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로고 (문단 편집) == 편찬 배경 == 배경 부분은 <한국건설기네스(Ⅰ) 길(이덕수 지음-도서출판 보성각 간> 발췌 부분을 참조하였습니다. 원래 [[삼국시대]] 때부터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은 도로정책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치도 병가지대기(治道兵家之大忌: 길을 고쳐 닦는 일은 병가가 크게 꺼리거나 싫어함) 라는 숙종의 말이 그 단적인 사례로, 군사적 측면에서 도로의 역기능이 강조됨으로써 도로 건설은 곧 외적의 침략을 부른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런 도로들은 적군, 특히 주적이었던 북방 기마민족들의 주 기동 경로가 되어버리고 평지 특성상 방어에도 매우 취약해진다. 때문에 침략전쟁을 주로 수행하는 나라에서는 도로를 잘 닦아 놓을 필요가 있었지만 작은 [[예방전쟁]] 이상의 국가간 전쟁은 직접 일으키려 하지 않았던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거기다 [[조운선]]에 의한 수운이 있었기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모든 교통로는 몇개의 좁은 보도만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는데, [[고구려]]같이 넓은 벌판을 끼고 있다면 평시에도 도로를 통한 [[마차]]의 이용이 꽤 있기는 했으나 [[신라]]나 [[백제]]는 이미 전쟁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도로와 마차의 사용이 매우 적었고, 고려 건국 후부터는 아예 도로가 거의 사라지고 남아있는 마차 등은 의전용에 가깝게 변해가게 된다. 이후 들어선 조선 정부에서는 [[http://science.ytn.co.kr/program/program_view.php?s_mcd=1165&s_hcd=&key=201601110924188936|양마장]]을 설치하고 중국의 품종 좋은 말을 들여 북방 평지지역인 평안도에 한해 도로를 닦고 마차를 적극적으로 운용해보려 했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효율성이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별 재미를 보지 못해 그만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친 이후 사정이 달라지게 된다. 처들어올 마음을 먹은 놈들은 도로가 깔려있든 말든 잘만 처들어와 쾌속 진격했고, 오히려 방어를 하려던 조선 측이 지휘관의 늦은 속도로 인해 [[제승방략]]의 허점이 찔리거나 구원온 명나라 연합군에게 보급을 제대로 해줄 수 없는 등 불리한 상황을 겪게 된 것이다. 200여년간 평화를 누리며 전국적인 범위의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던 조선은 이때 처음으로 대난리를 겪은 후 기존의 문제점을 인식, 이후 이를 반성하고 삼국말 통일신라초부터 시작되었던 통금정책을 해제한 후 각지에 서서히 잔도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도로들을 기점으로 [[광해군]]의 [[수미법]], [[공행]]의 등장, [[장시]], [[보부상]]과 상설[[재래시장|시장]], [[객주]]와 [[여각]]등의 발달, [[상평통보]]의 발행과 한반도 최초의 전국적 화폐 유통 경제 구축 등이 이루어진다. 사상적으로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들어 [[유형원]]이 [[반계수록]]에서 도로의 중요성을 설파한 이래로 [[이익(실학자)|이익]]ㆍ[[유수원]] 등의 실학자들이 도로 및 교량 건설의 중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실학자)|박지원]], [[홍양호]] 등과 같은 북학파들은 낙후된 조선의 경제를 개혁·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레를 상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로개설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영조와 정조대에 이들이 평가받으며 이에 따라 한반도 전토에 도로 건설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다만 이것과 별개로 조선의 도로는 외국인들에게 꾸준히 까이는데 그들이 남긴 묘사를 보면 그렇게 규모가 크지는 않은듯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국가 도로에 대한 총집편이 바로 도로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