초계임무 수행이 가능한 등대순시선 [[광제호]], 현익호와 민간에서도 상선으로 쓰인 증기선을 도입했다. 계급체계도 서양식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재정과 지지세력의 한계[* 당시엔 근왕사상이 충만했던 대다수의 민중들과 보부상은 고종을 지지했지만 친일 성향이 강했던 일부 독립협회의 인물들은 수뇌부의 여러 차례 정변과 고종내외 암살시도 등으로 고종과 척을 졌다. [[김홍륙독다사건]] 처리과정에서 고종에 반대하고 중추원 내각대신으로 앙숙인 박영효, 서재필을 뽑았다. 또 군주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을 근간으로 하는 공화제를 추진하여 당시엔 혁명적인 사상을 추구하자 격노한 고종이 해산시켰다.],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과 외국 자본의 침투로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제국 치곤 정치체제는 전제군주제를 탈피하지 못했고 재정은 황실비자금인 [[내탕금]]을[* 내탕금을 이용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당시 탁지부를 쥐락펴락 했던 고문들은 열강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이었기 때문. 다만 이들도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 내탕금이었다.] 통해 운영되는 비중이 컸다. 고종의 직권으로 정책의 추진력은 높았으나 일본의 지속적인 방해를 받았다. 1904년 1월 21일 고종은 국외에 중립을 선언했지만 2월 8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인천, 부산, 마산, 원산 등지에 군대를 상륙 후 서울을 점령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1904년 8월 22일 [[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의 고문정치가 시작되며 자주적 개혁은 끝나고 일본의 개입을 받게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