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빠 (문단 편집) ====== [[소련군]]과의 비교 ====== [[나치 독일]]과 [[히틀러]]의 전쟁범죄나 야만성을 논할 때 흔히 [[소련]]의 [[스탈린]]이 카운터파트로 언급되곤 한다. 이는 양국의 이념이 [[극우]]와 [[극좌]]로 명확히 나뉘는 극단적인 [[전체주의]] 독재 국가였으며, 전후 [[냉전]] 체제에 접어들면서 소련이 나치의 뒤를 이은 자유세계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실제로 전시에도 교전 당사자들 사이에서 가장 격렬한 증오범죄가 오갔던 곳이 바로 [[동부전선]]이었기 때문[* 여기에 비견될 만한 전역은 [[태평양 전쟁|태평양 전역]]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미군]]과 호주군이 강자이다 보니 옥쇄 운운하는 [[일본군]]의 기상천외한(...) 자살 행위가 주로 부각된 반면, 동부전선에서는 중반부까지는 [[독일군]]이 강자였던 관계로 조직적인 전쟁범죄가 일어났던 것이다.]이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 소련은 엇비슷해 보여도 파고들어가 보면 차이점이 제법 있다. 우선 반인륜적인 범죄의 추이를 살펴보면 일부 독빠들은 주로 [[소련]]의 잔혹 행위를 부각시키면서 정작 나치 독일의 문제점에 대해 [[물타기]]를 시전하고 적군 포로의 사망률·민간인 대상 전쟁범죄 추이 등 객관적인 수치를 감안했을 때 [[소련군]]이 연합군 내에서 가장 악질적인 군대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를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복수라는 식으로 정당화하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다.[*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담당하는 법적인 영역이며, [[소련군]]이 이기고 있는 시점에서 전후 전쟁 범죄자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이 가능하리라는 것 역시 이미 명약관화했다. 하다못해 자기 부모를 죽인 직접적인 당사자를 만난 거라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떠한 국제법적 권한도 없는 개인이 복수심에 불타 [[사적제재]]를 벌이는 행위는 (정상적인 법치주의가 통하는 국가라면) 처벌받아도 할 말 없는 범죄이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소련 정부에서도 독일 민간에 대한 복수를 금지했던 것이며, 이를 무시하고 독일군에게 당한 화풀이를 독일 민간인에게 풀었던 소련 군인들 역시 죄에 대한 도의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마땅하다.] 소련이 국가 주도하에 벌였던 전쟁범죄는 대전 초기 [[스탈린]]의 밀명 하에 [[폴란드]]인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졌던 [[카틴 학살]] 뿐[* 이는 명명백백한 소련의 잘못이며, [[소련]]이 전쟁 초기 [[나치 독일]]의 '''공범자'''였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독일이 폴란드에서 저질렀던 잔혹사를 살펴본다면, 폴란드나 다른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에 항의할 문제지 독일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카틴 학살조차도 이념적으로 반소 인사들을 숙청했던 것이지, 폴란드인에 대한 완전한 절멸 작전은 아니었다. 애초에 당사국인 폴란드에서도 독일이 자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명분삼아 전쟁범죄를 정당화하려 한다면 당연히 분노할 것이고.]으로, 이후 독일과의 전쟁 과정에서는 공식적으로 모든 형태의 대민 범죄를 엄금하여 헌병 노릇을 하던 [[NKVD]] 부대에 적발되면 엄벌에 처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 지도부가 초중반부의 전쟁범죄를 암묵적으로 허용하다가 문제가 되니 그제서야 통제했다"는 주장도 옳다고 보기 힘든 것이, 소련군은 [[대숙청]]으로 장교단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의 기습공격 여파로 초반의 지휘체계마저 거의 무너졌기 때문에 군에 대한 통제력이 다소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온갖 학살극을 저지르며 침공해 들어오는 "악마의 군대"[* 실제로 소련에서는 이런 식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성전(군가)|이 문서]] 참고.]에 맞서는 데 남은 여력을 끌어모아야 했기 때문에 다른 범죄를 엄격하게 처단할 수 없었을 뿐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침략을 당한 대상이었기 때문에 초중반부에는 주로 자국 영내에서 전투를 벌였고, 당연히 독일 민간인을 마주칠 일 자체가 많이 없었다. 자국민에 대한 범죄는 당연히 엄격하게 처벌했음은 물론이고.[*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NKVD]]가 기강을 잡기 위해 식인행위를 한 사람들을 즉결처형한 사례 등은 많이 알려져 있다.]. 반면 독일군의 학살극은 조직적인 차원에서 발생하였다. 당장 [[아돌프 히틀러]]부터가 '강조명령'이라는 이름 하에 슬라브인에 대한 철저한 말살을 촉구했고, 현지 독일 장군들은 대부분 이를 충실하게 따랐다. [[국방군 무오설|국방군과 SS를 구별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이]],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국방군 장성인 [[발터 폰 라이헤나우]]였고, 이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라이헤나우는 6군 사령관이었고 룬트슈테트는 6군이 소속된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다. 따라서 상명하복이라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를 포함하여 단 한 명[* 다름아닌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그러나 라이헤나우가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이후 6군 사령관이 된 다음 이 강조 명령을 폐기했다.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프로이센 [[원수봉]]은 버려도 자신의 양심을 버리지는 않았으며, 그 대가로 전후 전범재판에서 처벌받는 대신 오히려 증인으로 참관하였다.]을 제외하면 장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1,360만 장병(=즉 징집된 독일 '''민간인''') 중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2백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은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역시 대표적인 예시이며, 이외에도 독일군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는 셀 수 없이 많다. 소련군 포로 학살도 만만치 않아서, 기록에 따르면 많은 수의 소련군 포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아우슈비츠 최초의 [[독가스]] 학살은 '''소련군 포로 600명'''과 유대인 250명에게 [[치클론B]]를 살포하여 살해한 것이었으며, 최종적으로 14만에서 50만 사이의 소련 포로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독일군 내 소련인 포로의 사망자는 독일 측 기록에 따르면 570만 중 330만(약 57.8%)에 달했고, 이는 NKVD 문서에 따른 소련군 내 독일인 포로의 사망자 추산인 273만 중 38만(약 13.9%)[* 독일 포로 사망자 수는 독일 측 최대 추산조차도 33%, 약 100만 명을 넘기지 않는다.]에 비해 '''네 배가 넘는 압도적인 수치'''이다. 한편 독소전쟁 말기 소련군이 동유럽을 진격하는 과정에서 200만 건이 넘는 강간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강간의 군대"라고 비난하기도 하나 정작 독일군에 의한 소련 여성 강간은 그 수십 배인 수천만 건에 달했으며 강간 후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치는 인종주의에 의거해 열등인종과의 성행위를 '인종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범죄로 여겼기 때문에, 이런 강간 범죄자들은 증거를 인멸한다는 측면에서라도 살인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42년 한 해만 밝혀진 성범죄 건수가 1천만 건이 넘고, 75만 명의 신생아가 독일군의 강간에 의해 탄생했다.[* 심지어 이것은 가해자인 독일 측의 보고서다. 보통 일제의 난징대학살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에서 알 수 있듯 전쟁범죄, 특히 성범죄는 가해자 측이 의도적으로 피해 규모를 쉬쉬하며 축소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 가해자 측에서 너무 많아서 축소하고 쉬쉬하며 적은 규모가 1천만 건에 신생아 75만 명 탄생이다. 실제론 이 몇 배 이상의 강간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42년만 해도 이 정도인데,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41년부터 독일군이 소련 영토에서 거의 쫓겨나는 44년까지의 통계치를 다 합한다면? 반면 소련군은 [[1941년]] 이후 이런 식의 약탈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뿐더러, 승전이 가까워지고 점령지의 통제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부터는 강간 등 중범죄자들을 즉결처분하는 식으로 군 기강을 다잡았다.[* 소련을 디스해서 미국으로 추방당한 반체제 작가인 [[솔제니친]]의 자전적인 소설인 수용소 군도에서도, 스탈린에게 불경죄를 범해 굴라그로 온 주인공의 감방 동료 두 명은 독일 여인을 강간했다가 NKVD에 체포된 [[소련군]] 병사였다.][* 결과론적으로 비슷한 얘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치가 열등인종과의 성행위를 금기시했다는 건 '''그들을 인종청소하는 건 허용하고, 심지어 장려했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소련군은 현실적인 패권국가로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을지언정, 어쨌든 해방자로 동유럽에 진주했다.] 소련군의 강간사례로 [[베를린의 여인]]이 흔히 인용되는데, 베를린의 여인의 주제가 그런 쪽이 아니라는 건 둘째치고 "독일군이 소련에게 한 만큼 소련군이 우리를 대했으면 독일 민족은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 이라는 주인공의 대사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이율배반적인 태도이다. 애초에 국가 단위에서 대놓고 인종청소를 자행한 것과, 국가에서 민간인 범죄를 금지하는 상황에서 병사/지휘관 개개인이 민간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 죄질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정작 현재 독일 정부는 독일군이 '''먼저''' 동유럽 점령지에서 벌여놓은 짓이 있기 때문에 소련군의 만행들이나 전후 독일계 주민들에 대한 보복성 학살·추방에 대해 어떠한 외교적인 항의도 피하고 있으며, 기껏해야 자국 내로 도망쳐온 독일계 실향민들에게 약간의 보조를 해 주는 정도이다. 오늘날 소련군이 동유럽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는 주로 학술적 차원에서 논의가 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대전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끼여 많은 피해를 입었고 전후에는 소련의 식민지배까지 받았던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같이 나치에 맞서 싸웠다는 명분이 있는 서방연합국 쪽에서 비판하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