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빠 (문단 편집) ====== 독일 군조직의 과대평가 ====== 또 하나의 미신은 독일군의 조직이 매우 합리적이고 기계화 비율이 높은 군대였다는 것이다. 헬무트 폰 몰트게의 군 개혁 이후에 독일이 주변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적능력을 더 잘 활용 할 수 있는 참모본부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맞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2차대전시기 독일 군부를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더 나아가서 만슈타인, 구데리안, 롬멜로 이어지는 소수의 우수한 명장들로 인해 독일군의 전체 군조직 역시 필연적으로 그들과 동급이거나 조금 모자라더라도 다른 국가의 군조직 보다 우수하다고 확대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전쟁 내내 독일군의 두뇌를 수행했고 또 수행해야 했던 OKH(국방군 총참모본부)와 OKW(국방군 최고사령부) 같은 사령부를 중심으로 2차세계대전을 다시 본다면 실상은 웃기게도, 독일군은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육해공+친위대 간 군 내부의 갈등이 상당했다 본격적인 재무장에 들어간 1936년 부터 독일의 육군, 공군 그리고 해군은 나치 정부의 국방 예산을 자신의 조직이 조금이라도 더 받아먹기 위해 서로 사보타주에 가까운 신경전을 이어갔다. 괴링의 사병집단이나 다름없었던 공군 야전사단이나 나치당의 사병집단인 무장친위대가 각기 기갑부대를 거느리고 강대국들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전쟁에 참전한 것만 봐도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육군이 [[삼식잠항수송정|잠수함]]과 [[특종선 병형|항공모함]]을 보유하려던 일본군을 연상시킨다[* 물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은 나치 독일의 대립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나치 독일은 '''적어도 나치군끼리 총질은 안 했다.''' 즉 덤앤더머.]. 독일군의 기계화는 최일선의 기갑부대에 한정해서 잘되어 있었을 뿐, 보병과 포병의 수송은 기본적으로 발과 말이었다. 이렇게 독일군의 기계화는 이미 1차대전 이후 말과 노새를 퇴출한 미군은 물론, 미군에 수천대의 [[윌리스 MB|지프]]와 [[2½톤 트럭|두돈반]]을 랜드리스로 제공받은 소련군에도 미치지 못했다.[* 물론 소련군에도 기병대는 있었으나 정찰부대 수준이었다.] 또한 같은 육군 내부에서의 파벌 싸움도 상당했는데 그 중 OKH와 OKW의 갈등이 있다. 1차 대전 패전후 병기국으로 축소 개편당한 OKH(총 참모본부)는 히틀러 집권후 다시 이전의 명칭과 위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해서 루프트바페와 독일 해군이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하였고 루트비히 베크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1차대전 시기 막강한 권력과 비대했던 참모본부 시절을 생각하며 히틀러에게 육해공 통합 사령부를 요청했다. 새 사령부의 실권자 자리는 자신들, 육군이 가지기를 바랬으나 해군과 공군이 반대했고 괴링은 거의 발작했다. 예상과 달리 히틀러는 빌헬름 카이텔이라는 허수아비를 자리에 앉혔고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육군의 것이 아닌 히틀러의 것이 되어버린다. 동시에 블롬베르크를 압박하여 퇴역시켜버리고 충격을 받은 베크 역시 자리에서 물러난다. 후임으로 들어온 프란츠 할더 역시 OKW를 아니곱게 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OKW의 작전과장인 알프레드 요들에게 OKH의 작전에 간섭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살벌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히틀러의 지시로 베저위붕 작전을 준비하면서 OKH를 엿먹이게 된다. 이렇듯 서로 살벌했던 OKH와 OKW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로 프란츠 할더가 물러나고 쿠르트 자이츨러가 임명되면서 사이좋게 히틀러의 허수아비가 된다. 비단 OKW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나치 지지자와 OKH를 필두로 한 암묵적인 나치 지지자들 사이의 파벌 갈등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파벌간 갈등도 상당했다. 대표적인 예로 총참모장 베크가 물러나고 당시 제 1 참모차장이었던 만슈타인를 제치고 제 2 참모차장이었던 프란츠 할더가 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는데, 취임후 얼마되지 않아 만슈타인을 야전사령부로 좌천시켜버린 사례가 있다. 그 후 만슈타인은 히틀러와 접선하여 낫질 작전을 성공시키기 전까지 한직에 머물렀다. 군부 내부의 고위 장교 갈등도 상당한데 권력조차 없던 하급 장교들은 어떠했을지 의문이다. 이중적이고 비합리적인 명령체계의 문제도 있었다.그들은 독일 군부와 장군들은 우수했다면서 히틀러의 무능함을 물고 들어지지만 히틀러 없이는 의견 조율도 되어지지 않는 집단이 독일 국방군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덩케르크 포위망을 두고 일어난 일련의 갈등인데 구데리안과 클라이스트 및 현장의 기갑지휘관들과 프란츠 할더 vs 후방에서 보병으로 포위섬멸을 하고 있던 클루게 및 룬트슈테트를 위시한 구 세대 장교들 끼리 '방어선을 짜기 전에 포위 섬멸해야 한다' vs '대규모 공세 전에 보병들의 포위 섬멸이 끝나고 보급방이 안정되어야 한다'를 두고 실랑이 하며 시간을 버렸고 히틀러가 보다 못해 정지명령을 내리면서 의견이 반 강제로 조율되어진다. 현대에 와서는 학자들의 분석으로 덩케르크에서 정지시킨 히틀러의 판단이 희대의 오판으로 판명되었지만 당시에는 히틀러 뿐만 아니라 엘리트 독일 군부 내에서도 구데리안 같은 소수의 급진적인 장교들 이외에는 전황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발언을 하지 못했다. 결국 괴링이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다크나이트(...)를 자처하여 적들의 탈출을 용인하고 모든 욕을 들어먹으면서 허무하게 끝났다. 물론 대전 후반기에 가서는 히틀러가 브라우히치를 해임하며 총사령관 자리를 맡고 군부를 쥐락펴락했지만 당시에는 히틀러의 간섭도 총통 명령이나 OKW를 통해서로 국한되었고 OKH 총사령관으로 브라우히치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독일군이 혁신적이라는 이미지를 말할때 빠지지 않는 전격전, 그 중추를 맡은 집중운용 되어지는 기갑 전력 역시 초기에 독일 군부내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우선 전간기 전차는 느렸고, 보병의 매복에 취약했으며, 주행거리가 끔찍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의 전차들과의 소통은 커녕 전차 내부에서 승무원들끼리의 대화조차 불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론자들이 내세웠던 표면적인 주장이었고 실상은 보병이 전쟁의 중심으로 부터 밀려나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졌다. 선배들이 보병이 주력이었던 보불전쟁과 보오전쟁에서 영광을 누리며 퇴역하고 자신들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구 세대 장교들은 고작 수송병과에서 파생된 기갑이라는 신생병과가 아니꼬워 보였다. 기병장교들은 더 했는데 자신들이 맡았던 역할을 전부 물려주고 퇴역해야할 처지에 내몰려 구데리안식 기갑운용에 발작하며 반대했다. 웃기게도 구데리안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원에 소극적이던 군부를 대신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준 사람은 히틀러였다. 그의 지원에 힘입어 구데리안은 자신과 선임들이 주장해 왔던 기갑교리가 받아드려졌지만 군부 내에서 나치의 후광을 업고 출세한 장군이라는 딱지가 붙게된다.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군은 총창모부부터 일선 장교까지 군사적 판단 이외의 사고가 굳어있었다. 모순적이게도 군인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자세이자만 이러한 사고가 독일을 1차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몰고갔다. 그들은 현상에 대한 모든 해결책을 전쟁에서 찾으려 했으며 전쟁이 외교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라 믿었고 심지어 외교가 전쟁을 위해 보조적인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몰트케가 경고했던 무조건적인 전쟁확대를 그의 후임들은 독일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독재자와 함께 그것을 실현하려다 자멸했다.[*출처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제프리 메가기 저.] [[나치의 비밀무기|독일의 비밀무기]]들이 양산만 되었다면 연합군을 이길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비밀무기들 자체가 일반 병기 양산에서 연합군에 밀리기 때문에 기획된 물건들이었고, 여기에 안 그래도 부족한 자원을 지나치게 분배하여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100식 전차|이와 비슷한]] [[G10N 후가쿠|시도와 행동을 한]] 일본군은 뻘짓이라 까면서 독일군은 "참신한 시도를 했다"라고 하고 있다. 현대에서 비슷한 예를 하나 들자면, 오늘날 [[북한]] [[조선인민군]]이 대칭전력으로는 한미연합군에게 상대가 안 되니 자꾸 [[핵무기]]라는 [[비대칭전력]]에 집착하고, 그걸로 과도한 군비를 지출하고 경제제재를 받는 등 국력이 자꾸 감소하면서 그나마 있던 대칭전력조차 점점 더 약해지고 있는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이같이 독일 장교진에 대한 평가가 높은 것은 같은 추축국이었던 일본과 이탈리아의 무능함과 대비되며 독일 장교들이 초반 선진적인 전법으로 판세를 부풀렸기 때문이다.[* 일본도 전쟁 초기 판세를 크게 부풀리기야 했지만 식민지를 점령한 일본과 달리 독일은 유럽 강국의 본진을 털었기에 고평가받는 측면이 있다. 태평양 전쟁 초 일본의 급격한 팽창은 독일이 유럽 대부분을 정복했기에 가능했다.] 분명 대전 초기 독일군은 획기적인 전략으로 전 유럽을 점령하며 승승장구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무리한 전쟁의 결과로서 독일은 패전에 따른 인명피해, 전국토의 황폐화, 연합군의 점령과 뒤이은 동서독 분단, 그리고 영구적인 동방 영토의 손실 등 참혹한 대가를 치렀으며 당연히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독일 장교진도 이에 대해 결코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