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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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독일+빠. 독일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시아로 한정한다면 와패니즈의 서양 버전으로, 여러모로 상당히 대칭적이다. 특히 한때 벤치마킹의 대상이었고 2차 대전에서는 같은 추축국이었다는 걸 의식해서인지 일본쪽 미디어에서 독빠적 기질을 보이는 경우가 꽤 많이 있으며, 한국에서도 일본 문화 덕후들이 독빠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와패니즈에도 순수하게 일본문화만을 좋아하는 양성이 있는가 하면, 일본의 병크나 군국주의까지 옹호하는 악성이 있는데, 독빠도 이런 양성과 악성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2. 분류[편집]
2.1. 밀덕 독빠[편집]
영어로는 Wehraboo(베어부)라고 한다. Weeaboo(일빠)+Wehrmacht(독일 국방군). 밀리터리 덕후로서 독일을 좋아하는 부류. 이쪽이 다수인데 국내에서는 이쪽도 크게 두가지 부류로 나뉜다. 이들이 다수인 이유는 국내의 자료 대부분이 일본을 거친 번역본(외서 → 일본어 → 한국어)이거나 일본발인 경우가 많아서 독빠 성향이 강한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빠나 러빠(정확히는 소련빠)들과 의견 대립이 일어나기도 한다. 영빠와 불빠와도 대립하지만 일단 미빠나 러빠에 비하면 소수라(특히 불빠) 주목받지는 못하는 편.
물론 아래에 서술할 문제점들은 객관적인 눈으로 독일군과 기갑 장비를 바라보거나, 나치에 대한 찬양 없이 그저 군복과 장비의 외관을 보거나 그냥 악의 세력인 게 좋아서 등의 이유로 좋아하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넓게 본다면 쿠로모리미네 여학원의 팬들이나 강철의 왈츠에서의 독일계 전차소녀, 벽람항로의 독일계 함희, 소녀전선의 독일계 총기 전술인형 등을 좋아하는 사람도 해당될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순수 밀덕(?)과는 구분되는 편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밀덕을 겸임하는 경우도 있다.
2010년에 접어들면서 월드 오브 탱크의 영향으로 국내 수 많은 독뽕 유저들에게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독일 트리의 경우 독일 전차 특유의 수직장갑 때문에 고통받은 수 많은 독뽕 한국인 유저들이 현실을 깨닫고 소련으로 갈아타거나 그나마 탈만한 미국이나 프랑스로 갈아타는 추세이다.
그런데 워 썬더의 상황은 정 반대이다. 거기는 아예 운영진부터가 독뽕/소뽕 의혹이 있는 관계로 (지상장비 한정)[1] 독일이 매우 강력한 편이다. 게다가 이미 독뽕 유저들에게 완벽하게 장악된 포럼은 이미 독일이 최강인 상황에서도 독일에 새 장비를 달라거나 버프시켜달라는 말만 나온다. 오죽하면 유저들은 포럼을 "퓌럼(퓌러+포럼)" 이라고 부르면서 비웃고 조리돌림하는 중.
독빠들은 수많은 밀리터리 게임에서 취급이 좋지는 않은 편이다. 머릿수와 활동력을 앞세워 포럼을 장악하여 여론을 강요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저 피드백을 받는 제작사가 고증과 밸런스를 오판하여 잘못된 패치를 하게 하기도 한다.
2.1.1. 제1차 세계 대전 독빠/문제점[편집]
2차 세계대전의 국방군과 현대의 연방군 빠들에 비하면 수가 적긴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제2제국 빠도 엄연히 존재한다. 오히려 요즘은 국방군&무장친위대빠나 연방군빠들보다도 더 기승을 부린다. 다만 밀덕, 특히 한국의 밀덕들 대다수가 워낙 1차대전엔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는 것일 뿐.
요새는 배틀필드 1 등 1차 대전 시대 독일군과 독일 제국이 등장한 게임들이 나와서 이들의 머릿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1차대전 독빠들은 2차대전의 독빠짓을 하다가 그 뿌리가 되는 독일 제국군까지도 숭상하게 된 부류가 대부분이고 오직 1차대전의 독일만 좋아하고 나치 정권 시절의 독일은 부끄럽다고 하거나 혹은 역겹다고 하는 부류도 몇 있다. 반면 독일 2차대전 고위직, 즉 히틀러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치 독일 수뇌부나 독일 원수나 장성들은 1차대전에 참전했고, 독일 제국군의 법통은 독일 국방군으로 바로 이어지기에, 2차대전의 독일 국방군을 찬양하던 독빠들이 1차대전의 독일 제국군까지도 찬양하는 경우가 많다.
나치 독일을 찬양하는 것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금기시되는데 비해, 독일 제국이나 독일 제국군에 대한 찬양이나 옹호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며 나치 독일 내에서도 SS가 아닌 독일 국방군에 대한 호평가는 어느정도 용인된다. 어쨌든 노구교 사건과 폴란드 침공을 시작한 추축국이 직접적인 개전 당사자인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해 협상국과 동맹국의 관계는 선악을 나누기 애매한 측면[2] 이 있고, 1차 대전 자체가 독일이 일으킨 전쟁도 아닐 뿐더러, 독일 제국 역시 다른 연합국인 러시아 제국보다는 삶의 질이나 인권 측면에서 훨씬 발전된 국가였으며, 유대인도 충성심만 있다면 독일 제국에서 받아들여졌을 정도로 인종 문제에서도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국이나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는 재학 중 귀국해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독일 유학생들은 적어도 자국의 전몰 학생들과 비슷한 대우를 해준다.[3] 물론 1차대전의 독일 제국 역시 군국주의-전체주의적인 국가였으며 전쟁 범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4][5] , 사상적인 관점에서 독일 제국을 옹호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사실 이 타 서유럽이나 미국 [6] , 러시아도 해당되는 바라 그렇게 문제시되진 않는다.
2.1.1.1. 독일은 지지 않았다는 착각[편집]
2차대전 국방군빠들과 마찬가지로, 1차대전 제국군빠들도 협상국(연합국)의 승리는 기적이다!이라거나 배후중상설을 굳게 믿고 독일은 1차대전에서 패한게 아니라 연합국들과 동등한 관계의 휴전을 맺은 것에 불과하다. 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독일 제국은 군사적으로 패배한 적이 없고 오로지 내부의 적. 즉, 독일 혁명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진 것에 불과하다 라고 주장한다.
일단 따지고 보자면 독일은 적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보다 열악한 상황이었는데, 전쟁에 모든 물자들을 소비하는데 영국 해군에 의하여 해상은 완전히 막혀버렸기에 내부의 상황은 순무의 겨울같은 끔찍한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적어도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은 제2제국같이 외교에서 엄청난 병크를 일으킨다거나 무리한 해상 작전에 실패하여 해양을 봉쇄당하는 등의 잘못을 피하고 광활한 영토와 나름대로 쌓여있던 외교관계, 식민지 등의 여러 자원들을 이용하여 독일과 비슷한 수준의 물자 및 식량난에까지 몰리지 않았다.
결국엔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으려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서 대양함대는 수상병영 신세가 되버리고 본토에 프랑스, 영국, 러시아인들이 오는 것을 막았지만 영향력은 어찌할 수가 없었던 1918년의 상황을 승리로 볼 수 있다는게 참 신기할 따름이다.
2.1.1.2. 프랑스군 비하[편집]
밀덕 독빠들의 특징이 항상 독일군의 라이벌인 프랑스군을 비하한다[7] 는 것인데, 마치 역사적으로 항상 프랑스군이 독일에게 호구 노릇을 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프랑스군이 독일측에 참패한 전쟁은 보불전쟁과 2차 대전 초기 뿐으로, 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과 프랑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협상국들과 동맹국들이 서로 대등하게 싸웠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나폴레옹 시절에는 아예 독일은 프랑스에게 있어서 주머니 속 동전처럼 굴려지는 존재에 불과했었고 30년 전쟁에서 독일을 수백 개의 소국들로 갈가리 찢어 버려 프로이센이 북독일 연방을 주도하기 이전까지 동네북으로 만들었던 장본인이 프랑스였다.
1차대전에서 독일을 포함한 각국이 참호전에 휘말려들어서 갖은 삽질을 했는데, 밀덕 독빠들은 마치 프랑스만 참호전에서 삽질을 한 것처럼 왜곡을 하고 있다. 애초에 프랑스군만 삽질을 했다면 진작에 독일이 1차대전의 승기를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참호속에서 사이좋게 죽어갔다. 전차가 도입돼서 참호를 돌파할 방법을 찾기 전까지 독일이건 프랑스건 영국이건 철조망과 기관총 사선에 보병들이 돌격해야 했다. 거기에 최초의 전차를 개발한 영국과 최초의 회전포탑을 개발한 프랑스하곤 다르게 성능은 그렇지 않지만 육상전함에 가까운 A7V의 성능을 1차대전의 티거라고 부르면서 장갑을 왜곡하기도 했다.[8]
또한 프랑스의 전략을 가지고 까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는 개전시 알자스-로렌 지방으로 진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알자스-로렌 지방은 역사적으로 독일계 공국들이 다스린 땅이었으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프랑스가 뜯어낸 땅이었다. 이를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가 다시 뜯어낸 것. 그러나 그 사이 이 땅은 상당 부분 프랑스화 되어 있었고(아일랜드 독립 시 영국으로 남은 북아일랜드를 생각하면 된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역사적인 치욕의 증거품이자 독일에게는 전리품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 당시 프랑스 국민이 느낀 치욕과 복수심을 일부 표현(더 자극하는 역할도 하였다)한 작품으로 마지막 수업이 있다. 그만큼 알자스 로렌 지방은 프랑스인에게 있어 잃어버린 땅이자, 회복해야만 하는 실지였다. 더군다나, 이 지방은 프랑스 석탄 및 철광석 생산량의 반 이상을 담당하는 요충지로서, 공업화의 원동력을 제공해주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이런 사정을 꿰뚫어본 슐리펜은 일부러 알자스-로렌 지방의 방어선을 깊고 느슨한 종심으로 짜고, 주공을 벨기에-네덜란드로 우회기동하여 프랑스군을 와해시킬 계획을 가졌다. 실제로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원안대로 실행되었다면 프랑스군이 포위되어 보불전쟁의 재현 또한 가능했기에, 전략적이고 승리지향적이기보다는 근시안적이고 감정적이며 지극히 정치적인 이러한 프랑스의 행보를 빌미로 까는것.
전부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논리라면, 독일 또한 똑같은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맹점. 굳이 히틀러까지 가지 않더라도, 1차대전시 독일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중 하나가 독일의 최대 오판이다. 독일의 모태였던 땅이자, 장교 및 지주들인 '융커'들의 기반인 오스트프로이센 지방이 러시아의 위협에 노출된다는 이유로, 프랑스 전선에 할당되어야 할 병력을 대거 러시아전선으로 재배치 한것. 심지어 벨기에-네덜란드의 주공을 빼서 알자스-로렌 지방의 종심방어선을 더 두텁게 하여 슐리펜 계획을 말아먹었다.
또한 1차대전 당시의 프랑스군을 정신론에만 입각하고 엘랑 비탈에 심취한 군대로, 2차대전 당시 일본군과 비교하며 깐다.
이는 과대한 논리 확장에서 나온 것으로, 정신론을 강조한 프랑스군을 따라한 일본군의 졸전을 프랑스군에까지 적용시켜버린 것이다. 실제 1차대전 원수이자 총사령관이었던 페르디낭 포슈의 명언인(어린왕자에도 인용되었다) "전투에 이기는 것은 결코 졌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의 정신론은, 2차대전에서 일본군이 채용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공통점만으로 프랑스군 전체를 일본군과 같은 레벨로 생각하는것은 지나친 비약. 비록 프랑스가 무리한 공세를 펴다가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참호전의 수렁은 그당시 어떤 군대도 피할 수 없었다. 독일군도 전쟁 막바지인 1918년 봄, 동부전선에서 끌어모은 병력을 합쳐 루덴도르프 공세를 펴다가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결국 전선을 돌파하지 못해 멈추었고, 그 여파로 바로 이어진 연합국의 반격인 백일 전투때 변변히 저항도 못해 보고 결국 항복에 이른것을 보면 독일이 엘랑 비탈에 심취해서 무모했던 프랑스보다 별로 나을 건 없었다. 이렇게 프랑스군을 과도하게 비하하는 경향은 독빠가 주류인 한국 밀덕의 특징이었던데다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 부족도 있었으며, 나무위키 내의 1차 세계대전 및 프랑스군 관련 몇몇 문서들에서 조차 이런 경향이 많이 보였으나 최근에는 1차 대전에 대한 정보가 많아짐에 따라 많이 개선된 편이다.
프랑스는 인구가 개전시 독일 인구의 반을 조금 넘는 60%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축국 주력인 독일 서부군을 끝끝내 막아냈으며, 당연히 승전국의 최고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9] 물론 독빠들은
동서의 양면전을 치루어낸 독일군은 물론 막강했지만, 1차대전의 승자는 결국 러시아를 제외한 연합국 측이었으며 서부전선의 주력은 프랑스군이었다. 끝물에 참전한 미군, 과다출혈로 도중에 이탈한 러시아군, 전쟁 중반 이후에나 섬에서 본격적으로 기어나온 영국군[10] 과 달리, 독일의 주력군과 처음부터 끝까지 맞상대한 것이 프랑스군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프랑스군이 독빠들이 말하는대로 비정상적인 군대에 무능하고 약했더라면 전쟁이 4년이나 갈 이유가 없다.
2.1.1.3. 독일 제국의 침략성 미화[편집]
그리고 1차대전 독빠들은 독일 제국은 "평범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전혀 다를 바 없거나 덜한 평범한 나라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피장파장의 논리는 위험하다. 당장 1차 대전 직전에 조선을 합병한 일본의 경우만 해도, 평범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버린다. 조선을 비롯한 수탈당한 수많은 나라들 입장에서, 그저 시대가 그랬다는 이유가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독일 제국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등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을 잔인하게 통치하기로 유명했는데, 타 제국주의 국가들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다만 명백히 악질 중의 악질이었던 나치 독일과 달리 1차 대전 시기의 독일은 절대악 개념이 아니었다. 만행의 규모나 기간을 놓고 본다면 더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이 독일을 욕할 처지가 못된다. 따라서 제국주의 문제는 독일만이 아닌 전 서유럽권이 반성해야 하는 문제이며 따라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영빠나 불빠 등도 독빠를 욕할 처지가 못된다.
2.1.1.4. 벨기에 학살 옹호[편집]
일부 독빠들은 1차대전 당시의 벨기에 학살을 옹호하기도 한다.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무력점령 하면서 1914~1918년까지 벨기에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수탈한 사건을 말하는데, 독일군의 고의적인 민간인 학살로 인해 1914년 한 해에만 1,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었고, 디낭 시에서는 700명 가까히 되는 인명이 살해당했다. 벨기에의 적은 인구를 고려해볼 때 절대 낮은 수치가 아니다. 그러나 독빠들은 "레오폴드 2세는 콩고인들 1,000만 명 죽였으니 벨기에는 독일한테 당해도 싸다"라며 제국군의 전쟁 범죄까지도 옹호한다. 덜하게는 "레오폴드 2세가 콩고 자유국 사람들을 백만명 넘게 죽이더니 기어코 그 업보로 애꿎은 벨기에 국민들한테 화가 미치는군." 하는 식의 유감 표명도 있다.
독일은 더도 아니라, 콩고의 바로 남단의 나미비아에서 1904년과 1907년 사이에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원주민 10만명을 학살했으며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이는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기록될만큼 잔혹한 것이었다.[11] 옆의 콩고에서 벨기에가 워낙 잔혹해서 묻혔을 따름이지만, 독일도 비슷한 짓을 한건 사실이니 벨기에의 악행을 들어 독일을 옹호하는 행태는 전형적인 내로남불 논리다.[12]
무엇보다 1차 대전 당시 벨기에 국왕은 레오폴드 2세가 아닌 알베르 1세였으며 살해당한 민간인들이 콩고 학살에 가담했던 것도 아니다. 이런 논리라면 미국도 필리핀을 침공해서 민다나오 섬의 필리핀인들을 학살했으니 훗날 진주만 공습에서 애꿎은 하와이 민간인들이 제로와 케이트 떼의 기총 소사를 당한 일,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이 미군 포로를 대할 때 행한 각종 학대 행위가 정당하다는 말이 된다.
2.1.1.5. 독일군의 전투력에 대한 과대평가[편집]
2차대전 독빠와 마찬가지로 1차대전 독빠 중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물론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확실히 강대국이었다. 나치 독일이 1939년 전쟁 발발 당시에도 제대로 체계화된 군 조직을 갖추지 못한 것에 비해 독일 제국은 1914년 당시 매우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군 조직을 갖춘 나라긴 했기 때문이다. 육군의 전투력은 세계 1위, 해군력은 세계 2위의 강대국이 맞긴 맞다. 그러나 독일과 맞서 싸웠던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들도 만만치 않은 나라들이였으며 독일이 그렇게 쉽게 호락호락 어찌해 볼 정도의 수준은 아니였다. 영국은 독일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던 세계 1위의 해군 강국이였고, 프랑스 역시 전통적인 유럽의 육군 강국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빠들은 슐리펜 계획이 갑작스런 러시아 제국의 기습으로 틀어져서 그렇지, 마음만 막으면 제 2제국이 프랑스는 물론 영국까지 손쉽게 정복하는 것이 일도 아니었다 라고 주장한다. 물론 독일 해군이 북해로 진출하는것을 막고 수상 병영 노릇을 하다가 종전을 맞이하게 만든 게 어느 나라인지 생각한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다. 더 심한 경우, 미국까지 정복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당시 미국은 2차대전 때와는 달리 천조국도 아니었고, 육군도 약하고, 공군도 없고, 해군도 약한 오합지졸의 덩치만 큰 나라라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13] 그건 미군의 이야기고 미국의 산업역량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기에 독일이 기적이 따라줘서 대영제국 해군을 격파한다 한들 과연 본토침공을 당한 미국인들이 앉아서 당해줬을리가 없다. 애초에 세계최강이던 대영제국을 힘겹긴 해도 어쨌든 막아내서 독립을 한게 미국인들임을 생각하면..2차 세계대전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1917년에도 미국의 경제력은 영국, 독일(둘 다 식민지 제외...라고 해봤자 유럽열강의 국력은 식민지보다는 그냥 본국의 산업역량에서 나왔던 것이고 식민지는 오히려 재정적자만 심각하게 안기는 곳이 많았다. 그나마도 독일은 식민지를 얼마 가지지도 못했고...)을 합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러시아 제국의 기습이라는 표현이 쓰여있는데,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로 선빵날렸지, 러시아가 먼저 선전포고하지 않았다. 또한 독일은 양면전을 필연적인 수순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를 위한 타개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애초에 러-프 동맹인 상황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러시아제국에게 기습을 맞았다는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독일 참모진이 일반인 이하로 무능하다는 주장이나 다를 바 없다. 애초에 슐리펜 계획을 수정안으로 바꾼 것 또한 독일 참모총장이었던 소 몰트케. 심지어 몇년에 걸쳐서 수정한것이기에, 러시아의 공격이 기습이라는 주장은 그 근거조차 불분명하다.
그 외에도 다른 볼트액션 소총과 별 다를 바 없는 Gew98이 리-엔필드나 르벨 M1886, 스프링필드 M1903보다 훨씬 우월하며[14] , 연합군은 꿈도 못 꿨던 기관단총이라는 물건을 최초로 개발했기 때문에 1차대전 당시 가장 시대를 앞서 내다본 국가라고 쉴드를 치기도 하지만 연합군 역시 MAB 18를 오히려 MP18보다 더 먼저 전선에 배치했고[15] M1918 브라우닝같이 현대의 분대지원화기의 근간이 되는것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특히 기관총에 열광하여 MG(08) 시리즈에 열광한다. 여담이지만 1차대전 때 최고의 기관총으로 각국에 라이센스까지 판매된 기관총은 맥심 기관총이고 MG08은 맥심의 독일판이다. A7V 전차 항목을 수정하여 전면 장갑을 다섯 배로 뻥튀기해서 작성하면서 A7V는 1차대전 최강의 전차이고 연합군 전차들은 죄다 밥이었다! 라고 적어놓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세 가지 주장 모두 아무른 근거도, 증거도 없으며 타당한 이유조차 대지않고 딱 '저렇다!' 라고만 말해버리니 황당할 노릇이다.
2.1.2. 제2차 세계 대전 독빠/문제점[편집]
무장친위대 역사재현동호인과 나치 물품 수집가가 무해한 취미 애호가인지, 아니면 사악한 행위인지는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중대한 도덕의 문제에 관한 절반만의 진실과 더 나쁜 것을 밀거래하는 행태는 가벼이 여겨질 수 없다.
---- 미국 툴레인 대학 교수 로렌스 N. 파월의《제2차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서평 中.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독일을 좋아하는 사람들. 독일 국방군이 물량이 딸리는 상황에서도 나름 잘 싸운 군대이기 때문에 이 점에 주목하여 빠가 된 경우가 많다.
2.1.2.1. 독일의 전과에 대한 편파적인 서술[편집]
2.1.2.1.1. 독일 무기 성능이나 기술의 과대평가[편집]
독빠들은 2차대전 독일의 무기체계를 절대 기준으로 삼으며 그것이 당시의 주류며 전술적으로 반드시 옳다고 보는 오류를 범하면서 독일과 다르면 이를 비주류며 틀린 선택으로 인식하는 문제를 가진다. 당연하지만 무기체계에서 주류, 비주류와 옳고, 그름은 없고 자신들의 전술 교리에 따라서 선택을 할 뿐이다. 거기다 성과나 결과는 제처두고 당시 베르사유 조약으로 묶여 있던 독일의 교리는 절대로 세계적 주류가 될 수도 없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독일의 전차들이 차장, 포수, 탄약수, 조종수, 무전수 5인 승무원 체계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 주류이며 다른 국가는 나중에 독일을 따라서 승무원 체계를 정립했으며 이를 따르지 않은 승무원 체계는 비주류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대표적 주류 전차 생산국인 영국은 무전수를 사용하지 않았고 이것이 현대 주력전차로 계승 되었으며 2차 대전 당시에도 사실상 주류였다.
이런 스펙상으로 보이는 숫자에만 현혹된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 환상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MG42. 특히나 히틀러의 전기톱이란 별명의 이유인 분당 1200발 이상의 연사력을 보고 빨아대는 경우가 많은데, 스펙만 보면 연사력 높은 게 당연히 더 좋고 만들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지만, 소형화기에겐 연사력은 성능이 아니라 특징에 불과하며, 기술적으로도 어렵지 않다. 이는 세계 최초의 권총탄 연발 기관총인 이탈리아제 빌라르-페로사가 현대의 미니건 수준인 분당 3000발을 발사한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고연사력=고성능 논리도 소형화기의 과도한 연사력은 정상적인 군대가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 현실에서 논파되는데, 똑같이 두세 발만 맞아도 죽는 사람에게 잠시 방아쇠를 당기면 초당 8발을 쏘든 20발을 쏘든 일은 똑같이 끝나지만 연사력이 과하면 쓸데없이 총알을 낭비한다. 다수 상대 측면에서도 분당 500~600발의 기관총으로도 1차대전 때 잘만 보병들을 갈아버린 경험이 있고, 탄막 형성 면에서도 연사력이 너무 빠르면 반동에 총기가 흔들려 명중률이 떨어지므로 못 맞춘다.[16] 반동을 팍 낮춘 대다수의 FPS 게임에서조차 무작정 난사하면 안 맞는데, 현실에서야 말할 것도 없으며, 연사력이 늘면 반동도 같이 늘어서 목표를 명중시키는데 배나 되는 탄약을 써야 한다. 그리고 탄약은 공짜가 아니며,[* 하이럼 맥심이 기존에 있던 구식 개틀링 기관총보다 연사력을 포함한 성능을 높인 자신의 신형 기관총을 팔 때 유일하다시피 덴마크 정부만 거절했다. 그 이유가 뭔고 하니 "연사력이 높아? 아마 총알을 낭비해서 10분 만에 나라가 파산할 거야."(...)] 독일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기관총 총알을 세어 가면서 싸웠다는 말로 유명한 국방군에게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설명이 필요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사력 높으면 최고라는 단순한 시각이 드러난 편집이 잦았는데, MG42 항목의 역사를 보면 "세계 최고의 명품 기관총"이니, "부정할 수 없는 최강의 기관총"이니 "처칠 전차도 단번에 뚫어버리는 기관총(...)"[17] 이니 하는 찬양 문구가 붙었던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탄종을 변경한 후계 기관총인 MG3와 비교해서 연사력이 낮아졌다는 이유로 개량품인데도 성능이 더 떨어졌다는 어처구니없는 서술이 강조 표시되어 있었다. 물론 사용 탄종의 변경으로 인해 사거리와 파괴력은 감소된게 맞기는 하지만…
이미 전세계에서 1000발/분 이상의 연사력은 쓸데없다는 시각이 많아서 연사력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잦으며, 총기 설계기업과 군대 모두 과도한 연사력은 장점이 아니라 문제거리라는 생각이 팽배한데다 그게 정석이다.[18] 이는 일부러 연사력을 떨어뜨려 사용하거나 아예 단발, 점사 기능을 넣는 현대 총기들을 보면 알 수 있으며, 끝까지 초월적인 연사력을 고집한 총기들은 민간이나 특수부대 등에만 관심을 끌다 제식 채용은 꿈도 못 꾸고 단종되는 경우가 잦다. 제식 기관총을 고를 때도 연사력이 낮은 것을 장점으로 보고 채용하는 선진국까지 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도 연사력 끝내주니 최강이고 최고라는 주장들은 나무위키는 물론이고 여러 사이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MG42와 그 후계기인 MG3이 종합적인 명품이라고 듣는 것은 성능 덕분이 아닌 새로운 기관총의 용도에 대한 선진적인 개념 덕분이다.
물론 MG42가 좋은 성능을 보유했던 기관총임은 사실이지만, 단점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위에 서술했듯 지독한 독일의 군수생산 비효율성과 빠른 연사력의 조합은 오히려 단점에 가까웠으며, MG42는 맨손으로 총열을 교체하지 못하지만, 동시기 체코의 Vz.26이나 일본의 99식 경기관총은 총열에 손잡이가 달려있어 장갑 없이도 총열교환이 가능함은 물론 캐링핸들 역할까지 겸해 MG42보다도 기동성이 우수했다. 또한 1950년대 후반부터는 벨기에의 FN MAG, 구 소련의 칼라시니코프 기관총 같은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해 MG42 계열들과 동등하게 경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투기 간 교환비가 크기 때문에 소련군 전투기의 성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기술도 있다.[19] 물론 2차대전을 통틀어서 소련군 조종사들의 평균적인 실력이 독일이나 서방연합군, 심지어 대전 초기 일본에 비해 뒤쳐지는 편이긴 했다. 당장에 고공성능에 문제가 있는 항공기들이 대부분이라 에너지 파이팅 같은 공중전 전술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
그리고 IS-2 문서의 경우도 IS-2의 화력과 장갑이 뛰어나다고 적혀 있으면 장갑[20] 을 지워 버리는 이들 독빠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연합군, 특히 소련군의 무기는 독일보다 무조건 열등해야 정상이다. 그리고 모든 육상장비 평가를 본 용도와 상관없이 독일 중전차에 맞서는 대전차전에 맞춰 평가하는 경향이 매우 심하다. 물론 전차의 주 목적 중 하나가 대전차 임무이긴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전차 특히 소련 전차들은 철갑탄보다 고폭탄을 많이 싣고 다니는 경우가 흔할 정도로 보병이나 벙커, 장애물 제거 등 다른 임무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IS 시리즈의 원래 목적은 최일선에서 벙커나 대전차포 등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122mm 고폭탄의 강력한 화력으로 제거하며 돌진해 전선을 찢어 놓는 돌격전차에 가까웠다) 그리고 SU-152나 ISU-152 같은 대전차전도 수행 가능한 다목적 자주포를 구축전차 설명하듯 설명하며 독일전차에 비해 열등하다고 까기도 한다.[21]
이러한 서술은 소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서 영국의 전투기인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문서에는 Bf109는 항상 스핏파이어를 상대로 2:1의 우월한 교환비를 보였으므로 영국을 구했다는 것은 영국인들의 정신승리에 불과하다라던가 스핏파이어는 항상 109보다 열등했다는 서술을 추가하기도 했다. 문제는 초기형~중기형 스핏파이어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109보다 약간 열세이기는 했으나(전반기에 스핏파이어와 109의 손실비는 1.2:1로 스핏파이어가 다소 열세이기는 했으나 후반기에는 잘못된 전술 등으로 인하여 격차가 더 좁혀졌다.) 그 격차가 크지 않았으며 개량에 따라서 우열이 뒤바뀌었으며 후기형은 전반적인 성능에서 스핏파이어의 우세가 유지되었다는걸 무시했다는 것이다.[22]
또한 영국 순항전차의 얇은 장갑을 까는데, 이는 그 얇은 순항전차와 3, 4호 전차의 장갑은 별 차이가 없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3, 4호 전차도 영국의 순항전차 개념에 큰 영향을 받아 순항전차와 비슷한 장갑을 가지고 있었다. 순항전차는 종이장갑이라고 까면서 3, 4호 전차는 까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들이 주로 믿는 미신은 독일의 과학기술이 연합군의 것보다 모든 분야에서 월등했다는 것. 독일이 2차대전 주요 참전국중 기술적으로 뛰어난 축에 든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타 강대국과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았으며, 연합국이 우세한 다른 분야와 자원 및 물량으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특히 VT신관과 레이더를 위시한 전자장비의 기술력은 영국이 독일에 비해서 월등한 수준이였고 공수부대원들의 낙하산조차도 연합군보다 저열해서 크레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독일이 다른 연합국을 압도하고 있었던 기술 분야[23] 로 V2를 앞세운 미사일 분야를 들 수 있는데, 그마저도 보병용 다연장 로켓은 추진체의 저열함 때문에 후기에는 소련의 항공로켓을 베껴서 사용했다. 그리고 V2의 개발이 미국의 로버트 고다드가 개발한 로켓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24] 항공기 제작 분야는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큰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25] 전투기뿐만 아니라, 대형 항공기의 제작기술 중 폭격기와 수송기는 미국에, 지상 공격기는 일본과 미국에, 대형 비행정은 영국과 일본에 절대적으로 못 미쳤다. 또한 많은 부분에서 미국, 영국, 심지어 소련이나 일본보다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가볍게 넘어간다. 영국의 글로스터 미티어보다 몇 개월 정도[26] 빨리 나온 Me262를 2차대전 유일 제트전투기로 둔갑시키고[27] 수십 년 전 인력 부족 때문에 후일 전쟁에서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사람 없이 움직이고 기관총만 쏘는 수준이 아니라 화염방사기들까지 쏠 수 있던 TT-26을 가지고 있던 소련이나 석유 엔진인 TT-26과 달리 친환경 에너지로 작동하는 나가야마 전차를 만든 일본 옆에서 프랑스 것 빼앗아 만든 무선자폭차량 가지고 전쟁에 사용된 최초의 로봇이라고 외치는 수준이다. 특히 Ki-84 하야테 항목은 레퍼런스까지 달아놓고 모든 포케볼프 모델보다 빠르다고 서술된 바로 밑에 독일기가 비웃는 속력이라고 써놓은 바도 있었다.
또한 그나마의 기술적 우위도 후진적인 생산공학(혹은 산업공학) 시스템으로 다 갉아먹은게 독일이다.[28] 중세때부터 내려오는 장인-도제 시스템 때문에 여러 무기의 설계/시험 속도는 매우 느렸으며,[29] 이 때문에 애써 연합국보다 우수한 무기를 내놓는다고 해도 적당한 성능의 병기를 대량생산한 연합군의 공세에 압도당하기 일쑤였다. 이런면에서 독일의 생산공학은 20세기 초반부터 포드주의로 대규모 생산체계를 확립한 미국은 물론 소련에도 뒤떨어졌다. 6호 전차 티거 1대가 T-34 10대와 맞붙어야 하는 상황은 독일의 자원이 부족했다기보다는[30][31] 독일의 후진적인 생산시스템이 낳은 문제점이었고, 결국 2차대전의 승패를 결정했다. 그러므로 연합국에 비해 부분적으로 앞선 기술적 우위만으로는 독일이 절대로 승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기술개발 역시 통상적 생산에 밀려서 미친듯이 발악한 결과 개발한 것이다.[32]
게다가 다른 국가에서 개발한 모든 기술은 무조건 독일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전후 개발된 모든 기술은 증거가 없지만 일단 독일에서 나온 것이며[33] 독일 기술의 복제품일 뿐이라는 것. 물론 V1 미사일을 미군이 카피해서 JB-1 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생산했던 등 일부 제대로 된 예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빠들의 문제는 새로 개발되는 무기는 당대의 다른무기를 참고하기 마련인데 단지 일부를 참고했다고 하나같이 전부 직계후손이나 카피품 취급하기 때문이다[34] 반대로 독일이 타국의 장비를 그대로 카피하고 약간의 변형을 준 물건은 완전히 똑같지는 않으니 독일 자체개발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이중잣대를 보여준다. 슬라이드가 총열을 감싸지 않은 권총만 보면 하나같이 죄다 루거의 영향을 받았다고 기가 막힌 주장을 하는 데서 이들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국가를 거치며 발전한 분야도 거슬러 올라가다 독일이 나오면 그냥 독일개발과 동일시 한다. 모든 화포가 화약을 처음 개발한 중국제라는 수준의 소리이다. 현대에도 독일이 유럽의 다른 국가와 공동개발을 하면 그냥 독일제로 취급해버린다.
거기다 이러한 독일 영향설이 상당히 오래되어 국내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잘못된 인식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판터를 보고 각 국가들이 주력전차를 만들어 판터가 주력전차의 시조라는 설과 3호 전차의 승무원 체계가 주력전차에 계승되어 확정되었다는 것들이다. 이 두가지 모두 현재는 해당 전차들의 문서에서는 모순에 대한 반박이 되어있지만, 국내에서 10년 이상 지속되어온 설들이라 인식이 고쳐지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릴 듯하다.
무기 성능 왜곡은 비단 서방 연합국과 소련군에 대한 왜곡된 서술에서 끝나지 않고, 독일의 동맹군 일본군까지도 번져나간다. 물론 일본군이 미흡한 무기에 엄청난 삽질을 많이 한 건 사실이지만, 무기 성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일까 성향에 독빠 성향이 덧붙어서 끝내주는 왜곡성 서술이 완성된다. 오랜 기간 동안 아리사카 문서는 왜곡의 절정이었으며,[35] 마우저 소총의 마이너 카피판이라는, 기도 안 차는 서술이 오랫동안 서술되어 있었다. 정작 아리사카의 화약은 프랑스식 화약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당시의 다양한 볼트액션 소총들 대다수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차라리 독일의 영향이 컸다면 모르겠지만 마이너 카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게다가 독일 무기는 독일 상태가 멀쩡해서 생산 라인이 잘 돌아갈 때 나온 최상품을 기준으로 평가하지만 일본 무기는 대전 말기 미군 폭격에 기반 시설이 모두 파괴되어 버린 후 막 만들어낸 상태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똑같이 대전 말기 성능이 구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아리사카는 성능이 별로이고 Kar98k는 볼트액션 계의 명총이라는 식이다. 치하가 천자총통에 뚫릴지도 모른다는 말이 안 되는 소리는 덤.[36] 최근에서야 감정적인 서술을 자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모자란 편이다.
2.1.2.1.2. 독일 전차에 대한 과도한 환상과 기대[편집]
문단이 길어져서 분리하였다. 이 문서로.
물론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나 독일과 관계가 약하거나 거의 없이 흑삼봉 팬인 사람,[37] 그저 포고 장갑이고 기동성이고 다 때려치우고 외양 때문에 독일 전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38]
2.1.2.1.3. 독일 군조직의 과대평가[편집]
또 하나의 미신은 독일군의 조직이 매우 합리적이고 기계화 비율이 높은 군대였다는 것이다. 헬무트 폰 몰트게의 군 개혁 이후에 독일이 주변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적능력을 더 잘 활용 할 수 있는 참모본부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맞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2차대전시기 독일 군부를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더 나아가서 만슈타인, 구데리안, 롬멜로 이어지는 소수의 우수한 명장들로 인해 독일군의 전체 군조직 역시 필연적으로 그들과 동급이거나 조금 모자라더라도 다른 국가의 군조직 보다 우수하다고 확대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전쟁 내내 독일군의 두뇌를 수행했고 또 수행해야 했던 OKH(국방군 총참모본부)와 OKW(국방군 최고사령부) 같은 사령부를 중심으로 2차세계대전을 다시 본다면 실상은 웃기게도, 독일군은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육해공+친위대 간 군 내부의 갈등이 상당했다
본격적인 재무장에 들어간 1936년 부터 독일의 육군, 공군 그리고 해군은 나치 정부의 국방 예산을 자신의 조직이 조금이라도 더 받아먹기 위해 서로 사보타주에 가까운 신경전을 이어갔다.
괴링의 사병집단이나 다름없었던 공군 야전사단이나 나치당의 사병집단인 무장친위대가 각기 기갑부대를 거느리고 강대국들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전쟁에 참전한 것만 봐도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육군이 잠수함과 항공모함을 보유하려던 일본군을 연상시킨다[39] . 독일군의 기계화는 최일선의 기갑부대에 한정해서 잘되어 있었을 뿐, 보병과 포병의 수송은 기본적으로 발과 말이었다. 이렇게 독일군의 기계화는 이미 1차대전 이후 말과 노새를 퇴출한 미군은 물론, 미군에 수천대의 지프와 두돈반을 랜드리스로 제공받은 소련군에도 미치지 못했다.[40]
또한 같은 육군 내부에서의 파벌 싸움도 상당했는데 그 중 OKH와 OKW의 갈등이 있다. 1차 대전 패전후 병기국으로 축소 개편당한 OKH(총 참모본부)는 히틀러 집권후 다시 이전의 명칭과 위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해서 루프트바페와 독일 해군이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하였고 루트비히 베크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1차대전 시기 막강한 권력과 비대했던 참모본부 시절을 생각하며 히틀러에게 육해공 통합 사령부를 요청했다.
새 사령부의 실권자 자리는 자신들, 육군이 가지기를 바랬으나 해군과 공군이 반대했고 괴링은 거의 발작했다. 예상과 달리 히틀러는 빌헬름 카이텔이라는 허수아비를 자리에 앉혔고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육군의 것이 아닌 히틀러의 것이 되어버린다. 동시에 블롬베르크를 압박하여 퇴역시켜버리고 충격을 받은 베크 역시 자리에서 물러난다. 후임으로 들어온 프란츠 할더 역시 OKW를 아니곱게 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OKW의 작전과장인 알프레드 요들에게 OKH의 작전에 간섭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살벌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히틀러의 지시로 베저위붕 작전을 준비하면서 OKH를 엿먹이게 된다.
이렇듯 서로 살벌했던 OKH와 OKW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로 프란츠 할더가 물러나고 쿠르트 자이츨러가 임명되면서 사이좋게 히틀러의 허수아비가 된다.
비단 OKW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나치 지지자와 OKH를 필두로 한 암묵적인 나치 지지자들 사이의 파벌 갈등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파벌간 갈등도 상당했다. 대표적인 예로 총참모장 베크가 물러나고 당시 제 1 참모차장이었던 만슈타인를 제치고 제 2 참모차장이었던 프란츠 할더가 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는데, 취임후 얼마되지 않아 만슈타인을 야전사령부로 좌천시켜버린 사례가 있다. 그 후 만슈타인은 히틀러와 접선하여 낫질 작전을 성공시키기 전까지 한직에 머물렀다. 군부 내부의 고위 장교 갈등도 상당한데 권력조차 없던 하급 장교들은 어떠했을지 의문이다.
이중적이고 비합리적인 명령체계의 문제도 있었다.그들은 독일 군부와 장군들은 우수했다면서 히틀러의 무능함을 물고 들어지지만 히틀러 없이는 의견 조율도 되어지지 않는 집단이 독일 국방군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덩케르크 포위망을 두고 일어난 일련의 갈등인데 구데리안과 클라이스트 및 현장의 기갑지휘관들과 프란츠 할더 vs 후방에서 보병으로 포위섬멸을 하고 있던 클루게 및 룬트슈테트를 위시한 구 세대 장교들 끼리 '방어선을 짜기 전에 포위 섬멸해야 한다' vs '대규모 공세 전에 보병들의 포위 섬멸이 끝나고 보급방이 안정되어야 한다'를 두고 실랑이 하며 시간을 버렸고 히틀러가 보다 못해 정지명령을 내리면서 의견이 반 강제로 조율되어진다.
현대에 와서는 학자들의 분석으로 덩케르크에서 정지시킨 히틀러의 판단이 희대의 오판으로 판명되었지만 당시에는 히틀러 뿐만 아니라 엘리트 독일 군부 내에서도 구데리안 같은 소수의 급진적인 장교들 이외에는 전황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발언을 하지 못했다.
결국 괴링이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다크나이트(...)를 자처하여 적들의 탈출을 용인하고 모든 욕을 들어먹으면서 허무하게 끝났다.
물론 대전 후반기에 가서는 히틀러가 브라우히치를 해임하며 총사령관 자리를 맡고 군부를 쥐락펴락했지만 당시에는 히틀러의 간섭도 총통 명령이나 OKW를 통해서로 국한되었고 OKH 총사령관으로 브라우히치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독일군이 혁신적이라는 이미지를 말할때 빠지지 않는 전격전, 그 중추를 맡은 집중운용 되어지는 기갑 전력 역시 초기에 독일 군부내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우선 전간기 전차는 느렸고, 보병의 매복에 취약했으며, 주행거리가 끔찍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의 전차들과의 소통은 커녕 전차 내부에서 승무원들끼리의 대화조차 불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론자들이 내세웠던 표면적인 주장이었고 실상은 보병이 전쟁의 중심으로 부터 밀려나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졌다. 선배들이 보병이 주력이었던 보불전쟁과 보오전쟁에서 영광을 누리며 퇴역하고 자신들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구 세대 장교들은 고작 수송병과에서 파생된 기갑이라는 신생병과가 아니꼬워 보였다. 기병장교들은 더 했는데 자신들이 맡았던 역할을 전부 물려주고 퇴역해야할 처지에 내몰려 구데리안식 기갑운용에 발작하며 반대했다.
웃기게도 구데리안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원에 소극적이던 군부를 대신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준 사람은 히틀러였다. 그의 지원에 힘입어 구데리안은 자신과 선임들이 주장해 왔던 기갑교리가 받아드려졌지만 군부 내에서 나치의 후광을 업고 출세한 장군이라는 딱지가 붙게된다.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군은 총창모부부터 일선 장교까지 군사적 판단 이외의 사고가 굳어있었다. 모순적이게도 군인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자세이자만 이러한 사고가 독일을 1차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몰고갔다. 그들은 현상에 대한 모든 해결책을 전쟁에서 찾으려 했으며 전쟁이 외교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라 믿었고 심지어 외교가 전쟁을 위해 보조적인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몰트케가 경고했던 무조건적인 전쟁확대를 그의 후임들은 독일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독재자와 함께 그것을 실현하려다 자멸했다.[출처]
독일의 비밀무기들이 양산만 되었다면 연합군을 이길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비밀무기들 자체가 일반 병기 양산에서 연합군에 밀리기 때문에 기획된 물건들이었고, 여기에 안 그래도 부족한 자원을 지나치게 분배하여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와 비슷한 시도와 행동을 한 일본군은 뻘짓이라 까면서 독일군은 "참신한 시도를 했다"라고 하고 있다. 현대에서 비슷한 예를 하나 들자면, 오늘날 북한 조선인민군이 대칭전력으로는 한미연합군에게 상대가 안 되니 자꾸 핵무기라는 비대칭전력에 집착하고, 그걸로 과도한 군비를 지출하고 경제제재를 받는 등 국력이 자꾸 감소하면서 그나마 있던 대칭전력조차 점점 더 약해지고 있는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이같이 독일 장교진에 대한 평가가 높은 것은 같은 추축국이었던 일본과 이탈리아의 무능함과 대비되며 독일 장교들이 초반 선진적인 전법으로 판세를 부풀렸기 때문이다.[41] 분명 대전 초기 독일군은 획기적인 전략으로 전 유럽을 점령하며 승승장구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무리한 전쟁의 결과로서 독일은 패전에 따른 인명피해, 전국토의 황폐화, 연합군의 점령과 뒤이은 동서독 분단, 그리고 영구적인 동방 영토의 손실 등 참혹한 대가를 치렀으며 당연히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독일 장교진도 이에 대해 결코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2.1.2.1.4. 독일군의 전투력에 대한 과대평가[편집]
이들은 독일군이 마치 천하무적의 군대였고, 연합국의 물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졌다고 착각한다. 특히 이들은 독소전에서 독일은 철저하게 소련군의 물량에 밀려서 결국 졌다고 말하면서, 소련군 전사자는 2,700만명이나 된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특히 데이비드 글랜츠가 발굴한 "르제프 전투"를 강조하면서 소련군은 사실 독소전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독일군이 서방 연합군을 막으러 서쪽으로 이동한 공백을 차지해 동유럽을 차지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결론내는 경우가 많다. 정작 데이비드 글랜츠는 "노르망디나 렌드리스가 없었어도 소련군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42]
소련군 전사자는 최소 700만에서 최대 1,100만 정도로 추산되며, 동부전선에서의 소련인들의 사상자가 1,6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더욱이 소련군 전사자가 700만이라지만, 순수하게 전투, 그러니깐 서로 제대로 싸워서 생긴 전사자의 교환비는 1:1.3 가량으로 추산되는 편.[43] 예를 들어 독소전 초기인 1941년에만 해도 독일은 소련군 포로를 335만 명 가량 잡았는데 이는 초기 소련군 병력에서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병력들이었으나 기습과 스탈린 서기장과 당의 혼선으로 싹 날려먹은 것이다. 이런 피해는 병력 손실에만 그친게 아니었기에 소련은 전쟁 초반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러면 전쟁 말기에는 독일이 이러한 전과를 보여주었을까? 물론 전술적 차원에서 독일군이 선전한 건 사실이고, 소련군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전략적으로는 분명히 제대로 잡아내지 않으면 질 수밖에 없는 전략적 거점들을 소련에게 내주고 그 결과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여 결국 전선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전차 및 자주포를 예로 들면 대전 후기로 갈수록 소련군과 독일군의 교환비는 1:1로 수렴해가며, 이는 독빠들이 무적이라고 찬양하는 티거와 판터가 나섰을 때의 교환비로서, 독일군의 주력이 3호 전차나 4호 전차였을 때보다도(약 1:5) 오히려 교환비가 나빠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독빠들이 소련군의 T-34 및 IS-2를 판터나 티거에는 상대도 안 되는 야라레메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애초에 기본적으로 전술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무기 간의 성능을 쉽게 비교하는건 말이 안된다.
유튜브 댓글 같은 곳을 보면, 승패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독일군 우세에서 영미 연합군/소련 우세로 넘어가는 전쟁의 전환점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거나 반대로 승패는 동부전선에서 결정났고, 서부전선에서 밀고 온 서방 연합군은 오합지졸들의 독일군을 격파해 온 것이며, 서방 연합군은 이런 오합지졸들에게조차 고전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된 소스는 오토 카리우스가 소련군을 높이 평가한 반면, 서방 연합군은 소련군보다 한참 아래로 평가했다는 단 한 명의 주장을 맹신하는데, 서방 연합군도 만만치 않은 독일군과 싸웠다. 코끼리와 코뿔소가 득시글대던 이탈리아 전선은 물론이며 노르망디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삽질이긴 했지만 네덜란드에서 영국군이 어그로를 끄는 사이 아르덴에서 미군이 독일군을 완전히 꺾어버리고 쾰른에 신형 중전차까지 배치하며 선전한게 서방측이며, 서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던 판터 전차나 티거 전차, 티거 2, 야크트판터, 나스호른, 엘레판트는 물론 동부전선에는 배치된 적도 없는[44] 야크트티거같이 상당히 강한 무기들이 배치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말을 한 카리우스는 야크트티거를 타고 미군을 잠깐 상대하다 종전되어 항복한 게 전부다. 그리고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의[45] 등뼈를 꺾은건 말할것도 없이 영국 해군/공군과 미국 육군 항공대이다.
독일군의 패전은 "히틀러의 실책",[46] "날씨와 같은 행운(특히 독소전쟁)[47] 에 힘입은 석패이고, 독일군의 승전은 "연합군이 범접할 수 없는 독일군의 압도적인 작전능력 및 우수한 지휘관 탓"이라는 왜곡도 있다.
정치장교의 삽질, 형벌부대 운용 같은 면에서 냉전 시절이나 독일군이 퍼트린 도시전설이 아직까지도 독빠들에게 진실처럼 여겨지고 있다. 나무위키의 어느 항목을 보면 소련군 정치장교들은 작전에 앞서 중무장을 한 독전대를 거느리고 돌격에서 낙오하거나 후퇴하는 병사들을 사살했다는 주장을 써놓고 있는데, 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초기처럼 소련군에 패배주의가 흑사병처럼 번질 때의 특정한 일화를 일반화하는 주장이다. 애초에 후퇴하는 아군들 몇 죽이려고 중무장한 독전대를 끌고 다니는 것은 병력과 자원의 낭비며, 공산당은 이러한 낭비를 지켜만 볼 정도로 무능한 집단은 아니었다. 또한 현실의 정치장교들은 뻘짓도 많이 했고 지휘 체계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었지만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가 죽어나갔고, 무엇보다 정치장교들은 공산당원이었고 독일군에겐 공산당원은 포로가 아닌 처형 대상이었다.
이런 독일측의 흑색선전은 자신들의 패배 원인을 소련인의 노예 근성으로 돌리고 소련인들의 애국심을 폄하하려는 독일군의 흑색선전에서 비롯되었다. 즉, 독일군은 애국심으로 싸우는데, 소련인들은 노예근성과 정치장교의 등떠밈으로 인해서 전선으로 밀려 보내진다는 주장이다. 이런 근거없는 낭설은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 그대로 묘사되어 소련의 참전용사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은 바가 있다. 이는 포로가 된 정치장교에 대한 처형을 합리화하기 위한 독일군의 흑색선전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형벌부대도 알려진 것보다 덜 잔인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자세한 점은 형벌부대 문서 참고.
소련군의 정치장교가 상당히 문제가 있는 조직이긴 했지만 적어도 군대의 기강을 잡고 사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으며 창설 목적은 군사 반란등을 일으킬 수 있는 용의자들을 체포하는 등의 문민통제를 위한 조직이었고, 독일 국방군은 이와 비교하면 아예 정부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문민통제를 씹어먹는 조직이었던데다 페르디난트 쇠르너의 사례로 알 수 있듯 국방군은 프로이센 전통으로 꾸며져온 광기의 절정이었다. 무장친위대는 본래 경호 조직으로 만들어졌을지 몰라도 결국 일선에서 학살과 전투를 병행하는 명목상 나치당 사실상 히틀러의 사병으로 변질되었으며 공군 야전사단이 괴링의 망상이 현실화된 존재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소련 정치장교의 비효율을 탓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 게다가 이렇게 독빠들이 과장하는 정치장교와 형벌부대는 소련군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독일군은 그보다 한술 더 떴다. 독일군은 대전 초기부터 소련군 못지 않게 형벌부대를 운용했으며, 특히 패전이 임박하자 히틀러와 OKW(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낙오병 사살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소련군 폄하는 자신들이 하면 위대한 승리를 방해하는 낙오자들을 사살하는 것이지만 소련군이 하는 낙오병 사살은 패닉에 빠진 정치 장교들과 학살일뿐이라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무엇보다 2차대전기 독일은 결국 패배했다. 물론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저평가받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어쨌거나 독일 정도의 강대국이 초기의 놀라운 전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은 독일군의 궁극적인 대전략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반면 연합국은 전쟁 내내 막대한 희생을 치렀지만, 그 과정에서 소련은 넓은 영토를 통한 지연전과 막대한 인력을, 미국은 막대한 자본·산업력을, 영국은 정보 기술과 해상·공중에서의 우세 확보에 각각 집중하면서 자국이 가진 강점을 잘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치가 강대했다고는 하지만 온갖 반나치 세력을 감안하면 나치 독일이 유럽에 미치는 영향력은 오늘날 독일이 유럽 연합에 미치는 영향력보다도 낮았고, 각론에서는 유능했을지언정 미국과 소련, 영국 등 주요 강대국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린 시점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전략적 실책을 저지른 것이었다. 군대의 목적은 질적·양적 팽창이 아니라 국가 전략에 맞게 최대한의 국익을 도모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미/소 양국의 지원을 받아 3차대전이 터지면 양쪽 진영을 대표해 유럽전선 최전방 탱커 겸 딜러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동독군/서독군이나 냉전 대립 구도 붕괴 후, 최소한의 역량만을 남겨두고도 필요한 일에는 충분히 임한 독일 연방군이 무적의 군대 취급을 받고 화려한 전공을 세웠지만 결국 궁극적으로 국가의 패망을 막지 못했던 독일 국방군보다 더 뛰어난 집단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2.1.2.2. 독일군과 히틀러의 전쟁범죄 물타기[편집]
연합국에 소속되었던 국가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들을 핑계삼아 나치 독일의 범죄를 미화하거나 변명하는 경우가 있다. 같은 밀덕이라도 전과 부풀리기 정도는 잘못된 지식 내지는 편향적인 빠심이 불러온 오류 정도로 이해해줄 수 있지만, 추축국 전쟁범죄 미화는 엄연히 현대 사회에서 금기시된 일이며, 도의적인 비판에 더하여 지역에 따라서는 법적인 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악질적인 죄이다. 물론 연합국의 죄과가 아예 없었다거나 필요악이었다는 식으로 옹호하는 것도 곤란[48] 하겠으나, 2차대전 연합국과 추축국의 민간인 사망자 수만 비교해 보더라도 양측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규모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나치 독일처럼 국가가 공식적으로 나서서 특정 인종의 절멸을 시도했던 국가는 심지어 다른 추축국들을 포함하더라도 단 하나도 없었다.[49]
2.1.2.2.1. 소련군과의 비교[편집]
나치 독일과 히틀러의 전쟁범죄나 야만성을 논할 때 흔히 소련의 스탈린이 카운터파트로 언급되곤 한다. 이는 양국의 이념이 극우와 극좌로 명확히 나뉘는 극단적인 전체주의 독재 국가였으며, 전후 냉전 체제에 접어들면서 소련이 나치의 뒤를 이은 자유세계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실제로 전시에도 교전 당사자들 사이에서 가장 격렬한 증오범죄가 오갔던 곳이 바로 동부전선이었기 때문[50] 이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 소련은 엇비슷해 보여도 파고들어가 보면 차이점이 제법 있다.
우선 반인륜적인 범죄의 추이를 살펴보면 일부 독빠들은 주로 소련의 잔혹 행위를 부각시키면서 정작 나치 독일의 문제점에 대해 물타기를 시전하고 적군 포로의 사망률·민간인 대상 전쟁범죄 추이 등 객관적인 수치를 감안했을 때 소련군이 연합군 내에서 가장 악질적인 군대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를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복수라는 식으로 정당화하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다.[51]
소련이 국가 주도하에 벌였던 전쟁범죄는 대전 초기 스탈린의 밀명 하에 폴란드인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졌던 카틴 학살 뿐[52] 으로, 이후 독일과의 전쟁 과정에서는 공식적으로 모든 형태의 대민 범죄를 엄금하여 헌병 노릇을 하던 NKVD 부대에 적발되면 엄벌에 처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 지도부가 초중반부의 전쟁범죄를 암묵적으로 허용하다가 문제가 되니 그제서야 통제했다"는 주장도 옳다고 보기 힘든 것이, 소련군은 대숙청으로 장교단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의 기습공격 여파로 초반의 지휘체계마저 거의 무너졌기 때문에 군에 대한 통제력이 다소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온갖 학살극을 저지르며 침공해 들어오는 "악마의 군대"[53] 에 맞서는 데 남은 여력을 끌어모아야 했기 때문에 다른 범죄를 엄격하게 처단할 수 없었을 뿐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침략을 당한 대상이었기 때문에 초중반부에는 주로 자국 영내에서 전투를 벌였고, 당연히 독일 민간인을 마주칠 일 자체가 많이 없었다. 자국민에 대한 범죄는 당연히 엄격하게 처벌했음은 물론이고.[54] .
반면 독일군의 학살극은 조직적인 차원에서 발생하였다. 당장 아돌프 히틀러부터가 '강조명령'이라는 이름 하에 슬라브인에 대한 철저한 말살을 촉구했고, 현지 독일 장군들은 대부분 이를 충실하게 따랐다. 국방군과 SS를 구별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이,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국방군 장성인 발터 폰 라이헤나우였고, 이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55] 를 포함하여 단 한 명[56] 을 제외하면 장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1,360만 장병(=즉 징집된 독일 민간인) 중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2백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은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역시 대표적인 예시이며, 이외에도 독일군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는 셀 수 없이 많다. 소련군 포로 학살도 만만치 않아서, 기록에 따르면 많은 수의 소련군 포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아우슈비츠 최초의 독가스 학살은 소련군 포로 600명과 유대인 250명에게 치클론B를 살포하여 살해한 것이었으며, 최종적으로 14만에서 50만 사이의 소련 포로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독일군 내 소련인 포로의 사망자는 독일 측 기록에 따르면 570만 중 330만(약 57.8%)에 달했고, 이는 NKVD 문서에 따른 소련군 내 독일인 포로의 사망자 추산인 273만 중 38만(약 13.9%)[57] 에 비해 네 배가 넘는 압도적인 수치이다.
한편 독소전쟁 말기 소련군이 동유럽을 진격하는 과정에서 200만 건이 넘는 강간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강간의 군대"라고 비난하기도 하나 정작 독일군에 의한 소련 여성 강간은 그 수십 배인 수천만 건에 달했으며 강간 후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58] 실제로 42년 한 해만 밝혀진 성범죄 건수가 1천만 건이 넘고, 75만 명의 신생아가 독일군의 강간에 의해 탄생했다.[59] 42년만 해도 이 정도인데,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41년부터 독일군이 소련 영토에서 거의 쫓겨나는 44년까지의 통계치를 다 합한다면?
반면 소련군은 1941년 이후 이런 식의 약탈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뿐더러, 승전이 가까워지고 점령지의 통제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부터는 강간 등 중범죄자들을 즉결처분하는 식으로 군 기강을 다잡았다.[60][61] 소련군의 강간사례로 베를린의 여인이 흔히 인용되는데, 베를린의 여인의 주제가 그런 쪽이 아니라는 건 둘째치고 "독일군이 소련에게 한 만큼 소련군이 우리를 대했으면 독일 민족은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 이라는 주인공의 대사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이율배반적인 태도이다.
애초에 국가 단위에서 대놓고 인종청소를 자행한 것과, 국가에서 민간인 범죄를 금지하는 상황에서 병사/지휘관 개개인이 민간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 죄질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정작 현재 독일 정부는 독일군이 먼저 동유럽 점령지에서 벌여놓은 짓이 있기 때문에 소련군의 만행들이나 전후 독일계 주민들에 대한 보복성 학살·추방에 대해 어떠한 외교적인 항의도 피하고 있으며, 기껏해야 자국 내로 도망쳐온 독일계 실향민들에게 약간의 보조를 해 주는 정도이다. 오늘날 소련군이 동유럽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는 주로 학술적 차원에서 논의가 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대전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끼여 많은 피해를 입었고 전후에는 소련의 식민지배까지 받았던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같이 나치에 맞서 싸웠다는 명분이 있는 서방연합국 쪽에서 비판하는 편이다.
2.1.2.2.2. 영국, 프랑스 및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의 비교[편집]
소련과의 비교 다음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 주로 대영제국 시기 영국의 행보나 콩고 자유국 시기 벨기에의 악행 등이 언급되지만, 이외에도 역시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나치만 욕먹는 것이 억울하다"는 식이다.[62]
특히 윈스턴 처칠의 벵골 대기근이 주요 타깃. 심지어 이것과 히틀러와 손기정의 악수[63] 같은 지엽적인 사례를 버무려서 "식민 제국들은 비백인을 차별했지만 나치 독일은 비유럽권에 대해서는 인종주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벵골 대기근은 당시 벵골 지방의 인프라가 엉망이었던 점,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 갈등으로 인한 지자체 간 비협조, 그리고 행정력의 미비, 태풍으로 인한 수확 감소, 전시 상황까지 복합적으로 겹쳐진 단순한 기근이기에 홀로도모르나 대약진 운동 당시의 기근과 같은 고의성이 없었다.
애시당초 식민지는 점령국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착취해도 무너지지 않고 유지가 가능할 정도만큼은 잘 경영해야 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점령국은 식민지를 착취할 땐 하더라도 어느 정도 개발하고 자국에 우호적인 엘리트들을 심어두려 했으며,[64] 오랜 식민지 경영 경험이 있는 대영제국은 이 분야의 대가였다. 반면 간디를 필두로 한 인도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히틀러는 영국 외무장관에게 조언이랍시고 이런 말을 한다. 간디를 사살하시오. 만약 그것으로도 복종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국민회의 지도부 열댓 명을 사살하시오.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면, 200명 등 질서가 잡힐 때까지 사살하시오. 그리고 나치가 네덜란드와 폴란드를 점령하자 진짜로 이런 정책이 실행되어, 독일군 하나가 테러로 죽을 때마다 공포감 조성을 위해 수백 명의 무고한 인질들이 끌려와 처형당했다. 심지어 레벤스라움을 위해 자신이 점령한 지역의 '열등 인종'들을 국가 정책으로 철저히 말살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별다른 충돌이 없다면 억지로 명분을 만들어 내서라도 학살을 자행했다.
정반대로 서구권에서는 다인종·다민족화 된 오늘날의 미국·유럽에 반감을 표하며 나치 독일을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으로 추앙하는 경우도 있다. 소위 "조상의 뼈 위에서 춤추는 패륜아들"이라는 사설로 유명한 러시아의 네오 나치들이 바로 이런 부류로, 이들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친 것이 실수였을 뿐 유대인과 기타 열등인종을 말살하고 '우월한 유럽 백인들만의 통합된 제국'을 건설하려는 방향성은 옳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 독일이 같은 백인 국가, 심지어 같은 권위주의 우파 정부에 불가침조약도 맺었으며 추축동맹국인 일본 제국(!)마저 반대했던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폴란드의 저항운동을 무참히 진압하고, 네덜란드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동유럽 백인들은 아예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걸 보면, 결코 백인 민족주의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애초에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오로지 게르만 민족만을 앞에 놓았고, 그 외의 인종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명예 아리아인' 취급하면서 일시적인 우호를 맺기는 했어도 근본적으로는 열등 인종으로 여겼다.[65] "히틀러가 다른 민족은 탄압했어도 우리 민족은 우대해줬을 거야"라는 건 말 그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물론 제국주의 식민지 경영은 분명 보편윤리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며, 인권이 발달된 현대 사회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한 어두운 역사이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악행은 일반적인 식민지 경영과 궤를 달리하는 이념적 잔혹성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근대화된 공장식 학살과 같은 국가 주도의 범죄를 낳았다. 그렇기에 제국주의를 이유로 나치즘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더불어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하여 유럽 열강들 중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운 나라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독일 역시 나치의 죄과와는 별개로 식민지 나미비아에서의 만행 역시 떠안고 가야 하는 처지이다.
2.1.2.2.3. 전략 폭격을 이용한 물타기[편집]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점을 들어 "연합군도 민간인을 죽였다"고 물타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략 폭격은 적국의 군수산업 역량을 약화시켜 장기적인 보급 및 전쟁수행능력을 저해시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는 공격자의 입장에서도 최대한 억제하려고 노력한다.[66] 물론 도쿄에서의 일처럼 적국 국민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거나[67] 히로시마 핵폭격처럼 수뇌부를 겁주려고 본보기로 국민을 날리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나마도 커티스 르메이와 아서 해리스가 지적했듯 "총력전 체제에서는 민간인들도 가내 수공업을 통해 군수물자 생산에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당화될 여지는 있으며, 실제로도 군수공장이 밀집한 지역을 선정하여 폭격하였다. 게다가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군사 목표물과 민간인이 섞여있을 경우 민간인만 피해서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68] 당시 연합군 장성의 일부가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 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당시의 기술 수준상 민간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면서 군사 목표물만을 타격하기는 불가능한데다 어쨌든 민간인들도 군수공장에서 일하며 전쟁 수행에 한몫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종종 지적받는 드레스덴 폭격이나 함부르크 폭격 역시, 드레스덴과 함부르크는 둘 다 주요 공업도시였으며, 드레스덴은 동부전선으로 가는 보급, 교통의 요충지였고 함부르크에는 유보트 기지가 있었다.
게다가 이런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폭격은 추축국이 먼저였으며,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도 전략 폭격 과정에서의 민간인 사상자를 이유로 기소된 독일 지휘관은 없었다. 당장 최초의 전략 폭격은 영국의 소도시인 코번트리에 행해졌고 이 이후 나치 독일은 대 피해를 입혔다고 여기며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표현으로 코번트리하다(coventrieren)라는 말을 썼다. 심지어 런던 대공습이나 충칭 대공습 등 대놓고 민간인에 대한 심리적인 효과를 노린 공격 역시 추축국 진영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2.1.2.2.4. 일본 제국과의 비교[편집]
일제의 만행을 강조하면서 나치 독일은 그나마 양호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주로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체계적인 학살 시스템을 마련한 나치가 일제보다도 더 큰 비판에 시달리기 때문에 일제가 주로 악행을 자행한 일선부대 수준에서의 비교가 많다.
그러나 독일군의 만행도 일본군 못지 않았다. 비록 서부전선만 놓고 보면 독일군이 덜 잔혹했던 것이 사실이나[69] , 동부전선까지 포함시키면 절대로 그렇게 볼 수가 없다. 일본군이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이니 신멸작전이니 하며 학살극을 벌일 때, 독일군 역시 폴란드에서의 바르샤바 봉기 진압이나[70] 소련에서의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처럼 무차별 학살을 수도 없이 저질렀고, 이로 인해 죽어나간 사람들의 수는 인류 역사상 최대 수준이다. 게다가 독일군의 포로학대 역시 일본군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포로의 사망률만 비교해봐도 독일군에 잡힌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57%에 달한다.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의 사망률도 27%로 매우 높은 편인데 독일군은 그것의 2배를 넘는 수준이다.[71]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둬놓고 치클론B 독가스 실험을 하여 살해하기도 하였다. 가끔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현장 사진을 몇 장 올려놓으면 "그래도 끝까지 고통스럽게 죽이는 일본군보다는 차라리 깔끔하게 죽이는 독일군이 낫네요."라는 식의 헛소리도 꾸준히 등장하는데, 독일군도 온갖 생체실험을 자행했음은 물론이고 수용소의 생리도 일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나치 독일이 일본 제국보다 나았다는 주장은 사실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주장과 달리 나치 독일의 특정 민족의 절멸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광신적이고 집착스러운 학살 행위는 일본 제국보다도 더 큰 충격을 주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 서양 철학계의 조류 자체를 바꿔놓았다. 당대 독일의 동맹인 일제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조차 특정 민족의 완전한 절멸을 국가대전략 목표로 삼지 않았으며, 그런 짓에 낭비할 만큼 국가 역량이 넘치지도 않았다. 반면 나치 독일은 아인자츠그루펜이나 홀로코스트에서 알 수 있듯 이념적인 이유로 전례없는 규모의 집단 학살을 벌였으며, 심지어 전세가 기울어가는데도 절멸수용소로 학살을 위한 물자를 끊임없이 배송했을 정도로 전쟁 수행보다도 유대인 대학살을 더욱 우선시했다. 오늘날 독일의 학살이 일본을 비롯한 기타 케이스보다 훨씬 주목받는 건 물론 나치즘의 피해자들이 서구 백인이라는 점도 있기는 하나, 기술적·구조적으로 선진화된 현대 관료제 국가가 특정 민족의 완전한 절멸을 위해 범국가적 규모의 학살 시스템을 마련한 유일무이한 사례이기 때문이다.[72]
독일은 주로 요제프 멩겔레, 일본의 731부대는 이시이 시로의 주도 하에 포로 대상의 각종 생체실험 역시 양국 모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 국가 모두 인류에게 유례 없이 엄청난 재앙을 안겨 줄 물건을 만들고 있었다. 독일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책임자로 하는 '우라늄 클럽'을 조직하여 핵개발을 시도하였고, 일본 역시 니고연구 등을 통하여 핵개발을 시도하였다. 독일의 경우
국내에서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의 비교가 자꾸만 논란이 되는 이유는, 언론사나 교과서 책과 같은 매체에선 일본과 비교하기 위해 현대 독일의 전후 반성이 비교적 깔끔했다고 알려져 있는데다[77] 한국은 나치와는 달리 일제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반일, 혐일 성향이 펴져있고,[78] 게다가 냉전의 영향으로 독소전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79] , 국내 민간인 대다수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라고는 홀로코스트밖에 모른다.[80][81] 독소전쟁에서는 그 이상으로 잔혹하고 규모가 큰 대학살이 수두룩했는데 말이다.
다만 "독일의 전쟁범죄가 일본 제국보다 더 깔끔하고 인간적(?)"이라는 주장이 반드시 독일의 전쟁범죄를 미화하려는 의도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반일 성향의 단체 혹은 방송과 같은 언론사들이 일본 제국이나 현대 일본을 독일과 대조되게 비판하기 위한 반례로 독일의 사례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82]
어쨌거나 전쟁범죄가 누가누가 더 악랄했나 서로 경쟁할 만한 것도 아니고, 두 나라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저질렀던 여러 전쟁범죄의 멍에를 지고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다른 나라의 전쟁 범죄가 더 잔혹했으니 특정 나라의 전쟁 범죄는 더 낫다는 주장은 일뽕들의 "독일 전쟁 범죄도 만만치 않았으니 일본의 전쟁 범죄도 별거 아니다"와 완전히 똑같다. 굳이 따지자면 독일의 전후 움직임이 더 널리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83] , 전후 독일과 일본 모두 나름대로 과거사를 청산했고[84] 두 나라 모두 오늘날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보편 인권의 개념을 중시하는 서방 세계의 선진국이다. 그러므로 21세기 두 나라의 외교적 행보에 대한 평가는 역사보다는 현실정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전쟁범죄와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청산은 각각의 사안에 얽힌 이해당사자들끼리 정부 간 혹은 시민외교를 통해 해결해나갈 문제이지 굳이 누가 더 낫네를 비교하며 한쪽을 옹호하거나 깎아내릴 문제는 아닌 것이다.
2.1.2.2.5. 현 이스라엘의 행동을 통한 나치 옹호[편집]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세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과정에서 저지르는 만행을 바탕으로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단순히 유대인이 나치에게 핍박받은 역사를 망각했다는 지적[85] 은 일리가 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유대인들을 세계의 악 취급하며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를 정당화하고, 심지어는 히틀러가 세계 경제를 점령한 유대인 세력에 맞서 외로이 싸운 투사였다는 식으로 미화하기까지 한다. 나치가 써먹은 배후중상설 같은 거짓 프로파간다와 판박이인 셈.
그러나 당대 유대인들이 죄다 부자에 독일이 망하기를 바라는 매국노였을 리 없다. 당장 프리츠 하버 같은 사람은 유대인이었음에도 독일 제국의 전쟁 수행을 위해 오명을 감수하고 독가스를 개발하는 등 충성을 다했지만, 바로 그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악화되는 사회적 분위기에 등떠밀려 조국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유대인들이 정말로 독일 경제를 쥐락펴락했다 한들, 독일이라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다해야 할 의무만 다했다면 마땅히 같은 독일인으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설사 유대인들이 집단화된 이익을 추구하며 다른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하더라도, 불이익을 주어 간접적으로 추방하는 정도면 모를까[86] 일방적으로 수용소에 가두어 놓고 집단 학살을 벌인 것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 애초에 유대인 음모론부터가 거짓이지만, 설사 참이라 하더라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인되기 어려운 인류사 최악의 인종절멸작전이었다.
또한 현대 이스라엘이 비록 가자 지구 등에서 비인도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사실이나[87] , 한편으로는 적성국가들로 둘러싸인 채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을 벌여온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예방공세를 취하는 면도 없지는 않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진 7~80년대 이후로는 지나친 확전을 자제하고 있고, 국지적인 도발에 대해서 과할 정도로 보복하는 것이 문제일 뿐 무력충돌이 없을 때는 팔레스타인과도 나름 대화를 시도하는 편이다. 이스라엘의 정책은 공격성 면에서 일제의 충칭대공습이나 미국의 도쿄대공습 정도라면 모를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이는 족족 잡아넣어서 학살을 저질렀던 나치의 유대인 정책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설령 이스라엘과 나치가 동급이라 해도 그건 각기 별도로 비판할 부분이지 한쪽이 다른 한 쪽의 면죄부가 될 수 없으며, 1930~40년대 나치의 범죄에 희생당한 유대인들 입장에서 미래에 세워질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해 책임질 이유는 당연하게도 없다.
게다가 오늘날 모든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개중에는 이스라엘 밖에서 태어났거나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많다. 나치에 반대했던 독일인들이나 독일계 미국인들에게 독일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치의 범죄에 대한 연대책임을 강요할 수 없듯, 유대계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연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류가 인권이라는 개념을 자각한 이래 특정 국가를 멸망시키려는 경우나 단순히 악에 받쳐 특정 민족을 전술적으로 전멸시키려고 한 경우는 많았어도 특정 민족을 전략적으로 완전히 절멸시키려는 범죄는 전무후무했으며, 오직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만이 유대인이라는 거대한 민족 집단[88] 을 겨냥하여 벌어졌다. 그렇기에 이러한 관점에서의 나치 옹호는 반유대주의의 죄업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유럽/북미 사회에서 특히나 금기시되고 있으며, 이들 국가에서 넷 우익 수준 이상의 공개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이런 발언을 했다가는 나치 미화에 더해 인종차별적 증오 발언으로 간주되어 법의 심판을 받을 확률이 높다.
2.1.2.3. 독일 내 집단의 무오설[편집]
2.1.2.3.1. 독일 전범 혐의자들에 대한 면죄부 및 미화[편집]
일부 독빠들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나 헤르만 호트와 같은 동부전선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나, 미국의 소환거부로 소련의 전범재판에 넘겨지지 않은 독일군 지휘권들에 대해, "소련이 어거지를 부려 넘겨달라고 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또한 소련의 형무소에서 사망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분개하곤 한다.[89][90]
하지만 당대에 밝혀진 것만으로도 이들이 직접 전범행위를 지시했는지가 불확실했을 뿐 예하부대가 동부전선에서 벌인 전쟁범죄는 이미 부지기수였으며, 오늘날에는 추가적인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유대인·포로 학살에 관여하였음이 다시 밝혀지는 등 애초부터 별로 면죄의 여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오히려 태평양 전쟁에서 비슷한 짓을 저지른 일본군 장성(마쓰이 이와네, 야마시타 도모유키, 혼마 마사하루, 홍사익 등)들이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도 감독부실의 책임을 물어 미국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것을 보면, 소련의 전범재판은 장성급에서는 거의 사형이 없을 정도로 관대한 편이었다.
2.1.2.3.2. 독일 국방군/민간인 무오설[편집]
나치빠와는 좀 다르지만 역시 큰 문제가 되었던 사례로 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는 SS가 아닌 독일 국방군과 국방군에 징집된 병사 개개인은 그저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했기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깨끗한 국방군 개념을 신봉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인 적도 있었다. 독일인들이야 섣불리 비판했다간 패드립이 될까 봐+정치적 이유 때문에 이걸 주워섬길 이유가 있었다지만[91] , 아무 상관없는 이역만리 타국(그것도 추축국 정부, 군대, 민간인 모두의 발아래 고통받은 과거가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그걸 그대로 믿어버리면 어쩌자는 걸까?
이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덕질 분야가 분야이다보니 독일 국방군과 나치의 관련성을 과도할 정도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악행으로는 무장친위대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았고 당시 독일 국방군 개개인 중에서는 나치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비판적인 사람, 심지어 정치엔 관심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가 징집영장 받아 끌려온 사람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의 전공 즉 명령을 받고는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그런 명령을(자의가 있었든 강제적으로든)수행한 병사 각각의 전공이 곧 명백하게 나치 정권의 이득이 되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국방군을 징병된 병사 개개인은 잘못이 없네 어쩌네 하면서 철저하게 나치와 분리하여서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것은, 북한군(=즉 징집 대상/징집 예정인 모든 북한 민간인)을 북한 전체주의와 분리하는 시도만큼이나 파렴치한 짓이라 할 수 있다. 독소전쟁에서 이들에게 죽은 민간인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만 단위이다. 당시 독일의 기술력이나 전술 등을 중립적인 차원에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하는 것이야 문제가 없지만, 독일 국방군과 그곳에 징병, 군수 형태로 인력을 제공한 독일 민간인들에서 나치를 분리하고 미화를 하는 것은 정말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봐야할 문제이다.
2.1.2.3.3. 나치 부역기업 문제[편집]
일본과 마찬가지로 독일 역시 전후 경제부흥을 위해 군수물자 생산 등으로 침략전쟁 수행에 협력했던 기업들의 과오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채 밀어주는 정책을 취하였다. 벤츠, 라인메탈, 마이바흐, 폭스바겐 등등이 대표적인 예.
2.1.2.3.4. 오스트리아에 대한 나치 책임 전가[편집]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사실과, 오스트리아가 현대에도 네오나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현실로, 나치에 대한 책임에서 물타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네오나치 문제는 독일도 오스트리아와 대동소이하며,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다문화, 다민족적 분위기가 싫어했고, 열등감 때문에 독일로 갔으며, 실패한 미대생 아돌프 히틀러를 전쟁과 학살을 벌인 정치 괴물로 키운 것은 엄연히 독일 내의 우경화 분위기가 맞다.
가장 말도 안되는 황당한 주장이다. 히틀러 출생지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당시에는 현지의 유력한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던 발트 3국, 루마니아 트란실베니아, 아니 심지어 러시아령 볼가 독일인 출신이라 한들, 히틀러와 나치가 패악질 친 국가적 기반이 독일이었다면 결국 그것은 독일의 책임인 것이다. 애초에 히틀러 같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문화주의적 이념과 결코 융화될 수 없었던 인간을 싫어서 뱉어낸 오스트리아 입장에선, 특히 그 당시 역사적 이념을 대표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소멸해서 망정이지 당사자들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뒤집어질 주장이다. 애시당초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대표하던 당시 오스트리아의 왕실 복고주의 반동주의자들은 좌파와 나란히 나치에 저항한 몇 안 되는 오스트리아 내의 반나치 세력에 가담했고, 나치 정권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아 있는 일원들을 집중적으로 감시, 투옥 등 탄압했다. 따라서 당연히 모든 책임을 오스트리아에 뒤집어 씌우는 행태는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
단,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가 대체로 나치 정권에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는 일방적인 피해자 행세를 하여 비난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이는 이것대로 나치 청산의 일부로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기는 하다. 실제 현대인 대부분은 나치의 책임을 전적으로 독일에게 전가하지 오스트리아를 이와 잘 연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치빠들의 변명과 별개로 독일의 일부로서 오스트리아인들이 행한 과거 악행에 대해서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면은 있다.[92]
2.1.2.4. 총론[편집]
"이 저자들은 전투, 날짜, 제복, 훈장, 약장에 관한 세부사항과 박진성에 기울이는 세심한 주의를 영웅적 에토스에 아로새겨진 편향되거나 수정주의적인 역사적 맥락과 결합한다. 아니면 역사적 맥락이랄 것이 전혀 없다. 또한 그들은 일종의 도상학적 효과를 지니도록 자기 책의 본문에 –부대의, 전투 장면의, 여러 개인의– 사진을 많이 끼워넣는다. 용어, 즉 독일군 계급, 차량 명칭, 훈장도 마찬가지여서, 늘 독일어 원어로 표기되며 토템적 가치도 지닌다. 책 제목도 낭만성을 자주 띤다. 몇 개만 들면, ‘플랑드르의 사자’, ‘유럽 북방인 전사’, ‘강철의 기사’, ‘동방을 향한 질주’, 이런 식이다. 눈길을 끄는 책 표지 그림은 한결같이 영웅적 자세를 하고 있는 사나이들의 낭만화된 모습인데, 이 모습은 그 사나이들을 찬미하고 책의 논조를 처음부터 독자에게 확실히 드러내준다. 그 논조란 동방에서 벌어진 전쟁의 특징이었던 진정한 참상에 관한 논쟁을 일절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로널드 스멜서, 에드워드 데이비드 2세,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中.
이 독빠들의 주장이나 경향은 사실 한국에 한정한 것이 아니다. 원류로 시작하면 서방권, 특히 미국과 영국 이다.[93]
전쟁이 끝나고 냉전체제가 시작되던 1946년부터 서방 연합군에게 최대의 적으로 떠오르던 소련군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군과 전쟁을 치른 적 있는 독일 국방군 장성포로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 국방성의 역사국의 주도 하에 1948년에 무려 1,000건이 넘는 문건을 작성했다. 그말인 즉슨 대부분의 영어로 된 서구의 자료들이 독일군, 그것도 독일 국방군의 시각에 따라 미화되거나 왜곡된게 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프란츠 할더가 존재했다. 프란츠 할더는 최대한 자신을 반나치 인사로 포장하며 문건을 작성하는 전직 국방군 장성포로들에게 국방군의 작전과 나치 친위대의 범죄를 구분하게, 자신들의 전략전술적 실패를 자연환경과 히틀러의 무능 탓으로 포장하게끔 지시했다. 냉전 체제 때문에 소련과의 대대적인 교차검증도 불가능했다.[94] 그리고 영국의 군사학자인 리델하트는 만슈타인을 이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높히고자 했으며 전범 재판 당시 만슈타인을 옹호하며[95] 국방군의 우수함을 칭찬하는 서술 등으로 인해 전격전 같은 개념의 미화와 왜곡이 가속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 그리고 서독조차 국방군의 그러한 소련군 폄하가 사실임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즉 여기서부터 독빠들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어는 못하지, 소련 자료는 구하기 힘들지, 근데 독일군이 미화된 영어 자료는 쏟아저 나오지... 결국 그렇게 서구권에서 독빠가 발생하지 않는게 이상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독빠들이 "근거자료"라고 내놓는 소련군 폄하적인 영어판 저서들도 사실 독일자료나 다름없다. 사실 소련-러시아의 군사문건들은 소련 붕괴후 그 일부가 해제되어 공개되었지만, 현재도 상당수가 비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 언어적 어려움이나 자료 접근의 문제도 겹쳐서 현재까지 일부가 아닌 온전한 소련측 시각이 포함된 영어권의 독소전쟁사는 발간되지 않고 있다.[96][97] 그렇기 때문에 현재 독소전쟁사의 대부분은 독일군 자료로 작성되었으며,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편파적인 서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버블경제와 함께 일본에서도 취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위에서 설명한 왜곡된 자료들은 자연스레 정보를 원하는 일본 밀덕들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한국으로 또다시 흘러 들어오면서 오늘날의 독빠 밀덕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실 한국의 여러 오류가 있는 군사 관련 정보들 상당 수가 왜곡된 유럽발 자료들을 받아들이거나 아예 자체 생산을 하던 일본 밀덕계에서 흘러왔다고 볼 수도 있고,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 관련 이야기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2.1.3. 현대 밀리터리 독빠[편집]
현대의 독일 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과거에는 일본에서 유행하던 밀리터리 장르를 국내에서 번역해 들여오기 시작하면서 탄생했으며, 지금도 지속되는 일본의 독빠 기질에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도 2차대전 독빠들의 위세에 힘입어 일단은 카테고리가 같은 현대전 분야에도 상당수의 밀덕들이, 심지어 대전기 전문가들도 이 분야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주로 전차에 집중되어 있으며, 레오파르트2를 추종하는 '레오신교'가 대표적이었다.
문제는 양 차 대전기 독빠들에게서 나타나듯 현대전 독빠들 역시 남의 말을 들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2000년대 밀덕판은 독빠들이 당시에 소수였던 미빠와 수는 비슷했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키배에서 독빠를 이기기 어려웠던 러빠들을 소위 본좌님 말씀 앞세워 일방적으로 린치하는 양상이 흔했다.
00년대 미군의 이라크와 아프간에서의 부진을 이유로 미군의 무기와 전략전술은 사실상 거품이었고 따라서 독일식이야말로 우수하다는 견해가 나타났는데 위의 나치 문제와 결별한 독일에 대한 호감과 겹쳐 독일이야말로 EU를 이끌 국가이며 독일군은 미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투사할 것이다라는 설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에는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였는데 문제는 유럽이 전반적으로 군축 분위기에 힘입어 돈을 덜 쓰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고 독일은 특히 안보무임승차에 적극적이었다. NATO의 방위분담금조차 미국과 유럽이 반반을 부담하던것이 미국 혼자 75%를 부담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형적으로 당장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면 속은 다 곪았다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눈에 띄는 붕괴현상은 보이지 않았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까지 키배를 할때 어떤 본좌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언급하면서 밀리터리 본좌의 검증되지 않은 증언이나 퍼날랐지 다른 자료를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2013년에 터질 것이 터지고 만다. 레오2A7+ 수출 불발과 푸마의 사망 선고를 시작으로 까들이 소식을 빠르게 풀어버렸고 이걸 쉴드칠 '본좌'들은 진작에 공개석상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결국 독빠들은 이를 기점으로 빠르게 주류에서 퇴장당하고 지금은 형편없는 생산능력과 발전이 없는 외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참극의 동조자로 지적받으며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현재 독일 연방군의 문제점은 단순히 예산의 문제라고 보기도 힘들다. 독일이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낮아 비판받았지만 경제규모가 받쳐주다보니 국방비로 퍼붓는 비용이 절대 작은 수준이 아니라서 2000년 이후 독일의 국방비 순위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난적이 없다. 문제는 이 예산을 전력 개선에 제대로 쓰지를 못하는데 있었다.
또한 독일은 과거사를 유럽 안보에서 열외타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으며 독빠들은 여기에 호응하고 있다. 메르켈 정권은 독일이 군비증강을 하면 주변국이 불안해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군 재건에 손을 넣고 러시아와 밀월 관계를 강화했으며 독빠들은 좋아라 이 주장을 퍼날랐는데 러시아가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이 확인된 이후 그 어떤 나라, 독일에게 역사적으로 유감이 많은 폴란드조차 독일의 군비증강에 불안해한 적이 없다. 독일의 안보무임승차를 비난하면 했지.
공동개발은 거의 독일의 영향으로 만들어졌거나 그냥 독일제로 써버리는 경우도 많다. 특히 프까들이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리고 사실 독일이 어마어마한 걸 만들었는데 전후 혼란기라 없어지거나 남에게 뺏겼다, 나토 표준을 지키려고 안 쓴 장비가 있는데 엄청난 성능을 가졌다는 둥의 주장을 펼치는데 말하는 그 물건의 이름도 모르고 주장하는 바를 구글에 검색해도 문서 하나가 안나온다. 제작회사가 판촉하려고 올린 스펙과 광고 동영상을 그대로 믿고 외계인 장비라고 생각하는 독빠들이 있는데 물론 타국의 장비는 실전 중에 발생한 문제나 개발 중에 나타나서 이미 고쳐진 문제들까지 파내서 비하한다.
근래에는 시뮬레이터인척 하면서 고증을 완전히 박살내놓은 워 썬더가 독빠제조기 역할을 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M1 에이브람스에 대한 깎아내리기와 레오파르트 2의 올려치기인데, 특히 에이브람스의 포탑링 부분이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선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M1 에이브람스 문서와 K2 흑표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해당 부분은 약점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워 썬더에서 약점이라는 이유만으로 현실에서도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거품이 다 빠진 레오파르트 2를 어떻게든 쉴드 치는 사람이 보인다면 십중팔구 워 썬더 관련 행적이 나올 정도.
2.2. 정치 독빠[편집]
독일의 정치 제도를 좋아하는 사람들. 은근히 진보 진영에서 독일 정치에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독일 정치계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녹색당 등의 좌파 정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므로 "우리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으로 호감을 느끼는 듯 하다. 이 때문에 독일식 정당명부제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한다.(2019년 통과) 그리고 독일의 복지 정책에 호감을 느끼기도 한다. 보수 진영에서도 대륙법계가 독일 중심이었고 제조업 수출 중심 경제 , 파독 광부 및 간호사 등으로 독일에 대한 호감이 큰 편이고 일부는 연정과 내각제를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유럽 사회의 후발주자로 강대국 반열에 들어서고, 다시금 분단된 국가에서 또 다시 재통일을 이뤄내며, 현재까지도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민주적으로 유럽을 좌우하는 독일의 정치적 역량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적어도 강대국 사이에 끼인 신흥국가로서 과거, 현재, 미래의 한국이 추구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앞서 보여준 것이 독일의 근현대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예컨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인 한반도의 위치는 프랑스·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끼인 독일의 위치와 유사하며, 독일의 경우 18세기까지, 한국의 경우 20세기까지 오랫동안 주변국에 시달려온 처지라는 것도 유사하다. 때문에 프로이센의 외교적 승리를 통한 제국 형성, 국력신장에 기여했지만 끝내 몰락의 단초도 제공했던 군국주의 이념, 러시아의 괴뢰국으로 끝난 동독,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에 편입되어 번영한 서독, 평화 통일, 숙적에서 혈맹으로 변한 프랑스와의 관계, 유럽연합과 같은 역내 협력체를 통한 국가 체급 한계의 극복 등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 유럽을 아시아로, 프랑스·영국을 일본으로, 러시아를 중국으로, 동서독이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를 남북한으로 치환해 보면, 만주 등을 겨냥한 군사적 고토 회복주의의 가능성과 위험성, 경제발전의 방식, 통일의 방식, 아시아연합 같은 지역 내 정치 협력체를 통한 외교적 영토 확장 가능성,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 외교가 취해야 할 방향성 등 반면교사로서든 성공사례로서든 한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이쪽은 위의 밀리터리 독빠랑 별 접점이 없다.
2.2.1. 네오 나치[편집]
자세한 내용은 네오 나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문서 참고. 물론 해당 문서에서 설명하는 것은 넓은 의미의 나치즘이지만 독빠 → 네오나치 테크트리를 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끔 반러, 반공 등의 개념에 기반한 사람(독빠면 더더욱)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틀어져 버리는 경우가 있다.
2.3. 기술 독빠[편집]
중공업, 경공업 등 각종 독일의 기술력을 좋아해서 독일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 주로 아우디, 메르세데스-벤츠, BMW, 포르쉐 같은 독일 자동차를 좋아하고, 그 외에 엔진이나 기계 계열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독일차빠가 이 부류에 속한다. 그리고 고속철도 독빠도 있다.
독일의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널리 퍼진 인식이기도 하지만, 독빠들중에는 가끔 미국과 일본의 기술력도 독일한테 안된다는 둥 심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참고로 일본이 21세기 이후 노벨상 갯수와 특허 갯수, 독점산업 갯수 전부 독일을 앞선다. 폴란드볼이나 할리우드 영화만 봐도 서구권에도 일본하면 기술력이 대단하다는 인식이 있다.
미국의 경우는 뭐 설명이 필요한가?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압도적으로 현대문명을 견인해온 국가다.
실제로 이들중에는 실제 독일의 뛰어난 기술에 대한 지식은 심각하게 얕고 기술력이 높다는 독일 기업의 이미지 마케팅에만 빠져든 알못들이 많다.
2.3.1. 독일차빠[편집]
자세한 내용은 독일차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4. 스포츠 독빠[편집]
주로 축구, 분데스리가의 팬이 많다.
2.4.1. 독축빠[편집]
애초에 위 예문이 모순인 이유는 독일은 이탈리아 앞에서는 항상 패배만 반복했기 때문이다.
분데스리가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좋아하는 사람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이 홈팀 브라질을 무려 1-7이라는 무시무시한 스코어로 털어버리고 우승하면서 더욱 늘어났다. 하지만 그 이후로 (독일이) 독일본좌설을 내세우며 다른 대표팀을 깎아내리는 짓을 많이 하고 돌아다녀 타 팀의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독일의 승리의 실체는 아주 더러운 경우가 많은데 알제리한테 졌다고 해서 오스트리아와 짜고 점수를 1-0 독일 승리로 조작하는가 하면 유럽끼리 나눠먹기 위해 아르헨티나에게 갖은 편파판정으로 억지로 우승한 일도 있는 등 정당하지 못한 승리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는 편이 아군이라는 사람들의 심리로 인해 독축빠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순수하게 실력이 극강이라서 팬들이 늘어나는 브라질이나 스페인, 실력은 있는데 맨날 고전하는 것이 불쌍해서 팬들이 늘어나는 아르헨티나와는 다른 양상이다.
따라서 독축빠는 다른 축구빠가 그 팀 자체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팬이 되는 것과는 아주 다르게 오직 성적 하나만 보고 팬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확 쪼그라들어 버린다. 이건 독축빠 특유의 아주 악질 고질병으로 팬 성향으로만 따진다면 차라리 유니폼이 간지나서 팬이 되는 아르헨티나, 스페인, 프랑스 만도 못한 팬덤이다.
차범근의 월드컵 결승전 해설을 보면 괴체의 결승골 장면에서 매우 좋아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차붐의 경우는 독일에서도 대접받고 독일에서 생활도 오래했으며 아들도 독일서 출생하는 등 약간 특이한 케이스이고, 차범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독일 경기를 중계할때 생각만큼 편파적인 해설은 안 한다. 다만, 2014년 월드컵 알제리와의 16강전에서 연장전 혈투끝에 메수트 외질의 결승골이 나오자 터져나오는 기쁨을 참지는 못했다(...). 다만,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우승 이후로 경거망동+기고만장해져서 이런저런 기행들을 많이 대놓고 선보이면서 독일 축구에 대하여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특히 2016년 가을, 토마스 뮐러의 산마리노 축구 국가대표팀 비하 사건 때문에 뮐러뿐만 아니라 독일 축구에 대한 이미지는 그야말로 땅바닥에까지 떨어진 상태. 그리고 결정적으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본선에서 한국이 독일을 꺾는 대이변이 터지고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일본이 독일을 꺾는 대이변이 터진 이후에는 독축빠들이 많이 줄어든 듯하다.
2.5. 문화 독빠[편집]
독일 전통 문화나 특히 독일 음식이나 독일 맥주, 게르만족 등에 빠진 부류. 다만 문화 독빠는 클래식 음악을 제외하면 대중문화 본좌인 영국과 상류층문화의 강자인 프랑스 사이에 껴서 존재감이 좀 적은 편.
그 외에도 교육적인 측면으로서도 빠도 있다, 예를들어 독일에는 마이스터 스쿨이 있는데(장인양성학교, 다르게 말하면 기술학교)에서 자격증을 취득하면 독일전역, 유럽전역에서도 취직시 매우 큰 어드밴티지를 얻을 수 있고[100] 국가적으로도 장려하기 때문에 대학을 가기위한 과정 중 하나로 전락한 한국 중, 고등학교의 교육체계를 보고 실망을 해서 빠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음악 마니아들 중에서도 독빠가 상당히 많다. 클래식 음악에서도 걸출한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많은 편인데다가 현대 음악 및 독일 팝음악까지 걸쳐서 상당수의 마니아가 존재한다. 그림 형제 동화 덕후들도 많고 파우스트 문학 덕후들도 많다. 비슷한 민족 구성으로 이루어진 국가인 오스트리아, 스위스까지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2.5.1. 판타지 독빠[편집]
상술한 파우스트, 그림 형제 동화 등에 엮이는 면도 있고 해서 판타지 덕후들도 많다.
2.6. 학문 독빠[편집]
학문 쪽에도 있다. 철학 쪽을 보아도 임마누엘 칸트나 헤겔, 카를 마르크스 같은 유명 철학자들의 영향 때문에 서양철학을 공부할 때 독일철학을 빼놓기가 어려운 데 이 때문에 학문적으로 독빠가 되기도 한다. 당장 20세기 초의 독일철학 인맥만 따져봐도, 후설의 제자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친구 야스퍼스, 하이데거의 애인 한나 아렌트라는[101] 황당한 라인업이 나온다.뿐만 아니라 신학에서도 독빠가 많은데, 독일이 가톨릭에서건 개신교에서건 신학적 기반이 워낙 탄탄하다보니 현대까지도 네임드 신학자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유학을 갈 때도 대체로 가톨릭에서는 이탈리아 혹은 독일권(오스트리아 포함)으로, 개신교에서는 미국 혹은 독일(오스트리아X)로 보내는 편. 토마스 아퀴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일 신학은 최고의 시녀(철학)들과 함께하는 셈이다. 참고로 위에서 소개한 먼치킨 인맥은 신학계로도 이어지는데, 20세기 최고의 가톨릭 신학자로 여겨지는 카를 라너는 하이데거 밑에서 철학을 배웠고, 에디트 슈타인이라는 세속명으로 더 유명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후설의 제자이다. 그리고 네임드 개신교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친구이기도 하다. 이쪽도 간혹 문제를 터뜨리는데 과학의 모든 업적은 독일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례도 있다. 그 와중에 닐스 보어의 국적을 독일로 세탁하는건 덤(...)[102]
법학쪽으로 가더라도 대륙법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독빠가 많은 편.
2.7. 역사 독빠[편집]
크고 아름다운 신성 로마 제국,[103] 오스트리아 제국, 독일 제2제국이나 영토를 개척하며 생활 기반을 늘린 튜튼 기사단과 프로이센에 반해서 역사적으로 독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나치빠랑은 다른게 보통 위에 쓰여진 국가들을 빨다가 독빠가 될 정도면 이미 상당히 체에 걸러진 상태인지라 악질 나치빠가 될 가능성은 좀 적은 편이다.
독일 민족사적 관점에서 보면 나치의 집권이 동방식민운동을 통해 수 세기간 개척한 동방 영토를 싸그리 날려먹은데다 정체성 면에서 독일과 통합할 여지가 많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귀속될 가능성을 영원히 불살라버렸기 때문에 역사 독빠는 나치빠와 상극이다. 예를 들어, 대독일(Großdeutschland) 개념같은 경우 히틀러와 나치당이 2차 세계대전의 개전 명분으로 써먹은 이래 나치의 과오에 민감한 국가들에서는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품성을 의심받을 정도로 철저히 금기시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보면 단순히 독일인(독일 민족, 말하자면 독일어를 쓰고, 독일 문화권에 속하는 게르만족 혈통의 -또는 게르만족 혈통이라고 여겨지는- 집단)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 국가를 지향하는 개념으로써,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 사이 전 세계를 풍미한 민족주의, 특히 민족자결주의 적 국가관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독일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대독일의 건설'이란 한국인의 입장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치당의 집권 전까지는 말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이나 주데텐란트 합병[105] 에 영국과 프랑스가 명확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 역시 (상당부분 1차 세계대전의 피해로 인한 혐전 정서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세계를 풍미하던 민족주의적 입장에 따라 독일인 역시 자신들의 단일한 민족국가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여겼던 것에서 기인했다. 그러나 나치의 만행 이후 독일 민족주의의 지향점이던 대독일주의는 철저히 금기시되어 버렸다. 즉, 독일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독일 민족주의 자체가 히틀러의 집권에 상당부분 기여하고 그 만행에 부역한 과오가 막대함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히틀러와 나치당이 날뛴 덕분에 전후 '대독일' 존재 자체가 철저히 부정당해 버린 셈이다. 특히 중세때부터 독일계 국가들의 맹주 노릇을 하던[106]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통합되는 길이 막혀버렸다.
그래서 역사 독빠들은 나치를 극혐한다. 문화, 역사적인 의미로 나치는 독일 본토의 유구한 유산들을 잿더미로 만들었음은 물론, 저 멀리 트란실바니아까지 퍼져있던 독일어권·독일 문화권의 판도를 한큐에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재건조차 논의되기 힘든 여건[107] 을 만들어 버렸으니 좋아할 이유가 없다.
2.7.1. 신성 로마 제국 독빠[편집]
'서방의 (보편)제국'이라는 화려한 간판을 가진 신롬에 하악거리는 아이러니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볼테르의 그 유명한 조롱을 비롯하여, 신롬이 말기의 모습 때문에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다'라고 폄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당대의 서유럽인들에게는 엄청난 진실성을 가진 정체성이었다(신성 로마 제국/오해 문서 참조). 다만 샤를마뉴 제국에서 동(독일)중(이탈리아)서(프랑스)로 갈라지고 다시 신성로마제국이 수많은 제후국들로 쪼개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점점 서유럽인들의 인식이 비웃음의 대상으로 변하는 건 사실이긴 하다.
신롬빠의 경우 12세기로 대표되는 중세의 전성기에 보여준 신롬의 모습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카를 5세 시절 스페인과 이탈리아 일부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영지를 숭상하는 경우도 있고, 오스트리아를 구심점으로 하는 대독일주의 독일을 지지하는 경우도 보인다. 카를 5세 이후의 합스부르크 제국 모습을 좋아한다면 프로이센에 의한 소독일주의를 거부하며 밑의 독빠들을 짝퉁으로 까기도 한다.
신롬빠 중에선 신롬으로 대표되는 '대독일'적 모습보다는 그냥 오스트리아가 좋아서 신롬빠를 겸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넓은 의미에선 독빠일 순 있지만,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빠에 가깝다. 사실 저렇게 카를 5세의 재상 메르쿠리노 가티나라가 주장했던 서방 기독교권의 보편 제국을 추구했던 이념을 빨며 이탈리아, 스페인빠를 겸하거나, 아니면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확실하게 신성 로마 제국 강역에서 실질적인 국력을 뽑아 내려는 걸 포기하고 현대 오스트리아와 역사적 보헤미아, 헝가리 중심으로 형성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빠는 건 빠질의 대상이 되는 합스부르크 帝國을구성하는 諸國 중에 독일계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있다이지 순수한 독빠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재밌는 건, '보편제국'이란 신롬의 정체성을 떠올려 보면, 결국 위에서 설명하는 독빠로서의 면모나 오빠로서의 면모 모두가 실제 신롬의 특성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록 "독일 민족의"라는 수식어가 후대에 붙긴 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독일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지 신롬의 성격을 독일인들의 민족국가로서 재정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멸망할 때까지 신롬은 지상에 세워진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성격을 버린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문의 첫 줄에서 '간판에 애착을 갖는다'는 말은, 이 유형에 속하는 독빠들이 신롬을 좋아하는 건 신롬이 기독교 보편제국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독일 민족사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또 독일 민족이 주도했다는 19세기식 역사관에 근거했다고 말하는 게 더 명확한 설명이 된다.
2.7.2. 동독빠[편집]
소련빠와 독빠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인민군(동독군)을 보고 동독빠가 되는 경우가 많다. 군사적으로 자료도 많이 없고 헬멧같은 것을 제외한다면 서독과 달리 타국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다보니 상당히 마이너한 계열이다.
3. 특징[편집]
밀덕 독빠들은 밀덕 특유의 편협함까지 곁들여서 밀리터리를 넘은 방면에서까지도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일부 밀덕 커뮤니티나 독빠가 많은 커뮤니티(예를 들어 엠팍) 등에서는 자동차나 축구처럼 전통적으로 독일이 강세를 보이는 방면 이외의 모든 방면에서도 독일이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는 식이다. 예를 들어 이런 독빠들은 독일어가 프랑스어보다 유용하다거나[108] 혹은 (영어보다 가까워서) 한국인에게 쉽다는 주장을 늘어놓거나, 유럽문학 중에서 독문학이 최고라는 이야기도 한다.[109] 베를린이 파리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고, 독일인이 프랑스인보다 친절하고 교양있다는 주장도 빠지지 않는다. 물론 이런 주장은 모두 개인적인 감상이거나 근거가 없는 것이다.
독일의 라이벌 국가인 프랑스에 대한 비하도 이들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밀덕의 주류를 이루는 독빠(+미빠)들에 의해 프랑스의 역대 사기 행각 전설이 약 2000년대 10여년간 한국 밀덕계를 지배했는데, 이후 모든 것이 거짓으로 판명되었음에도 독빠중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사기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의 프랑스에 대한 인식은 와패니즈들이 인식하는 중국과도 완벽히 호환된다.
그리고 국내에 독빠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다. 현재 독일의 기술력이나 문화 부분을 찬양하는 건 대부분 취향이라 생각하지, 뭐라 하지는 않는다. 다만 문제는 여기까지는 비교적 괜찮지만, 독일 제국과 나치 독일에 대해 약간의 찬양이나 넷상에서 나치 컨셉을 하는 독빠들도 크게 문제를 잡지 않고 넘어간다. 아돌프 히틀러 문서 한국 관련 서술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국내에선 히틀러와 같은 인물이 넷상이나 농담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사용된다는 것을 보면 생각외로 너그러운 편이다. 가령 넷상 에리히 폰 만슈타인같은 전범을 프로필로 하고 다녀도, 크게 문제를 잡거나 지적을 하지 않는다.[113]
이러한 한국 독빠들의 맹목적인 독일 미화는 정작 독일인들조차 우려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다니엘 린데만의 인터뷰 기사나 주한 독일 대사의 인터뷰만 # 봐도 한국의 맹목적인 독일 미화에 으쓱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나무위키 내에서도 "이 차량은 독일의 차량[114] 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되었는데..." 등의 서술로 교묘하게 특정 장비를 깎아내리고 독일 기갑차량의 위신을 올리기도 한다.
이런 기갑차량 같은 분야는 밀덕이나 관련직 종사자, 언어능통자가 아닌 이상 일반인이 교차검증을 할 수 없기에 잘못된 정보가 알음알음 퍼지는 일도 있다.
4. 각국의 독빠[편집]
4.1. 일본의 독빠[편집]
메이지 유신 때부터 일본은 독일을 주요한 모델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개념 독빠 무개념 독빠 골고루 가장 많은 나라이다. 의학, 약학, 화학 등 많은 분야에서 독일어를 도입했으며, 정치체계까지 독일(프로이센)에서 모델을 따왔다.
일본 밀덕계에서도 전반적으로 독빠 성향이 짙다. 이 점이 한국 밀덕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는 견해도 많다. 초기 밀덕용 자료들 대부분이 일본 출처라거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고 애당초 밀덕과 만화,애니 같은 서브컬처가 상당히 연관이 많기 때문. 여기에 당시 조악했던 한국 밀리터리 프라모델 업계에서 일본쪽 금형을 카피한 제품을 낼 때 2차대전 중 독일군 프라모델도 같이 흘러들어온 것이 시너지 효과를 이루었다.
또한 애니메이션계도 밀리터리를 다루면 무조건 독일제 무기가 주인공 측의 무기로 등장할 정도로, 독뽕 메타가 사실상 일본 밀리터리 애니메이션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2차대전 독빠들의 문제점 역시 일본 독빠들은 거의 똑같이 가지고 있다. 일본 독빠는 지극히 당연한 역사적인 이유로 그나마 최소한의 도덕적 딜레마도 없이 나치스도 긍정하고, 일제도 긍정하고, 파시즘도 긍정해버리는 그냥 극우가 되기 쉽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 독빠 커뮤니티의 암적 요소 상당부분을 사전주입해 놓은, 악성 독빠계의 최종보스정도로 심하다.
4.2. 미국의 독빠[편집]
마찬가지로 미국에도 상당수 독빠들이 존재한다. 제2차 대전 전에는 미국나치당(American Nazi Party)(...)이 존재하였고, 이들이 워싱턴 DC에서 시가행진을 할 정도였다. 이들의 주장은 유대인과 흑인 반대. 다행히(?)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미국을 선제공격하고 제3제국이 미국에 선전포고 하면서 미국나치당은 불법화되었다.
1960년대부터 미국에서도 밀덕 독빠들이 많아졌다. 한국에도 간간히 번역되는 각종 영문판 2차대전 밀리터리 서적들의 소비층이 바로 이들이다. 다만 이들은 한국이나 일본처럼 나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지는 못하고, 홈페이지를 봐도 자기들은 순수한 취미활동으로 독일군이나 무장친위대를 좋아하지, 네오나치와 그 이념과는 무관하다며 선을 긋고 있다. 미국은 유대인들의 입김이 세기 때문에 설령 어떤 꼴통이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펼칠 수가 없다.
미국에는 문화독빠나 정치독빠는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문화적으로는 불빠나 일빠가 많고, 정치적으로는 지나치게 자국중심주의라서 문제. 다만 자동차 독빠는 상당히 존재하는 편.
다만 이들도 독소전쟁은 지나치게 소련을 비하하고 독일에 편파적인 기술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미국에서 펴낸 제2차대전 통사를 보면 대부분 독소전쟁은 아프리카 전역 정도의 마이너 전역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야말로 나치에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115] 덤으로 소련군의 만행을 강조하는 것도 냉전 초기 미국의 프로파간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유튜브에서도 일부 중증 나치 추종자들이 2차대전기 SS와 국방군의 사진이나 동영상과 군가를 편집한 비디오을 올려놓고, 댓글에서는 나치 독일이나 SS를 진정한 영웅, 용감한 병사들로 치켜세우고 찬양하며 연합군과 소련을 악의 축으로 폄하하고 각종 인종 차별 발언을 서슴치 않는 등의 추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시 보다보면 지금이 21세기인지 1930년대 나치 집권기인지 헷갈릴 정도.[116] 댓글에는 독일계가 많이 보이고, 독일 혼혈인걸 자랑스러워하는 댓글도 있다. 근데 웃긴 건 덧글 단 사람 대부분이 나치랑 박 터지게 싸웠던,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서양권에서는 특이하게 주로 영어권 국가들이 나치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편인데, 그러다보니 나치 추종자들도 불어권 국가나 기타 서방 국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고의적인 나치 찬양 영상뿐 아니라 일반적인 총기 리뷰 영상, 그중에서도 2차대전기 나치독일의 총기 관련 영상에도 주로 서식하며 AK와 AR15는 모두 Stg44 짝퉁이라고 주장하거나, 독일공학, 무기에 대한 찬양 일색인 댓글들을 쓰고 베댓란을 독차지하며, 왜 영상 총기 소개부분에서 하켄크로이츠대신 독일 국기를 걸어놨냐고 묻는 댓글에 유대인들 때문이라고 답글을 다는 등 역사의식 제로에 더해 인종차별적인 모습까지도 보여주어 보는 이들을 불쾌하게끔 만든다. 총기뿐 아니라 제3제국을 다루는 동영상의 댓글란을 보면 고의적인 트롤링인지 아니면 유대인에 대한 피해망상인지 의도는 모르지만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 폴란드 등 나치 독일에 침공받은 국가들에 대한 조롱을 담은 댓글이 추천 폭격을 받고 베댓으로 올라가 있는 일이 빈번하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 청년들 사이에서 대안 우파 열풍이 불고 인터넷에도 그 영향을 끼쳐 대안 우파 성향의 네티즌들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각해 지고 있다. 단순 독빠를 넘어서 나치빠 수준의 행태를 보여준다. 독일은 찬양해도 나치는 부정하던 이전과 달리 위의 예시들 처럼 당당히 나치를 옹호, 찬양하는 글을 쓰고, 유대인과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비방하며, 이를 비판하는 정상적인 네티즌과 키배를 벌이기도 한다. 다만 유대인에 대한 비난은 이전부터 유대인들의 미국 사회 엘리트 계층 진출에 대한 WASP를 위시한 기존 미국인들의 반감과 이스라엘의 여러 만행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반유대인 사상이 네티즌들에게 확산되어 왔던것을 감안하면 그 수가 늘었을 뿐 과격함의 정도는 과거와 달라진게 없다.
이런 웹독빠들을 부르는 Wehraboo(Wehrmacht + Weeaboo), Nazi fanboy라는 신조어가 있다.
카투사로 복무할 경우 미군 사무시설에 들어가면 내셔널 지오그래픽부터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이르기까지 각종 잡지들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혹시 시간이 된다면 이중 군사학이나 밀리터리 관련 잡지들을 잘 찾아보자. 읽다보면 컨텐츠의 상당량이 나치 독일군 관련 자료들을 다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2015년에 발간된 모 잡지의 칼럼 중에서는 루프트바페 원수인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에 대해서는 매우 유능했던 공군 지휘관으로써의 모습이 부각되어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5. 독빠인 캐릭터[편집]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경훈: 나치빠 + 히틀러빠 + 기술 독빠 + 독일제국빠를 겸한다. 당시 뒤틀린 자본가들의 인물상을 대표한다.[117]
- 함대 컬렉션 - 이8: 실제 모티브가 된 한 구일본군 잠수함이 당시 동맹이었던 나치 독일과 인연이 닿은 점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 이 게임의 흥행에 일조한 한 만화가의 대표작에 등장하는 독일인 캐릭터의 대사를 오마주한 것은 덤.
- 은하영웅전설 - 루돌프 폰 골덴바움: 이름을 보면 원래 독일계[118] 로 보이는데, 게르만 문화에 심취해서 황제로 즉위한 뒤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를 독일식으로 뜯어고쳤다. 이름, 미술, 건축, 군대, 사회, 지명, 통화, 언어, 종교까지 전 분야가 독일식으로 바뀌었다.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분야는 도량형 뿐이다.
- 걸즈 앤 판처
- 데이트 어 라이브 - 야마이 카구야: 중2병짓을 할때마다 독일어를 심심찮게 사용한다.
- 존 윅 시리즈 - 존 윅: 2편의 소믈리에의 말에 의하면 독일제 무기를 선호한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대표 권총인 P30L은 독일제 무기다.
6. 여담[편집]
- 중국에 '독빠족'이라는 민족이 있다고 한다.
- 매우 매니악하지만 소련빠, 넓게 보면 러시아빠인 동시에 일빠, 독빠인 사람은 동독빠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일본의 넷우익처럼 이들은 한국, 중국을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